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1


초등학교 때 그는 두 가지를 좋아했다. 야구와 연극이었다. 야구가 너무 좋아 동네 공터에서 대나무 방망이로 테니스 공을 치며 야구를 했다. 연극부에도 들어갈 정도로 연극에도 빠졌다. 어쩌면 야구를 하지 않았으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당시 일본에는 연극이 활발했어. 동네마다 공연도 많았고. 연극을 좋아했지만 소질은 없었던 것 같아. 한번은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울어야하는 장면이 있는데 옆에 친구가 웃는 걸 보고 내가 웃어버렸지. 연극이 끝난 뒤 초등학교 선생님한테 뺨을 맞기도 했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 멀리던지기 대회에 나가 58m를 던질 정도로 어깨를 타고난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이 느려 외야에나 가끔씩 서는 후보였지만 타고난 어깨로 서서히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안에 돈이 없어 야구명문 사립고에 갈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던 형은 "공립학교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야구실력이 없는 가쓰라 고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큰 대회에 나갈 팀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 3때 오사카에서 최태황 재일동포 야구협회 이사가 교토까지 찾아왔다. 김성근의 일본에서의 성은 '가네바야시(金林)'. '가네(金)' 즉 김씨 성을 쓰는 그가 한국계라는 것은 누가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 이사는 교토까지 왔고 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 방문경기 대회에 에이스 김성근을 포함한 선수단을 구성했던 것이다. 김성근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밟는 한국땅이었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고교팀과 14승1무2패의 전적을 올렸다. 좌완투수 김성근의 이름이 한국에도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

동아대가 그를 포함한 6명의 동포선수들을 스카우트했다. 김성근은 대학춘계연맹전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재일동포 선수 6명은 나고 자란 환경과 너무나 달라 적응이 힘들었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자 결국 중퇴를 하고 6명 모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60년 교토상호차량에 취직해 사회인야구를 하던 그는 퇴근을 하면 모교인 가쓰라 고교에 가서 밤이 새도록 훈련에 매진해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같이 훈련에 몰아넣기도 했다. 후배들은 그가 나타날 때마다 "독종이 왔다"고 수근거릴 정도였다. 일본사회인야구대회 교토예선과 긴키대회에서 감투상을 받았다. 팀전력이 약했지만 김성근은 돋보였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2532.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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