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14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이어 동포 성인야구단이 초청돼 국내 실업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사진은 동포 성인야구단의 일원으로 온 한 선수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학생들에게 사인을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제 동포 야구단도 서울운동장도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1969년 8월 8일 김포국제공항. 도쿄발 KAL기에서 내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일본 시골에 온 기분인데.” 한국을 처음 본 재일동포 선수들의 첫마디는 대개 그랬다. 당시는 김포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지금 같지 않았다. 한강변 정비는 고사하고 5층 이상 건물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부모님한테 들은 것보단 낫네. 난 순전히 허허벌판인 줄 알았거든.”

잠자코 아이들의 말을 듣던 한재우는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네. 모국의 발전상을 보기 전까지 아이들은 ‘한국’하면 창피해 하거나 부끄러워하게 마련이었네. 하지만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면 편견은 사라지고 말지. 자네는 모를 거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곧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란 걸 말이네. 그게 ‘재일(在日)’의 운명일세."

하지만 마냥 미소만 지을 형편이 아니었다. 버스에 붙어있는 ‘제 12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의 의미를 되새겨야 했다.

‘재일동포 야구단’과 ‘모국관광단’사이

“자, 선수 여러분. 모국방문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한재우는 선수단을 옥상으로 모았다.
“우리는 관광을 하기 위해 방한한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순간 귀제비 한 마리가 그를 스치고 대기를 가른 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경기가 목적입니다. 같은 또래의 동포선수들끼리 선의의 경기를 통해 우정을 다지고 서로의 야구실력을 견주는 게 모국방문의 가장 큰 목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모국의 야구팬들에게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십시일반 경비를 마련해준 동포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한여름 밤의 옥상에서 한재우와 선수들은 선전을 다짐했다. 한재우는 지금처럼 의지만 확실하다면 4일 뒤인 12일부터 27일까지 펼쳐질 16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신재기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히로시마 토요카프 시절의 김기태. 그의 패기있는 투구는 고교시절에도 같았다



5년 전 동포팀 선수로 참가한 바 있는 신 코치는 전해 성적을 보며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게 전해 동포팀은 16전 5승6무5패를 기록하며 역대 모국방문팀 가운데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경비 문제로 2년간 공백기가 있었다지만 이전 10회 대회까지 항상 우위에 있던 동포팀이었다.

만약 2년 연속 부진하기라도 한다면 “재일동포팀도 별 게 아니다”는 혹평은 둘째 치고 “약체 선수들이 중심이 된 모국관광단”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질 게 자명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감독님. (김)기태의 오른손 검지가 부상인 것 같습니다. 손가락이 퉁퉁 부었습니다. 개막전 등판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습니다.” 신 코치의 보고를 받은 한재우가 양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큰일이었다. 팀의 에이스가 부상이라니. 모국방문에 들떠 밤낮없이 투구연습을 할 때부터 말렸어야 했다. 서울 중앙고와의 개막식이 당장 모레인데.

“신 코치. 장계록을 개막전 선발로 준비시키게.” 한재우는 그렇게 말한 뒤 모든 역량을 타선에 집중토록 했다.

12일 서울운동장(동대문야구장)에서 거행된 ‘제 12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 개막식과 1차전 중앙고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만원관중이 입장했다. 두 팀은 6회까지 0-0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투수전의 백미를 선보였다. 그러나 7회초 동포팀 5번 타자 김현조가 3점 홈런을 치며 균형이 무너졌다. 김기태의 공백을 타력으로 극복하겠다던 한재우의 계획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중앙고는 예상보다 강했다. 7회말 4번 이종도와 박형규, 김근후 등이 맹타를 터트리며 장계록을 일시에 무너뜨린 것이다. 결국 점수는 3-4 동포팀의 패배로 끝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야구관계자들과 기자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동포팀을 바라봤다. 13일 성동고와의 경기에서 12-0 대승을 거두며 체면치레를 하는가 싶었지만 역시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선 8월 15일 광복절에 벌어질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와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당시 초고교급 투수 유남호가 버틴 선린상고는 고교최강팀이었다. 그해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여기다 동포팀이 15일 더블헤더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악재였다. 오전에 서울 장충고와 대전한 뒤 오후 선린상고와의 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최악의 스케줄이었다.


1987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한신 타이거즈의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황진환, 사진 가운데)가 한재우 감독(맨 왼쪽)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다



에이스 김기태, 부목을 떼다

15일 동포팀은 첫 경기서 장충고를 4-1로 이겼다. 출발이 좋았다. 벤치 분위기도 밝았다. 그러나 선린상고 에이스 유남호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의 공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남호의)공이 아주 좋았다고. 직구가 돌덩이 같았네. 속으로 ‘아, 이거 힘들겠구나’했네.” 한재우의 회고다. 그때였다.

“감독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선발 오더를 짜던 한재우가 고개를 들었다. 김기태가 서 있었다.
“뭐라고?”
“저를 선발투수로 기용해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김기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별개다. 마음의 자신감이 몸의 훼손을 부를 수 있다. 한재우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목을 대고 압박붕대로 고정시킨 김기태의 오른손 검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의 의지는 높게 평가하네. 고맙네. 하지만 무리하게 등판했다가 영원히 손에서 공을 놓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 완벽한 컨디션일 때 던져도 괜찮아.” 한재우가 김기태의 등을 두들겼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김기태가 오른손 검지에 대고 있던 부목과 압박붕대를 뗐다. “감독님, 전 모국에 관광하러온 게 아닙니다. 제발 출전시켜주십시오.”

김기태가 선발을 자청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승부욕이 강하고 팀의 에이스라는 책임감 때문도 있었지만 스탠드 어딘가에 있을 친척들에게 자신의 투구를 선보이고 싶었다.

“여관 주인이 날 불러. 김기태 큰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거야. 밖에 나가니까 어느 노인네가 생닭을 한 마리 손에 쥐고 있지 뭔가. 깜짝 놀라서 물으니까 ‘조카 몸보신 해주려고 갖고 왔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진 않네만 기태는 그걸 부끄러워하기보다 고맙게 받아들였네. 일본에서 차별에 시달리다 한국에서 비로소 따뜻한 정을 느낀 게지.”

김기태는 공이 아니라 혼을 던졌다. 8회말 2사 정장헌에게 볼넷을 내줄 때까지 선린상고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연출했다. 유남호의 1실점 완투와 9회말 동포팀의 실책으로 1-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시종일관 동포팀이 리드한 경기였다. 그제야 한국야구관계자들 입에서 “역시 재일동포팀”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기태는 16일 성남고와의 경기에도 선발 등판해 5안타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놀라운 건 그의 완투가 17일 경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리할 이유라도 있었을까. "3일 연속으로 친척들이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김기태가 밝힌 자진등판의 배경이었다.

20일 서울시리즈 최종전에서 선린상고와 재대결을 펼친 동포팀은 김기태의 3피안타 1실점 호투로 3-1 승리를 거뒀다. 마침내 한국 고교최강팀을 꺾은 것이었다. 이후 지방순회에 나선 동포팀은 인천, 대전, 대구, 부산을 거치며 지역 강호들과 열전을 펼쳤다. 27일 부산상고와의 경기를 8-3으로 끝냈을 때 동포팀이 손에 쥔 성적표는 16전11승1무3패였다. 전해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 훌륭한 성적이었다.

“선수들도 긴장했지만 나도 그랬네. 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맡은 첫해였으니까. 다행히 성적이 좋아 뛸 듯이 기뻤네(웃음). 장훈, 배수찬, 김성근, 현성호 같은 뛰어난 후배들이 잘 닦아 놓은 길에 누가 되지 않았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네.” 한재우의 말이다.

장기영이 길을 닦고 배수찬, 장훈, 김성근이 다진 모국방문대회

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방문 친선경기가 처음으로 열린 건 1956년이었다. 한국일보 고 장기영 사장의 공이 컸다.

장 사장은 일본에서 태어난 동포 2세들에게 모국을 알게 하고 모국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이와 함께 그들이 배운 선진적 일본야구를 한국야구에 접목해 국내야구발전의 기폭제가 되길 원했다. ‘일석이조’ 의 효과를 노린 장 사장은 생각의 유희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겨 마침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를 창설했다.


195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내한경기를 주선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사진 오른쪽)이 강타자 스탠 뮤지얼(가운데)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 장기영 사장은 한국야구를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향후 한국 명예의 전당이 탄생한다면 반드시 헌액돼야할 이다.



제1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경기는 1956년 8월 7일부터 9월 2일까지 서울, 대전, 부산, 마산, 인천 등지에서 모두 12차전으로 거행됐다. 동포 선수들은 일본전역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선수들로 각 고등학교에서도 정규 멤버로 활약하는 이들이었다. 7월 한 달 동안 도쿄에 모여 합숙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진 까닭인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예상대로 동포팀은 고교 최강이던 동산고를 2번이나 이기는 등 종합전적 12전9승3패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당시 동포팀 이수진 감독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선수들이 주먹이 맞붙지 않은 상태에서 배트를 쥐더라"고 기본기 부재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뒤 “수비 역시 공을 앞에서 잡지 않고 발쪽에서만 잡으려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한·일 고교야구의 수준 차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적이었다.

1957년 대회에서도 동포팀은 16전13승1패2무를 기록하며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이때 동포팀이 치른 16경기 가운데 11경기에 등판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왼손 투수 배수찬(작고)이었다. 소속팀인 에바라고(高)에선 이름난 외야수였지만 동포팀에 선발되면서 투수로 변신한 배수찬은 외각으로 흐르는 절묘한 슬라이더로 국내 타자들을 죄다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 대회를 계기로 배수찬은 1959년 제 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로 발탁됐고 1960년부터는 아예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명외야수와 강타자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58년 역시 14전12승1무1패로 동포팀의 압승이었다. 당시 주전으로 뛰던 현성호는 다음해 배수찬과 함께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대표로 출전했고 박정일은 영구 귀국해 조선맥주, 한일은행 등에서 명유격수로 활약하며 한국야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뭐니 해도 이 대회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이는 일본 나니와상고 4번 타자로 일본프로야구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었다. 


1960년 도에이 시절의 앳된 장훈. 동포팀 일원으로 방한했을 때 운동장 밖에서도 숱한 화제를 뿌렸다.



원래 장훈은 히로시마의 마쓰모토상고(현 세토우치고교)를 다녔다. 그러나 폭력사건에 연루돼 퇴학 처분을 받으며 오사카의 나니와상고(현 오사카체육대학부속 나니쇼고교)로 전학했다. 1학년 후반부터 주전이 돼 2학년 때는 팀의 에이스이자 4번타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고시엔 대회 출전을 눈앞에 둔 3학년 여름, 다시 폭력사건에 연루되면서 꿈에 그리던 고시엔대회 출전이 좌절됐다.

일본의 저명한 야구전문지 <슈칸베이스보루>의 야나모토 모토하루 부국장은 “장훈이 폭력 사건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징계를 받았다”며 “당시는 국적이 죄의 유무에 개입하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악재가 호재로 작용했다. 장훈이 고시엔대회 대신 동포 학생야구단 소속으로 모국방문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장훈은 모국방문대회에서 홈런왕에 오르며 최우수선수가 됐다.

훗날 장훈은 “그때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두 다른 이들처럼(귀화를)했을지 모른다”고 속내를 털어놨는데 그의 출전으로 동포팀은 “나니와상고의 장훈이 참가한 팀”으로 소문나며 동포 선수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1959년 동포팀에서도 스타가 배출됐다. 투수와 내야수를 겸하던 교토 이와타고 3학년 김성근이었다. 출중한 제구력과 정교한 커브를 바탕으로 김성근은 국내 고교타자들을 압도했다. 김성근의 활약으로 이해에도 동포팀은 16전14승1무2패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김성근은 1960년 영구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에서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현역 은퇴 뒤는 충암고, 신일고 등의 감독을 거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에는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스,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활약했으며 2006년부터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아 팀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렇듯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은 1950년대 한국고교야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기에 모국을 찾아와 기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 한국야구가 성장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는 1960~1970년대에도 이어져 동포 야구단은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한국고교야구의 수준을 높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야구대표팀을 타이완야구협회장이 환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백인천, 김정환, 김성근, 김응용, 박현식, 김영조이 나란히 서 있다. 당시 대표팀 가운데 4명이 재일동포였다. 와세대 유학파인 김영조까지 합치면 5명이 된다. 세계 2차 대전의 여파로 귀국길에 올랐지만 김영조는 일본야구계가 가장 그리워하는 선수다. 전쟁만 없었다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가 됐을 것이란 게 중평이다.



박 대통령의 눈물과 봉황대기 탄생의 비밀

“1970년까지 한국고교야구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네. 기억하기로 팀도 전국을 통틀어 25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네. 동포팀은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대전, 광주, 인천, 대구, 강릉 등 대도시를 방문해 지역 강호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네. 처음엔 전승을 거뒀지만 조금씩 실력 차가 줄었네. 1970년 후반에 이르러선 승률이 5할대로 떨어졌네. 그래도 누구 하나 서운해 하지 않았어. 왜인 줄 아나?

우리가 지면 질수록 한국야구는 그만큼 발전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게 우리가 바랐던 것이니까. 그러려고 야구를 한 것이니까.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말없이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었다네.” 한재우의 진심이다.


과거 한재우가 아들과 찍은 사진. 한재우는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동포 야구단을 20년 동안 맡았고 결국 성공했다. 아들이 지금도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재일의 운명이란 희생과 헌신일지 모른다. 문제는 누가 그걸 알아주느냐는 것이다. 그점에서 한국은 별로 할말이 없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66년 서울운동장에 야간경기를 위한 조명탑이 생겼다. 일본식 조어인 ‘나이터’로 불린 조명탑 점등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김종락 대한야구협회장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야간경기 기념대회였던 한일은행과 제일은행 경기를 끝까지 관전하던 중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선수들이 일정에 쫓겨 새벽부터 경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동포 선수들을 청와대로 불렀을 때 선수들의 고생담을 들으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박 대통령은 그러나 이해부터 다음해인 1967년까지 동포팀을 보지 못했다. 주최 측인 한국일보가 경비 부담이 어려워 2년 동안 동포팀을 초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8년 가까스로 초청이 재개됐네. 이때부터 동포들이 부담하는 몫이 더 커졌네. 하지만 전액을 동포들이 각출했어도 군말이 없었을 거야. 모국을 가는 게 중요했지, 누가 돈을 더 많이 내느냐는 중요하지 않았거든. 그러다 1971년 한 차례 더 불참하고 마네. 경비 때문이었냐고? 아닐세. 서울운동장 8월 예약이 꽉 찼던 게야.”

1971년 9월 서울에서 제 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국제야구대회라, 유일한 국제규격이었던 서울운동장은 국가대표팀의 차지였다. 서울운동장 대관에 실패한 한국일보는 동포팀에 대회 일정을 조정하자고 제안했다.

“그건 곤란했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일본고교는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단 1시간의 수업결손도 허락하지 않았네. 그래서 동포팀이 방한한 시기도 늘 방학이었네. 방학 전 대회 시작은 곤란하다고 입장을 전달했네. 그 통에 생긴 대회가…”

봉황대기쟁탈전국고교야구대회(이하 봉황대기)다. 한국일보는 동포팀의 모국방문경기를 예상해 어렵사리 서울운동장 대관을 신청한 터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학기간이 다소 늦춰지면서 동포팀 초청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일정을 조정하자니 대표팀의 평가전과 훈련 일정이 잡혀 이마저 여의치 않고.

한국일보와 협회는 지혜를 짜내 전국에 등록된 모든 고교팀이 여름방학 중에 출전하는 초유의 대회인 봉황대기를 창설하며 난국을 돌파했다. 올해로 39회째를 맞는 봉황대기는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대회인 것이다.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390&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90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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