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24
의리와 인정, 그리고 충성심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동양 사회에서는 '희생'이라는 자세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조건이 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자기 주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가는 등 조직보다는 우선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희생이라고 하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다.
올해 요미우리로 이적한 이승엽은 거인 군단의 4번 타자로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까지 지바 롯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때리는 것에만 전념했으나 요미우리의 제70대 4번 타자라는 전통과 명성 속에 상하위 타선의 연결 고리로서 윤활유 구실을 철저하게 해내며 조직을 살리는 희생 정신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3할 2푼 9리의 타율, 18타점 5홈런 22득점, 4할에 가까운 출루율(.393)은 4번 타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특히 올해 20게임에서 9개의 볼넷을 얻어낸 것은 지난해 117경기에서 33개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스스로를 억제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5∼6번 타자에게 찬스를 만들어 줘 득점 1위로 이어지는 힘이 되고 있다. 5번 타자 고쿠보가 20타점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자신의 타율(.343)이 높기도 하지만 상대 투수들이 이승엽에게 신경을 쓰다 보면 긴장감이 늦춰져 쉬운 볼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있다.
올해 이승엽에게 중요한 변화는 스트라이크 존의 구별이 확실해져 있다는 점이다. 어려운 공이 들어오면 커트를 해 투수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지난해에는 거꾸로 나쁜 볼을 손을 자주 대 볼넷보다는 삼진이 많았고 스스로 투수에게 밀리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변화가 올 시즌 이승엽의 큰 성장을 의미하고 있다.
15승 4패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는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는 '전원 야구'와 '스몰 베이스볼'을 앞세워 예상 외로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이승엽과 같은 희생 정신을 선수단 전원이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후 히어로 인터뷰의 주인공이 매일 바뀐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퍼시픽리그(지바 롯데)와 센트럴리그(요미우리)의 다른 점 3가지도 홈런 타자인 이승엽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첫째 센트럴리그에도 정상급 투수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퍼시픽리그보다는 기량이 떨어진다. 두 번째는 볼 배합이다. 퍼시픽리그는 때때로 얻어 맞더라도 (이승엽이 잘 친 것이 아니라 투수의 컨트롤 실수라 생각해) 이승엽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했으나 센트럴리그에서는 얻어 맞으면 곧바로 볼 배합을 바꾸는 단순한 피칭 패턴이 많다. 세 번째는 홈 구장인 도쿄돔의 좌중·우중간이 좁고 타구가 잘 뻗어나가며, 같은 센트럴리그인 히로시마와 야쿠르트의 홈 구장이 좁다는 점이다. 이 3가지는 이승엽으로서는 40개 이상의 홈런도 노릴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올해는 특히 크게 스윙하지 않고 짧게 끊어치기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도 지난 2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교훈이다. 1주일 전 나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승엽이 "홈런을 노리고 크게 풀 스윙을 해봤으나 밸런스가 무너져서 안 되겠더라"고 말한 것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최근 삼진이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올해는 큰 슬럼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대와 겨루기 전에 자기와의 싸움에 먼저 부딪혀 주저 앉곤 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마음과 기술·체력 등 모든 점에서 하루 하루 진화하고 있다.
스스로를 억제해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모습은 항상 조직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희생 정신을 통해 개인도 성장할 수 있다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자기 주장만 하고 개인주의를 앞세우는 한국 사회도 이런 점을 본받았으면 한다.
일본 지바 롯데 코치 김성근
출처 :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27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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