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5

“반쪽발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비참했어. 요즘 애들은 교포보고 반쪽발이라는 말을 잘 안하지만 당시만 해도 심했지. 그때 ‘우리는 뭔가’ 싶을 때가 많았어. 우리나라니까 편하겠지 싶어 왔는데…. 어쩌면 반쪽발이라는 말이 더욱 분발하는 계기가 됐는지 몰라. 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으니까.”

그의 말대로 재일동포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일반인들이 ‘반쪽발이’라고 조롱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일부 야구인들이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수군거리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당시 많은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실업팀에 입단했지만 지금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야구인은 이제 김영덕과 김성근 둘 뿐이다. 다 일본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시절 김성근에게 힘이 되어준 친구가 있었다. 최관수였다. 최관수는 한살 아래였지만 김성근의 외로움과 고통을 알았고 언제나 그를 이해해줬다. 최관수는 동산고 3학년 때 고교선수로는 유일하게 국가대표로 발탁될 정도로 투수로서 빼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그리고 72년 군산상고 감독을 맡아 ‘역전의 명수’로 만든 인물이다. 최관수는 79년 파킨스씨병 증세를 보인 뒤 98년 군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김성근과 최관수의 인연은 더욱 발전했다. 최관수가 김성근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줬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 김성근의 부인 오효순(62)씨다. 최관수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오면서 함께 나왔는데 오씨는 당시 김성근의 팬이었다.

김성근은 64년 20승5패를 거뒀다. 4편에 소개했지만 당시 비자 문제로 시즌 말미에 일본으로 들어가면서 다승왕은 놓쳤지만 최고 좌완투수로 올라섰다. 65년 영구귀국을 조건으로 기업은행은 계약금 50만원의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50만원은 국내 최고대우였고. 서울 시내 집을 살만한 큰 돈이었다.

김성근은 “당시 김응룡과 박영길이 최고타자였지. 우응룡 좌영길이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박영길은 좌타자여서 좌투수인 내가 강한 면이 있었는데 김응룡한테는 약했어. 까다로웠지. 덩치도 컸지만 스윙이 부드러웠어. 지금 김동주처럼. 그러나 김동주는 몸이 앞으로 쏠릴 때가 있지만 김응룡은 항상 중심이 잡힌 상태로 쳤어”라며 훗날 필생의 라이벌이 된 김응룡을 그렇게 회상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64년 20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지만 동시에 투수로서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지는 심각한 어깨부상을 겪었다. 불펜에서 공을 던질 때 포수까지 날아가지 않았고. 경기가 끝나면 숟가락을 들기도 어려울 정도였지만 9연속완투를 펼쳤다. 어깨통증은 팔꿈치 통증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식한 혹사가 아니라 팀 에이스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어깨부상으로 인해 지금까지 걸어다닐 때 독특한 습관이 생기게 된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3695.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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