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6

야구로 성공하겠다고 한국까지 왔는데 어깨가 고장나니 막막했다. 스포츠의학도 없던 시절. 웨이트트레이닝을 금지하고 심지어 어깨를 보호해야한다며 수영도 못하게 하던 때였다. 투구가 끝나면 아이싱을 하는 요즘과는 달리 공을 던지고 나면 어깨를 따뜻하게 해야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투수는 경기 후 스웨터를 입기도 했다. 김성근은 어깨통증이 심해지자 열을 내는 약을 매일 발랐다. 우선은 후끈후끈 열이 나니 잠시 통증은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투구 후 모세혈관이 터져나가는데 어깨에 열을 더욱 냈으니 투수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당시 한 잡지에 메이저리그 최고 좌완투수로 활동하던 LA 다저스의 샌디 쿠팩스가 얼음물에 팔꿈치를 담근 사진이 실렸다. 그는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를 치르고 나면 왼쪽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어느날 밤에 왼쪽 어깨를 깔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자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져서는 안된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그는 달렸다. 종암동 서울상대 야구장에서 을지로 입구까지 매일 뛰었고. 기업은행 야구장이 경기도 고양군에 생기자 거기서부터 새벽이슬을 맞으며 불광동을 거쳐 서소문까지 매일 달렸다.

그는 길을 걸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왼쪽 어깨가 처지는 버릇이 있는데 바로 그때 얻은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64년 어깨통증을 참고 9연속경기 완투를 펼치면서 20승을 거뒀지만 갈수록 구속이 떨어졌다. 그래도 요령으로 승리를 척척 따내니 팀으로서는 김성근을 믿고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60년 동아대에 입학했을 때 포수가 뻗은 미트 위로 강속구가 살아올라 팔뚝에 맞았던 일은 신화로만 남게 됐다.

65년 힘이 떨어진 공으로도 백호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더 이상 마운드에서 공을 뿌릴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부터 타자(1루수)로 전환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는지 곧바로 기업은행 4번타자를 맡기도 했다.

그가 밝힌 타자로서의 에피소드 하나. “부산에서 일본 혼다팀과 친선경기를 했는데 포수가 일본말로 투수에게 사인을 내더라고. 홈런을 때렸지. 일본 배터리는 다음 타석에도 큰 소리로 자기들끼리 사인을 주고받았어. 그런데 연타석 홈런을 쳐버렸어. 일본선수들이 내가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라며 웃었다.

김성근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는지 몰라. 1루에 서니까 상대 사인을 캐치하는 능력도 차츰 생기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데이터도 연구하기 시작했고 야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니 여러가지가 보였어”라고 말했다. 1루수로서 다른 내야수에게도 공을 던지기 어려운 지경이 되자 68년을 끝으로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4027.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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