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19


1957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찍은 니시데쓰 라이온즈 선수단의 단체사진. 가운데 줄 왼쪽에서 3번째가 한재우다. 당시 니시데쓰는 일본시리즈 3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최강팀이었다(사진=스포츠춘추)


([5편]은 한재우 씨의 육성고백으로 이뤄집니다)
어서 들어오게. 밥은 먹었나. 갈비 재놨으니 시장하면 먹게. 한국 사람은 다 속여도 음식은 못 속인다고. 동포들도 그래. 밖에서 일본 사람인 척해도 집에 오면 “엄마, 김치 달라”한다고(웃음). 농담 같지? 참말이라고.

(길게 숨을 내쉬며)어디 그뿐이겠나. 살면서 말이네. 음식만큼 못 속이는 게 또 있더라고. 그게 뭐냐고? 뿌리와 야구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내가 태어난 해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 열렸던 해네. 손기정 선생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거리를 뛸 때 난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났네.

가난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 죄

아버지는 손기술이 좋으셨어.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셨지. 경상남도 고성이 고향이셨네. 징용으로 끌려와 갖은 고생을 하시다 오사카에 자전거 수리점을 차리셨지. 그래도 일본에선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온 양반이네. 어머니는 천생 그때 한국 여자였어. 아버지 내조하고 자식들 기르는 것밖에 모르셨다고. 그런데 내가 3살 때 갑자기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네. (혼잣말을 하듯)그땐 너무 갑작스러워서 거짓말 인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때부터 어머니가 시부모, 자식들 4명을 먹여 살렸네. 그런데 태평양전쟁 통이라, 어디 일거리가 있나. 거기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일감을 줄 리 만무하고.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이 소주, 엿, 도부로쿠라고 ‘막걸리’를 밀주한 걸 팔아서 연명했네.

어머니도 낮에는 돼지를 키우시고 밤에 몰래 소주를 만들어 파셨어. 참,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 내가 차남이라고, 그래도 어머니를 많이 도와드렸다고. 학교 끝나고 오면 동네 여기저기 다니면서 돼지 먹일 잔반을 구해오는 게 내 일이었네. 그때는 어찌나 그게 창피하던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적도 있었다네(웃음).

어머니? 어머닌 그런 거 없었어. 늘 똑같았다고. 남루한 차림으로 수레에다 잔반통을 끌고 다니셔도 창피한 게 없으셨네. 어린 마음에 ‘우리 엄마만 왜 저럴까’하기도 했지. 어쩔 땐 길에서 어머니를 뵈면 숨기도  했어. (눈시울이 붉어지며)그땐 몰랐네. 자식을 키우는 부모에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걸 말일세. 부모에겐 ‘자식을 굶기는 게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말이야.

어쨌거나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네. 장남이니까 내가 집안을 세워야 했지. 그때 나를 살려준 은인이 누군지 아나? (고개를 끄덕이며)그래, 야구네. 야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느냐고?

소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집 가까이에 ‘사토루시립상고’라고 있었네. 그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지. 야구부 훈련을 보는 것도 좋았네만 주변 공장 야구팀이나 마을 청년팀 경기를 보는 게 무척 재밌었네. 친구랑 한 번 구경하기 시작하면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배도 허기를 잊었다네. 그때부터 야구에 ‘푹’ 빠졌지.

당시야 지금 같은 배트나 공이 어디 있나. 돌멩이를 옷감이나 끈으로 돌돌 말아서 그걸 공으로 썼지. 배트도 그래. 나뭇가지 ‘뚝’ 잘라서 칼로 다듬어서 썼다고. 글러브? 군용 텐트 있잖은가. 그걸 오려서 만들었어. 그땐 좋다고 그것들을 들고 논이나 밭에 가서 야구를 했지 뭔가.

소학교 6학년 때 정식 야구선수가 된 뒤 처음으로 진짜 공과 배트를 만졌네. 기분? 말도 못하지. 살아있단 느낌을 받았으니까. 


오사카 기시와다고 시절의 한재우. 그는 고교시절 좌투우타의 촉망받는 야구선수였다(사진=스포츠춘추)


공부와 학교, 두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운명을 던지다

소학교 때 투수로 가능성을 보였네. 중학교를 야구선수로 진학했지. 그때 속으로 뭐라고 다짐한 줄 아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프로야구 선수가 되자’였어. 야구가 좋아서 그런 다짐을 했냐고? 그랬지. 하지만 그보단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싶었네.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네. 동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네. (짧게 숨을 토한 뒤)그러려면 프로야구선수가 최상의 지름길이었네.

중학교를 졸업하고 원래는 오사카 나니와상고로 진학할 예정이었네. 당시 야구명문고였거든. 이름이 낯익다고? 그럴 게야. 훗날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다녔으니까. 하지만 입학을 포기했어. 허허, 왜긴…. 돈이 없었지(웃음). 그 학교는 돈이 좀 들었다고. 사실 야구와 공부를 병행하고 싶은 마음이 컸네. 프로야구 선수가 못 될 바에는 공부로 출세해야 했거든.

그래 오사카 기시와다고에 진학했네. 그 학교는 프로야구선수를 한명도 배출한 적이 없는 약체였어. 공부로 유명했지. 공부와 야구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난 피나는 노력을 했네. 


니시데쓰의 에이스로 예상됐던 한재우는 구타와 부상으로 프로 6년간 3승 7패 평균자책 3.35를 남긴 채 쓸쓸하게 마운드를 떠나야 했다(사진=스포츠춘추)


뭘 더 잘했느냐고? 야구를 잘했어. 동기들 실력도 괜찮아서 야구부가 생긴 이래 우리 때 성적이 가장 좋았네. 1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 오사카 예선에선 결승까지 나가고 2, 3학년 때도 준결승전까지 올랐네.

(허탈한 표정으로) 맞네, 고시엔 대회 본선까진 못 갔어. 왜냐? 그때가 나니와상고 전성시대였거든. 번번이 녀석들에게 발목을 잡혔네(웃음).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어. 야구는 말이네. 은행 통장 같은 걸세. 날마다 노력을 불입하면 실력이라는 목돈이 돌아오게 마련이야. 운은 이자라고. 결국 나도 목돈을 손에 쥐었지.

고 3 여름 무렵 4개 프로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가 온 게지. 난 그 가운데 가장 고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를 택했네.

행복에 공짜는 없다

고액이면 얼마나 됐느냐고? 계약금 80만 엔에 연봉 48만 엔이었어. 그때 웬만한 선수들이 60만 엔 정도 받고 입단했네. 직장인들 월급이 보통 1만 엔 할 때였으니까 대단한 액수였지. 계약금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네. 기뻐하실 생각을 하니까 코끝이 찡하더군.

그런데 이게 웬걸. “필요 없다”고 하시는 거야. “네가 힘들게 번 돈이니 널 위해 쓰라”고 하시지 뭔가. 아무리 드려도 거절하시기에 집 주변에 땅을 샀네. 어머니는 계속 잔반통을 나르며 돼지를 키우셨고. 나중에 은퇴할 때 되니까 땅값이 크게 오르더군(웃음).

일전에 한국 갔더니 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웃음). 프로 입단 때 내가 ‘딱’ 그랬다고. 하지만 자네 그거 아나. 행복엔 공짜가 없다는 걸 말이야. 너무 행복해서 공짜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이름을 바꿔야 했네. 원래 내 일본명은 니시하라 재우였어. 그런데 프로에서 그 이름을 쓰면 단번에 한국 사람인걸 알게 되거든. 그때 구단에서 이름을 바꿨으면 하더라고. 싫다 했지. 하지만 구단도 강경했어. 날 보호하기 위해서였지. 어머니께 여쭸더니 “이름은 몰라도 귀화는 안 된다”고 하셨네. 그래 약속드렸네. ‘절대 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교지(恭治)의 뜻? (크게 웃으며)그냥 내 마음대로 적은 것이네. 어차피 내 혼은 ‘한재우’란 이름에 다 들어있지 않나.

지금도 1956년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입단했을 때가 어제 일 같네. 나를 포함해 신인선수가 6명이었거든. 그 가운데 이나오 가즈히사(작고)도 있었네. 자네도 이나오를 잘 알리라 믿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오른손 투수 아닌가.(주: 개인통산 276승137패 2574탈삼진 평균자책 1.98)

그때만 해도 나와 이나오의 실력이 비슷했네. 신문에도 호각을 다툰다고 나왔지. (젊은 시절 이나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참, 이 친구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밖에선 점잖고 예의바른 친구지만 마운드 위에선 그런 강심장이 없었지.

(조용한 목소리로) 재작년 이나오의 부음을 전달받았네. 너무 늦게 전달받는 바람에 장례식장에 못 갔어. 조의금만 보냈지. (이나오와 함께 찍은 액자를 보이며) 이게 이나오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찍은 사진이네. '휴우-'. 참, 괜찮은 친구였는데…. 


과거 일본프로야구팀의 원정경기 교통수단은 버스와 지하철이었다. 한재우와 니시데쓰 투수들이 지하철을 이용해 원정지로 떠나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이 한재우고 가운데 누워 있는 이가 이나오 가즈히사다.(사진=스포츠춘추) 


 뭐라고? 그렇지. 이나오와 내가 온 뒤 팀 성적이 월등히 좋아졌네. 니시테쓰가 1956년부터 58년까지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내 역할은 크지 않았네. 그 후로도 그랬지. 데뷔 때 기대치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뭐냐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구타와 부상 때문이었네.

구타와 부상으로 날아간 꿈

내가 젊었을 때 일본 내 한국인 차별이 심했네. 자넨 상상도 못할 거야. 프로에 들어와 땀 흘려 훈련이라도 하면 몇몇 일본선수들이“마늘 냄새 난다”면서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고. 일부 선배들은 “어이, 도라지”하고 불렀지. ‘도라지’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호칭이었거든.

그 가운데 유독 날 괴롭히는 선배가 있었네. 하루는 그이가 후배들을 불러 기합을 줬어. 하필 그때 내 옆구리를 발로 차지 뭔가. “아이쿠”하고 쓰러졌지. 1957년 프로 2년 차 때였네. 데뷔 때는 몸을 만드느라 2경기 밖에 못나갔지만 2년 차 때는 중간계투로 22경기에 나가 2승 1패 평균자책 2.45인가를 기록하고 있었거든. 이제 ‘막’ 잘 나가려는 찰나 갈비뼈가 부러지고 만 거야. 하늘이 노랗더군. 


선배에게 폭행당해 갈비뼈가 부러진 한재우는 한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병문안 온 팬들과 기념촬영에 응한 한재우(사진=스포츠춘추)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네. 의사나 팀에서도 절대 안정을 권하더군. 하지만 어디 기회가 자주 오나. 몸을 만들려 부단히 노력했네. 주변에서 “오버 페이스”라고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어.

빨리 성공해야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고 동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게 아니냔 말이지. 운이 좋았나 그해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 5차전에서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팀 우승에 보탬이 됐네.

(환한 표정으로)당시 니시테쓰의 연고지가 규슈 후쿠오카였네. 그때만 해도 규슈 출신하면 전형적인 시골사람에다 하층민 취급을 받았거든.

우리가 우승한 다음 미국 지프차를 빌려 타고 후쿠오카 시내를 카퍼레이드 했는데 와,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박수를 치든지. 참, 그런 시절도 있었다니까(웃음).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내가 인생에서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했잖은가. 결국 어깨에 부상이 찾아왔네. 어느 날부턴가 어깨가 이상하더군. 당시는 재활이란 개념이 없었네. 그냥 매일 밤 뜸을 뜨거나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숨을 내쉬며) 생각해보면 재활이 아니라 자살행위였지. 그때 고무줄 당기는 거 있잖나. 그래, 튜빙. 그것만 있었어도 재활을 했을 텐데….

이듬해도 공을 던지고 나면 아프더군. 그래도 전반기는 낫고 아프기를 반복했는데 후반기로 갈수록 계속 아팠어. 성적이 당연히 좋지 않았지. 그해 시즌이 끝나고 구단이랑 연봉협상도 잘 했는데 하루는 구단관계자가 “숙소 밖으로 나가보라”는 거야. 왜 그러느냐 했더니 히로시마 카프 감독이 기다린다고 하더군. (고개를 끄덕이며) 직감을 했지. 트레이드 된 거였어. 그래 두말 않고 히로시마로 짐을 쌌네.

모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한 재일동포, 그러나 환대 대신 차가운 한마디 “반쪽발이”

히로시마에서 1959, 1960년 두 해를 뛰었네. 1959년은 괜찮았어. 이를 악다물고 던졌거든. 프로 데뷔 이후 가장 많은 경기(25경기)와 이닝(55⅓)를 소화했네. 성적도 1승3패 평균자책 3.86이면 나쁘지 않았지. 하지만 그게 다였네. 그해 또 무리를 해선지 어깨가 회복불능 상태가 돼버렸어.

1960년 9경기만 출전하고 거의 그라운드 밖에서 지냈네. 1961년까지 재활에 매달렸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 결국 1961년 11월에 히로시마 카프를 퇴단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네. 어머니 뵐 면목이 없더군.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 오사카에다 미즈노 스포츠대리점을 차렸네.  


1957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니시데쓰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를 끌고 구장을 돌고 있다. 사진 오른쪽 이가 한재우다. 그는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가운데 일본시리즈에서 최초로 우승컵을 손에 쥔 선수다(사진=스포츠춘추)


장사가 잘 됐냐고? 허허, 야구는 운이 없었네만 사업운은 좋았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린 데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요미우리가 9년 연속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며 프로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스포츠를 하기 시작했지.

그 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이야기는 자네가 앞서 썼을 테니 생략하도록 함세. ‘딱’ 하나만 이야기하지. 과거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어떤 식으로 무시한 줄 아나? 지금 한국인들이 중국인들 무시하는 식으로 했다고. 상상이 좀 가지? 사람 차별하면 안 된다고.

그 나라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이가 누가 있겠느냔 말이지. 그것보다 더 하면 안 되는 건 말이네. 같은 민족끼리 차별하는 거라고. 같은 민족끼리….

한국이 못 먹고 못 살 때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도와줬는지 모를 거야. 한국이 세계 강대국이 됐는데도 동포들 보면 지금도 못 도와줘 안달이라고. 예를 들자고.

1964년 도쿄올림픽 때 동포 가운데 정보현 씨라고 있었네. 그분이 동포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1억5천만 엔을 모금했네. 왜인 줄 아나? 도쿄올림픽에 출전할 한국 선수단의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서였어. 그때 한국에 그 돈이 어딨냐고. 장사꾼들부터 나 같은 자영업자, 우리 어머니처럼 돼지를 키우는 이들까지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전달했다고. 어디 그뿐인 줄 아나.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500억 원을 모아서 전달했네. 말이 500억 원이지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나. 동포들 지갑이며 통장에서 나왔다고. IMF 때도 동포들은 모국을 외면하지 않았네. 당시 거의 20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모아서 보내줬다고. 난 지금도 일본에서 사업하던 이가 한국으로 공장을 옮기던 게 기억나네. 모국의 근대화를 위해 과감히 한국행을 선택한 이들이었어.

오사카에 있는 한국영사관이 원래 누구 것인 줄 아나. 도쿄에 있는 주일 한국대사관 부지는 또 누구 땅인 줄 아느냐고. 두 곳 다 지금 금싸라기 땅으로 일본에서 유명하지. (입술을 떨며)다 동포들이 기증한 거라네. ‘조센진’ ‘도라지’소리 들으며 악착같이 살아온 동포들이 한 번도 가보지도 못한 모국에게 무상으로 바친 것이란 말일세. 그렇게 했는데도 재일동포들을 보고 ‘반쪽발이’라고 하면 우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의 근본은 어디냔 말이지.

미국 사는 동포들은 금의환향하고, 시민권 나오면 다들 부러워하면서 왜 재일동포들한테는 그러느냔 말이지.

어쩌면 누굴 원망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지 몰라. 재일동포들이 못 나서 그런 거야. 일본에 보면 동포들이 만든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있다고. 총련은 제쳐 두고 민단은 한국은 도와주면 도와줬지 동포들한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왜냐고?

그래야 한국정부로부터 훈장도 타고, 한국 가면 대접받았으니까. 내 아내를 보라고. 재일동포지만 한국말 잘 할 줄 모른다고. 그래도 보라고. (거실에서 위성안테나로 한국드라마를 보고 있는 아내를 가리키며) 매일같이 한국드라마 보고 앉아 있다고. 무슨 소린지 몰라도 계속 보고, 탤런트가 울면 같이 운단 말이지. 그게 뿌리네. 내가 싫어도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누굴 원망하면 뭐 하겠나…. 그렇게 태어난 걸….


한재우의 아내는 한국말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유일한 취미는 한국방송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 아니다. 가슴으로 보기에 가능한 일이다(사진=스포츠춘추)


슬픈 전설, 그러나 재조명되야 할 위대한 역사

지금까지 상받은 게 있느냐고? 어디 한국에서? 공로패는 몇 개 받았네만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주로 받았지 다른 건 없었네. 아, 재작년 허구연 씨라고 있지 않나. 해설하는 양반. 그 양반이 ‘야구발전 공로상’인가를 주더군. 고마웠네.

원래 그 상은 아내가 받아야 하는 건데 말이야. (흐뭇한 표정으로)말도 마라고. 예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를 찾아다니려 일본 전역을 돌 때 아내가 묵묵히 애들 키우면서 혼자 가게를 운영했다고. 동포 선수들 합숙 훈련할 때 죄다 우리집에서 재울 때도 선수들 식사와 빨래를 두말 않고 해줬다고.

자식들? 이제 다 컸지. 2남 1녀라고. 걔들도 이제 다 중년이야(웃음). 큰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네. 작은 아들은 날 닮아 사회인 야구까지 했네만 은퇴하고 지금은 000(일본의 유명 다국적 기업)의 인도네시아 지부장으로 가 있네. 막내는 결혼하고 잘 살고 있지. 다들 성공한 게야.

자식들한테 미안한 게 있다면 귀화 문제네. 큰애가 6년 전, 작은애는 3년 전에 귀화를 했네. 그 녀석들도 참다 참다 손자들 때문에 귀화를 하게 됐지. 아들들이 그러더군. “아버지, 진작 귀화를 허락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 해주지. 설움이란 설움 다 받고 어른이 된 다음에 허락을 했느냐”고 말이야. 애들한테는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네.

자네도 짐작했군. 그래 어머니가 걸린 게야. 살아 계시냐고? 25년 전 돌아가셨네. 돌아가시기 전 아내한테 “에미야, 고향에 한 번 갔다 오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눈물을 글썽이며) 난 몰랐네. 결국 아버지처럼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네.

사실 형이 일본여성과 결혼하면서 귀화를 했었거든. 27살에 과부가 된 뒤 형만 바라보고 사신 양반인데 그때 얼마나 충격이 컸었겠네. “너는 절대 귀화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하셨고 난 그걸 지키려 무던히 노력했네. 


73살의 꿈꾸는 현역, 한재우. 그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다시 한번 모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갖기 바란다. 그것이 모국과 동포 사이의 벽을 허무는 매우 유용한 만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울리자) 시간이 많이 흘렀네 그려. 내일 출국이니 ‘푹’ 자야지. 노인네 말 듣느라 고생했네. 이불 깔아뒀으니 자고 가게.

(식탁 위의 사진첩을 정리하다 고갤 들며)이보게. 이제 내 나이가 일흔 셋일세. 내일 눈을 감아도 아쉬울 게 없는 나이네.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자네가 기자니까 가장 먼저 기사를 써주게. (무슨 말씀하시냐는 말에)아니네. 자네가 꼭 먼저 쓰게. 누가 내 부음란에 ‘니시하라 교지’라고 쓰기 전에 자네가 ‘한재우, 눈을 감았다’고 쓰란 말이지. 그러면 다른 기자들도 그리 따라 쓰지 않겠느냐고.

고마우이. 찾아와 줘서. (갑자기 말문을 닫은 채 먼 곳을 보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그런데…그런데… 왜…진작 오지 않았나. 내 앞 세대 재일동포 야구인들이 얼마나 한국에서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고. 만나면 해줄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다고. 이제 다 떠나고…없어…나만…나만 남았네…. 올 거면…조금 일찍 오지 그랬나. 조금만 더 일찍…. (끝)


초등학교 시절의 한재우.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유일하게 맨발인 이가 바로 한재우다. 가난한 재일동포 야구소년 한재우는 맨발로 그라운드를 뛰어다녔고 맨발로 슬라이딩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394&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93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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