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03
김성근은 해태 2군 감독을 거치며 김응룡과 해태에 관해 공부를 한 뒤 96년 쌍방울 감독을 맡았다.
쌍방울은 90년 창단해 2군리그에 참가한 뒤 91년부터 1군리그에 들어왔다. 이 시점에 한국프로야구도 8개구단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발주자였던 쌍방울은 91년부터 95년까지 7위~8위~7위~8위~8위에 그치며 좀처럼 최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0년대의 인천팀처럼 포스트시즌 진출은 남의 일처럼 보였다.
그런 쌍방울이 김성근이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 전혀 다른 팀으로 거듭났다. 김성근은 사령탑에 취임하며 “목표는 60승”이라고 밝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런데 기적처럼 70승54패2무(0.563)를 기록하며 페넌트레이스 2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8월 14일 전주 현대전부터 28일 대전 한화전까지 무려 13연승을 거두며 선두를 달리던 김응룡의 해태마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 다른 팀에서 유니폼을 벗을 위기에 처한 선수를 끌어모아 거둔 성적. 그야말로 그해 쌍방울의 모습은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과 다름없었다. 두자릿수 승리를 거둔 투수는 프로 4년생 성영재밖에 없었지만 95년 삼성에서 트레이드해온 김현욱과 신인 박주언을 요긴하게 중간계투로 활용하면서 인해전술로 상대팀들을 격파해나갔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뛰어든 현대에 2연승 후 3연패를 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97년을 앞두고 전문가들은 96년의 기적을 무시하며 시즌에 앞서 쌍방울을 또다시 확실한 꼴찌 후보로 꼽았다. 그냥 물러날 김성근이 아니었다. 마운드의 주축세력인 오봉옥 박성기 등이 4월에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에이스 성영재도 허리부상으로 5월 이후 힘을 쓰지 못하는 등 악재가 더욱 겹쳤다. 그러나 중간계투 김현욱을 20승투수로 만들며 다승은 물론 방어율(1.88)과 승률(0.909) 3관왕에 올려놓는 등 구원승만 42승을 기록하며 팀을 정규시즌 3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야구계에서는 김성근에 대한 두 가지 평가가 엇갈렸다. 한쪽은 “하위팀을 상위팀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라는 평가였다. 89년 태평양의 돌풍에 이어 96년과 97년 만년 하위팀 쌍방울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았으니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그래도 우승을 만들지는 못하는 감독”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야구계에서는 ‘김성근 야구’에 대해 경외감을 표하는 쪽도 있었지만 안티 세력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성근은 쌍방울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프로야구 감독을 하면서 쌍방울 때만큼 전력투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새벽 혹은 해가 뜰 때까지 데이터와 씨름을 했으니까. 그때부터 상대타자를 보면 뭘 기다리는지까지 보이기 시작했어. 선수분업화를 통해 공부도 많이 했고. 야구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93916.htm?ArticleV=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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