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6
88년 시즌 도중 구단 사무실에서 신임투표까지 부쳐졌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김성근도 불쾌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시즌 종료 후 결국 OB와 결별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프로에서 처음 잘렸다. 82년 원년 코치로 출발해 7년의 세월을 함께 한 OB였다. 84년 42세의 나이에 감독을 맡아 사령탑으로서 5년째. 83년 해태 사령탑을 맡은 이후 줄곧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을 제외하면 프로야구 초창기 한 팀에서 가장 오랫 동안 감독을 지낸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후 그는 한 팀에 오래 버티지 못하는 감독이 됐다. OB 이후 가장 수명이 길게 붙어있었던 것이 쌍방울 감독 시절의 3년반(96년~99년 전반기). 나머지는 모두 2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잘리면 다른 팀에서 항상 영입후보 0순위로 올렸다. 그를 데려가려는 팀의 선수단 개조와 성적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고하는 팀은 구단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그의 성격을 항상 트집잡았다.
태평양에서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왔다. 82년 삼미로 출발해 청보와 태평양으로 넘어간 인천 연고구단. 83년 장명부 효과로 반짝하기는 했지만 7년간 꼴찌만 5차례 차지하고 단 한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약팀 중의 약팀이었다. 당연히 전력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태평양 역시 청보를 인수해 프로야구에 뛰어든 첫해인 88년 꼴찌부터 시작했다. 태평양의 신동관 사장은 김성근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고 약속하며 팀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김성근은 두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선수나 코치에게 먼저 얘기하지 말고 뭐든지 나한테 먼저 연락하라. 만약 이를 어긴 것이 발각되면 내가 먼저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당시 태평양은 구단에서 선수를 수시로 불러 선수단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이 잦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치가 감독에게 와서 “사장님이 감독님을 보자고 하신다”며 중간다리 역할도 했다. 김성근은 농구의 신동파가 태평양 감독 시절 이런 일에 당했다는 얘기도 익히 알고 있었다.
김성근은 당시 상황을 놓고 “나를 감독으로 불러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 감독을 맡으면서 그런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러나 예의를 무시했어. 그래야 코치나 선수가 구단이 아니라 감독인 나한테 매달린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 팀 순위에 따른 보너스를 옵션으로 내걸었다. 우승시 1억원. 포스트시즌 순위에 따라 6~7000만원의 보너스를 요구했다. 구단에서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그가 “나중에 돈 때문에 싸우면 지저분해진다. 미리 정해 놓으면 서로가 깔끔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구단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는 코치 연봉 책정까지 그에게 일임했다.
구단 입장에서 첫인상은 한마디로 ‘까칠한 김성근’이었다. 그러나 꼴찌팀으로서 성적을 올릴 수만 있다면 그런 조건쯤이야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김성근은 곧바로 선수단 개조작업에 들어간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91451.htm?ArticleV=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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