09.05.15
'감독 김성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반드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말로 가장 야구적인 시각이겠지요. 저 역시 다양한 관점으로 SK야구와 김성근 감독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야 다양한 관점의 기사가 나오니까요. 하지만 '야구인 김성근'을 바라보는 제 시각은 하나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존경할 수 있는 '야구계의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제겐 조카가 한 명 있습니다.
간혹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녀석이 워낙 똑똑한지라(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전 그렇게 믿을 생각입니다.) 동화책을 다 읽었을 즈음엔 예외 없이 질문이 쏟아집니다. 물론 난감한 질문들이 대부분입니다.
"삼촌, 그런데 신데렐라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음, 여러분은 아시나요? 신데렐라의 국적을?
"삼촌, 인어공주 있잖아. 인어공주 몸에서, 진짜 생선냄새 나?"
인어공주의 주활동 무대가 바다인 만큼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나저나 인어공주는 사람일까요? 어류일까요? 물론 인어류겠지요. 세상에! 인어류라니.
어쨌거나 조카에게 이런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 대답은 늘 성의가 없습니다.
"신데렐라가 어느 나라 사람이긴. 한국 사람이지. 성(姓)은 '신'이고 이름이 '데렐라'야. 데렐라의 친구로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테킬라가 있어. 어때 이름 예쁘지?"
"인어공주가 물가에 나올 땐 페브리즈를 뿌리기 때문에 생선냄새는 전혀 나지 않아."
제 성의없는 대답에 조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으로 삼촌을 코너로 몹니다. 그럴 때면 결국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같은 건 없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 너도 다 컸다고. 5살이면 말이지."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가 참 나쁜 삼촌이라 생각됩니다. 음, 조카에게 미안하군요. 각설하고.
어디 이 세상에 없는 게 신데렐라와 인어공주뿐이겠습니까. 저는 한동안 야구계에 어른이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물론 야구계에 연세 높으신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풍부한 경험을 갖추신 베테랑 야구인은 또 왜 없겠습니까. 웬만한 야구장만 가도 야구인 몇 분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란 단순히 생체적 나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의 어른이란 사회적 의미라기보다는 사전적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른'의 진정한 뜻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전적, 사회적 의미의 '어른'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야구계에 그동안 어른이 없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설령 있다손 쳐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제가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전부터 저는 야구계의 어른을 그리워했습니다. 야구계의 어른이 하루 빨리 나타나시길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야구계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어른’께서 야구계의 질서와 난제들과 관련해 가르침을 주시길 희망했습니다. ‘어른’께서 젊은 야구인들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시며 용기를 주시길 열망했습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냉엄하게 꾸짖어주시는 ‘어른’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보이지 않고 그저 ‘나이 드신 분’들만 보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제 야구계의 어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요술램프에서 불쑥 나온 이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곁에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야구계의 어른으로 모셨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성근 SK 감독님입니다.
어제 잠실구장에 갔을 때 그곳에 있던 야구인들이 제게 "기사 봤어?"하고 묻더군요. "무슨 기사요?"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김성근 감독님이 쓴 기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 감독님이 기사를 쓰시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요. 그러다 결국 기사를 봤습니다. 한 스포츠전문지에 김 감독님이 특별기고란 이름으로 글을 쓰셨더군요.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이 나라에 야구기자가 얼마나 많은데 정작 써야할 기사, 야구팬들께 말씀드려야할 사항은 원로 감독님이 아니면 세상에 소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니 이 어찌 부끄럽고 참담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독님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았습니다.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진.리라고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만 제 시각에선 분명 타당하고 옳은 말씀들이었습니다. 시즌 중 갑자기 제도와 룰을 바꾸고 제멋대로 일정을 조정한다면 이게 어째서 프로야구입니까. 사회인 특급리그지.
프로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룰의 준수입니다. 아무리 잘못된 제도라도 그것을 시즌 중에 고치게 되면 예외가 생기고, 이 예외가 결국 프로야구의 일관성에 흠집을 남기게 됩니다. 왜 프로야구의 시즌을 가리켜 '정규시즌'이라 하겠습니까. 133경기의 장기 레이스를 소화하려면 일관되게 시즌을 운영해야 하고, 그것은 어떤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룰에 의해 보호돼야 합니다.
'정상'적인 '규정'에 따라 '정규시즌'을 운영해도 시원찮을 판에 시즌 중에 룰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8개 구단 사장님들과 KBO 사무국 직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리그를 운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프로야구가 그렇게 그분들 눈에는 가소롭고 가벼운 리그로 보인단 말입니까. 프로야구가 그분들께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리그' 정도로 비친단 말입니까.
1년 마다 룰을 바꾸고 도대체 뭐에 쓰이지도 모르겠는 규정을 급조하면서, 정작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도덕성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8개 구단 사장들과 KBO 사무국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야구는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야구팬들이 잠시 여러분께 야구리그 운영을 위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탁입니다. 이런 식으로 야구를 대하지 말아주세요.
김 감독님께서 쓰신 기사의 두줄이 사라졌지요. 과거의 인사가 KBO에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 준엄하게 꾸짖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도 일전에 그와 관련돼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일부 야구인들에게 '그냥 묻어가지 뭘 잘났다고 튀고 그래'하는 덕담(?)을 들었습니다만, 사실 야구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어른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튀는' 행동이 되고,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묻어가지 못하는' 태도가 되는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김 감독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본인의 안락만 생각했다면 침묵으로 일관하셨겠지요.
어제 김 감독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독님, 때론 침묵이 모두에게서 환영받을 때도 있습니다. 언잖으셔도 참으세요."
길게 한숨을 내쉰 노(老)감독은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굴 위해서 야구하나. 자네야? 나야? 야구팬을 위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침묵하는 게 야구팬을 위해 좋은 거야? 내가 욕 들어도 야구팬들이 야구를 제대로 보면 그게 좋은 거 아니야? 잘 들으라고. 나이 든 우리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게 맞아. 그러라고 있는 게 어른이라고. 설령 욕을 먹어도 밑에 사람들이 먹는 게 아니라 어른이 먹어야 한다고."
김 감독님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에 관해 저는 여러분들께 제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 김 감독님을 독립된 야구 감독으로만 놓고 보자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김 감독님의 진정성과 야구팬에 대한 의식만은 여러분께서도 잘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어른이 야구계에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기쁩니다.
세상엔 길을 돌아가지 않고 자신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당한 보폭으로 가던 길을 계속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비난하셔도 좋습니다만 그들의 진정성만은 애써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그 '진정'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엔 정말 있으니까요. 김성근 SK 감독님처럼 말이지요...
출처 : http://blog.naver.com/dhp1225/120068452981
'긁어오기 > 스포츠춘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동희의 입장] SK 김성근 감독 “김광현과 재계약은…” (0) | 2011.07.26 |
---|---|
[박동희 기자의 in 캠프] SK 김성근 감독 (2010) (0) | 2011.05.25 |
[스포츠Q] SK 김성근 감독 "소리 쳐도 메아리가 없다" (0) | 2011.05.25 |
[박동희 in 캠프] SK 김성근 감독과의 대화 (2011) (0) | 2011.05.25 |
[박동희 가을의 전설] '제2의 해태'를 노리는 SK (0) | 201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