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1
플레이오프에 대비해 훈련을 해야했으나 이천의 2군구장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김성근을 비롯해 코칭스태프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요즘에는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보너스가 지급되고 논공행상이 벌어지는 것이 정착됐지만 83년 MBC가 해태와의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보너스 문제로 자멸한 적이 있을 정도로 프로 초창기만 하더라도 돈 문제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86년 9월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리면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는 점. 시즌 최종전이 9월 17일 열렸는데 포스트시즌 첫 관문인 플레이오프 1차전은 10월 11일 열리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김성근은 여기저기 선수들에게 연락을 취해 상황을 파악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선수들이 두 패로 갈라져 도망을 갔다는 사실. OB는 당시 특정 스타를 중심으로 2개의 파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었다. 최주억 코치를 집으로 불러 “내가 ‘×××파’를 맡을 테니. 최 코치는 ‘×××파’ 선수들을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김성근으로서는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뒤 처음으로 겪은 난감한 일이었다. 마산상고 감독 시절 도망간 선수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고. 충암고 감독 시절에는 선수들의 집단 패싸움 등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어디까지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어린 선수들이었다. 프로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약 1주일 만에 우여곡절 끝에 선수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미팅을 하고 훈련을 시작하려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또 터졌다. 구단 프런트 직원 2명이 이천 구장에 나타났다. 손에는 007 가방을 들려 있었다.
‘마침내 구단에서 보너스를 현찰로 가지고 왔나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에는 돈이 있었지만 다른 가방에는 임의탈퇴 신청서 용지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박용성 그룹회장에게까지 보고됐고 박 회장은 “구단이 선수에게 끌려가서는 안된다”고 격분해 이같이 지시했다. 구단에서는 선수들 앞에 007가방을 열어놓고 “보너스를 받고 싶은 선수는 받아가라. 대신 임의탈퇴서를 쓰고 받아가라”며 압박했다.
김성근은 프런트 직원에게 “단장에게 돌아가서 너는 임의탈퇴서 돌렸다고 해라. 내가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 될 것 아니냐”며 설득했다. 박용민 단장의 호출이 떨어졌다. 구단 사무실에서 선수단 관리 소홀에 따른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구단과 선수의 중간에 낀 감독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장인 이종도가 결국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 박용민 단장과 직접 만나 선수들을 대표해 사과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종도는 “83년 MBC 시절에도 보너스 지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OB에서도 똑같은 일에 주장으로서 총대를 매야하다니”라며 구단 프런트에 힘든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훗날 94년 선수단 이탈 파문이 있었지만 OB로서는 사실 이때 먼저 선수단 이탈 파문을 겪었다. 다만 86년에는 언론에 이 사실이 발각되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성근이나 OB로서는 잊지 못할 큰 내홍이었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9679.htm?ArticleV=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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