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5
87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1패로 앞선 가운데 김성근은 4차전을 앞두고 선수들을 불러모아 “오늘 실패하면 5차전도 가망없다. 절대 져서는 안된다. 4차전을 결승전이라고 생각하고 게임에 나서라. 오늘 남은 투수들을 모두 투입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86년의 뼈아픈 패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86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을 내준 뒤 2?3차전을 거푸 잡아 2승1패의 유리한 고지를 밟았지만 4차전을 패하면서 최종 5차전까지 허무하게 내줬다. 2경기 중 1경기만 이겨도 된다는 여유가 오히려 독이 됐다는 생각에 전년도와 똑같이 1패 후 2연승을 달린 상황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4차전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OB는 87년에도 4차전에서 다 이긴 경기를 허무하게 내주고 말았다. 해태투수는 1차전 패배를 안겨준 김대현. OB는 6회초까지 2-0 리드를 안았다. 6회말 김종모에게 솔로홈런. 8회말 김봉연에게 우월 적시 2루타를 맞고 2-2 동점을 허용했지만 9회초 구천서의 천금같은 우전 적시타로 3-2로 달아났다.
9회말 2사 3루. 김성한의 유격수쪽 내야땅볼이 나왔다. OB 덕아웃의 선수들이 승리를 예감하며 모두 뛰어나가려는 순간 유격수 유지훤이 평소답지 않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 타구를 잡아 던졌으나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3-3 동점이 돼버렸다. 그리고 연장 10회말 1사 1, 3루 위기에서 만루작전을 썼지만 마운드의 최일언이 통한의 폭투를 범하며 허무하게 결승점을 헌납하고 말았다.
김성근은 김진욱 윤석환 최일언을 투입하며 총력전을 펼쳤지만 홀로 완투한 김대현에게 밀려 3-4 역전패를 당한 것이었다. 5차전에서도 0-4로 완패해 86년과 똑같이 2승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동기생인 김응룡은 한국시리즈에서 또 삼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김성근은 이후 가을잔치에서 김응룡과 2차례 더 맞대결 기회가 있었지만 그 벽을 넘지 못했다.
김성근은 “4차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지금도 후회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선수들이라고 왜 모르겠어. 감독이랍시고 쓸데 없이 나서다 일을 그르쳤어. 그때는 젊어서 그랬겠지. 아무튼 큰 교훈을 얻었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후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는 선수들에게 단 한번도 이런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값비싼 패배를 통해 또 하나의 배움을 얻은 셈이었다.
88년 시즌 중에 이미 구단에서는 김성근을 경질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구단 프런트에서 구실을 만들고 여론화하기 위해 팬들에게 ‘김성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고 다녔다. 구단에서 김성근 친구인줄 모르고 질문을 하면서 김성근 귀에까지 이 사실이 들어갔다. OB는 시즌 중에 기자들에게 “올 시즌 끝나면 김성근도 끝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팀이 깨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김성근도 정든 OB를 떠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91120.htm?ArticleV=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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