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4

당시 스물 두살이었다. 가족을 버리고 일본을 떠나는 김성근도 독했지만 떠나보내는 아들 앞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어머니도 독했다. 김성근 감독은 “난 어머니 성격을 닮은 것 같아.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 안 보이려고 하는 것 말이야”라고 회상했다. 일제시대에 독하지 않고는 일본땅에서 살아남기 어려웠고. 어머니는 그래서 더욱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64년 12월. 그는 왜 가족을 버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을까. 김성근은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국가대표에 뽑힌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일본에서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야구를 하는 것보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모국에서 뛰고 싶었다. 두번째는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처절하게 가난과 싸워온 그는 한국에서 밥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기업은행에서 뛸 때 다른 선수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다. 당시 실업야구팀들은 기량이 우수한 재일동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면서 몸값이 올라갔다. 세번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데 대한 도취였다. 일본에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매일 신문에 최고 좌완투수인 김성근 이름 석자가 오르내렸다.

‘이젠 일본의 가족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혼자 살아남아야한다. 한국에서 최고의 투수가 되어야만한다. 남한테 지지 않고 살아야한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울음을 삼키면서 각오를 다졌다.

일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풀린다고 했던가.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한국행을 택했는데 65년 1월 한?일 국교가 정상화됐다. 한달 사이에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김성근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며 웃는다.

한국에 들어와 그의 뜻대로 야구 하나로 입신양명을 하기 시작했지만 재일동포 야구선수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말을 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기업은행 시절 야구가 끝나면 은행일을 해야했는데 한국말도 못하니 창구에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은행에서 꿔다논 보릿자루마냥 우두커니 앉아있어야만했다. 원래는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는데 말이 안되니 성격마저 내성적으로 변했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다. 당시 재일동포인 그를 두고 주위에서 걸핏하면 “반쪽발이”라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고 핍박을 받았는데 한국에 왔더니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 “반쪽발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참했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3465.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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