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2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아대를 1년 만에 중퇴한 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김성근은 60년 5월 재일동포 성인야구팀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아 한국 실업팀들을 연이어 격파했다.

그러자 한국 실업팀 교통부에서 곧바로 김성근을 스카우트했다. 돈을 벌어야했던 김성근은 관광비자를 들고 들어와 61년까지 교통부에서 활약했는데 62년 1월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4회아시아선수권대회에 마침내 생애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약관 20세의 나이. 가족을 두고 홀로 한국땅을 밟은 그에게 태극마크의 의미는 컸다. 당시 김양중 박현식 김응룡 백인천 등이 국가대표 멤버였는데 재일동포 출신 선배인 배수찬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김응룡과는 이후 프로에서 오랫동안 우정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김성근은 62년 기업은행 창단멤버로 이적했다. 그리고 63년 11월 대통령배실업연맹전 인천시청전에서 탈삼진 13개를 곁들여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64년은 선수로서의 최고 황금기였다. 좌완투수로서 우타자 몸쪽에 박히는 강속구에 타자들이 가을 바람에 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당시 실업야구 13개팀은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풀리그를 도입했다. 기업은행 에이스 김성근은 20승5패를 기록하며 강력한 다승왕 후보였으나 신용균(24승)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페넌트레이스 12경기가 남아있는 상황. 한일 국교가 단절됐던 당시 매년 관광비자를 갱신하며 한국에 들어왔던 그는 일본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일본정부에서 더 이상 관광비자를 내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둘 중 하나. 일본에 눌러앉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일본을 떠날 것인가. 그는 일본거주권을 버리기로 했다. 일본의 가족을 버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생이별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교토에 들러 가족에게 이같은 의지를 전했더니 가족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64년 12월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여권을 숨겨놓고 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성근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가족을 다 버리고 혼자 한국에 들어가 살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있다"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다다미 밑에 숨겨놓은 여권을 건네줬다. 형, 누나와 함께 오사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집앞까지만 배웅을 나섰다. 그리고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사카에 갔더니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다시 교토 집으로 가야했다.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이미 자신의 방을 깨끗하게 치운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아들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정리를 한 것이다. 다음날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처음 배웅할 때와 똑같았다.

김성근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문 너머 철조망 사이로 형과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영원히 이별이구나.' 김성근은 그제서야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가슴을 치며 울었다. 김성근은 당시 왜 가족과 생이별을 선택했을까.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2898.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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