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09



1955년부터 1997년까지 해마다 여름이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가졌다. 재일동포 야구인들에겐 조국을 발견하는 기회였고 한국야구로선 선진야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969년 일본 오사카 재일대한야구협회 사무실 앞. 5월인데도 대기는 세계의 냉장고를 모두 개방한 듯 차가웠다. 바람도 예사롭지 않아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날씨도 이런데 그만 둡시다.”
가뜩이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한재우였다.

“어허, 한 선생. 그쪽에 이미 간다고 알렸는데 여기서 없던 일로 하면 큰일 나요. 큰일. 그러지 마시고 눈 ‘딱’ 감고 다녀옵시다. 한 선생이 아니면 이 일을 성사시킬 사람이 없어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돌아서려는 한재우의 팔을 잡았다. 어찌나 팔 힘이 센지 한재우가 ‘앗’ 하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손 쳐도 그렇지. 어찌 명예가 목숨인 야구인이 야쿠자를 찾는단 말입니까. 사정이 급해도 이건 아닌 듯합니다.” 한재우가 관계자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등을 돌린 순간. 뒤에서 나지막한 절규가 들렸다.

“한 선생.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국방문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모국분들은 또 어떻고요.”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한재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리 없는 일이었다.

은퇴한 야구선수, 다시 그라운드에 서다

1936년 일본 오사카 태생의 한재우는 재일동포 2세다. 일본명은 니시하라 교지. 본적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참혹하리만큼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한국인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갖은 핍박과 차별을 견딘 끝에 야구선수가 됐다.

오사카부립 기시와다 고교 재학 시는 왼손 투수로 간사이(관서)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1956년 고교 졸업과 발맞춰 여러 팀의 구애를 뿌리치고 명장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있던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시와다 고교 졸업생 가운데 최초의 프로야구 입단자답게 당시 그의 몸값은 100만 엔에 가까웠다. 초고교급 대우였다.

입단 시는 훗날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으로 유명해질 동기생 이나오 가즈히사보다 더 큰 기대를 모았다. 1957년 일본시리즈에선 중간계투로 출전해 팀 우승에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선배에게 구타를 당한 뒤 갈비뼈를 다치고 왼쪽 어깨부상이 겹치며 기대만큼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개인 통산 3승 7패 평균자책 3.35가 6년 동안 프로에서 뛰며 그가 남긴 기록이었다. 


1956년 니시데쓰 라이온즈 입단 당시의 한재우(사진 뒷줄 맨 왼쪽). 그를 어깨동무하고 가운데서 환히 웃는 이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투수 5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이나오 가즈히사다. 입단 동기생인 둘의 우정은 평생 이어진다(사진=스포츠춘추) 



1961년 은퇴 뒤는 오사카에서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며 청년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가 손에서 놓은 줄만 알았던 야구는 정작 그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도 마찬가지였다.

“1962년 여름, 가게로 이즈미사노시(市) 한국 거류민단(민단) 관계자 몇 명이 찾아왔네. 무슨 일로 왔나 했지. 뜬금없이 10월 한국 대구에서 전국체전(전국체육대회)이 개막한다고 하는 게야. 재일동포들도 참가를 하기로 했다는데 야구는 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일본지역 예선전을 치른다지 뭔가. 나보고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야구선발팀에서 뛰어달라고 하더라고.”

한재우는 정중히 거절했다. 왼쪽 어깨를 다쳐 공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한창 바쁠 때 가게를 비우고 한국에 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민단 관계자들은 “투수 이외의 포지션에서 뛰어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요지부동이던 한재우의 마음을 되돌린 건 “이번 기회에 모국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어머니의 설득이었다.

결국 한재우는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에 합류했고 전국체육대회 일본지역 예선전에 참가한다. “아마 나고야 동포 청년회팀이랑 결승전을 벌였을 거야. 거기서 우리가 사요나라(끝내기) 안타로 이겼네.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이 재일동포 대표로 전국체전이 열리는 대구땅을 밟게 된 게지."

한재우의 기억에 의하면 재일동포 대표팀의 유니폼과 용품은 이즈미사노시(市)에 위치한 사카도모 방직 주식회사의 서갑호 씨가 사재를 털어 지원했다.

첫 모국방문으로 설렐 법도 했지만 재일동포팀은 각계의 지원과 정성을 생각해 경기에만 집중했고 결국 우승컵을 안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전국체전 폐막식 때 들었던 노래가 귀에 선해. 무슨 노래냐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래 시작하는 노래가 있잖은가. 그때는 내가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고. 그냥 멜로디만 들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귀에서 노래가 안 떠났네. 어느 노인네가 나를 ‘꽉’ 안아주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나지 뭔가. 그때 처음으로 ‘아, 이게 민족애인가 보다’ 생각했지.”

이때를 경계로 한재우는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전국체전을 마친 뒤 찾은 아버지의 고향 경남 고성에선 모호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그전까지 말만 한국인이었지 가슴 깊은 데선 그런 느낌이 없었다고. 대구 전국체전을 다녀와서 ‘확’변했지. 다음해 전주 전국체전 때는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선수 겸 감독으로 출전했네."

1962, 1963년 전국체전에 출전한 재일동포팀은 대회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수준 높은 야구를 국내에 전수했다.

“1963년 동포 야구팀 멤버 가운데 서정리(작고)라고 있었네. 내가 데려간 친구지. 이 친구가 전국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그해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 국가대표로 뽑혔어.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 챔피언에 오른 게 바로 그 대회였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4명이 재일동포였다는 거야. 신용균, 배수찬, 박정일, 서정리가 다 재일동포였다고.”

한재우는 지금도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모국의 야구발전에 기여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고 그걸 일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절친한 후배 김성근 감독의 SK가 한국시리즈에서 2년 연속 우승했을 때도 ‘후배가 우승했다’는 것보다 ‘후배가 한국야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그였다.

1963년을 끝으로 한재우는 야구와 다시 담을 쌓는다. 결혼과 아내의 출산으로 두 아들이 생기며 경제활동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는 한 번 결박한 그를 좀체 놓으려 하지 않았다.


현역 은퇴 뒤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던 한재우와 그의 아내.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오사카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스포츠용품점으로 성장시켰다. 재일동포 야구단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오사카의 거부(巨富)가 됐을 것이란 게 동포 사회의 평이다(사진=스포츠춘추)



1967년 봄. 평소 안면이 있던 재일한국야구협회 최태환(작고)이사가 한재우를 찾았다. 최 이사는 한재우를 보자마자 대뜸 “감독을 맡아 달라”고 읍소했다.

“1955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재일동포 고교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벌였다 하더라고. 그런데 나더러 그 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거야. 스포츠용품점도 운영해야 하고 가정도 있는데 1달간 집을 비우는 건 곤란하다고 했지.”

하지만 이번에도 한재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한국을 거의 모르는 재일동포 2, 3세들에게 방한 친선경기는 모국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주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맡은 한재우는 그러나 감독직을 맡자마자 갖가지 난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경비조달이었다. 한 번 모국방문을 할 때마다 수백만 엔씩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재우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와 백방으로 후원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고 마침내 유력한 후원자를 소개받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후원자가 유명한 야쿠자라는 데 있었다.

남(男)대(對)남(男)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한재우는 오사카의 대저택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정문부터 몇 단계의 엄격한 검문을 거친 뒤에야 안방까지 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안방문을 열자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상대의 손을 맞잡은 한재우는 그의 악력에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재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 선생.”
순간 한재우가 상대를 쳐다봤다. ‘날 안다고?’

“한 선생이 니시데쓰 라이온즈의 일본시리즈 3년 연속 당시 주요 우승멤버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사카 동포 사회에서 한 선생을 모르는 동포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상대는 분명 ‘동포’라고 했다. 오사카에서 아니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야쿠자가 ‘동포’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지난해 재일대한야구협회장에 용퇴한 한재우는 지금도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은 할 게 없었다고. 많이 배우길 했나, 돈이 많나. 거기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엄청나게 차별이 심했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취직이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연예인, 운동선수는 잘 풀린 경우고 많은 이들이 야쿠자에 가입했던 게 사실이네. 그이도 재일동포 야쿠자였지.” 한재우의 회고다.

당시 한재우가 만난 야쿠자는 오사카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야마구치구미(組)의 핵심인사였다. 지금도 일본 암흑가에선 복부에 총을 맞고도 야쿠자간의 전쟁을 지휘했던 그의 전설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동포 사회에선 의적과 같은 인물로 통했다. 특히나 야구를 좋아해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재일동포 모국방문 학생야구단이 예산이 없어 고생하신다고요.” 그가 차를 권하며 운을 뗐다.
“예산이 없어도 우린” 한재우가 대답하려할 때 협회 관계자가 말을 낚아챘다.
“그렇습니다. 아이들 비행기 값도 모자라 자칫 모국행이 좌절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럼 한 번 방문 때마다 얼마나 경비가 듭니까”하고 물었다.
“350만 엔 정도가 듭니다.”
“350만 엔이라, 350만 엔이라. 음.” 짧게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한재우는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야쿠자라도 350만 엔이면 큰돈이었다.

“보통 모국방문을 할 때 20명 정도가 가서 한달 정도 있다 온다고. 왕복 항공비, 숙박비 그 밖의 경비를 모두 합치면 그 정도는 들게 마련이었네. 한국에서 지원을 한데도 대개는 동포들이 경비를 조달했네.” 한재우는 당시를 회상하며 동포 야쿠자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이었을까.

“아이들이 모국을 찾겠다는데 돈이 길을 막아서야 되겠소. 내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한재우는 지금도 그와의 만남이 어제 일 같다. “동포 사회엔 못된 일 안했어도 일본인들은 그이를 무서워했다고. 야쿠자니까. 그런데 앞에선 총싸움을 하고 별짓을 다해도 뒤에선 그 냉혹한 양반이‘모국’말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다고. 그이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재일동포 야구단의 모국행은 진작 중단됐을 거야.”

한재우의 회고대로 그의 지원은 1회에 그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계속 됐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던 배경에는 이토록 피와 맞바꾼 돈을 쾌척한 동포 야쿠자들의 숨은 노력이 스며있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시절 한재우는 선수 구성을 위해 일본 내 3천개에 달하는 고교야구부를 하나하나 조사해 동포 선수가 뛰는지 체크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오사카의 호랑이' 김박성이었다. 사진은 한재우가 깨알같이 작성한 동포 선수카드다(사진=스포츠춘추)



“이제 한숨 돌리나 했지” 당시를 회상하는 한재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돌아보니까 출전할 선수들이 없지 뭔가. 민단계나 총련계 학교에서 차출하면 안 됐냐고? 허허. 당시 야구부는 주로 일본 학교에만 있었다네. 게다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실력 없다는 소문이라도 나보게. 모국분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네.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야구부가 있다는 일본 내 3천개가 넘는 고등학교를 모두 찾았다고.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 암, 무모했어. 그래도 김박성 같은 선수를 모국으로 데려간 건 뿌듯한 일이였네. 자네도 김박성이라고 알지? ‘오사카의 호랑이’ 한신의 김박성 말이야.”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387&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88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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