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0.31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은 '아마야구의 김성근'으로 불린다. '인간관계는 지성인의 무덤'이라는 의식 아래 야구에만 전념하려는 태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두산 이혜천의 낮은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는 반면 SK 케니 레이번의 공은 4회부터 높게 형성되고 있다. 윤길현, 정우람 등 SK 중간계투진이 좋은 만큼 SK에서 레이번 교체카드를 빨리 집어들 수 있다.”
언뜻 야구중계 해설자의 말 같지만 실은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의 설명이었다. 10월 29일 잠실 SK와 두산의 한국시리즈 3차전을 현장에서 관전하던 이 감독은 SK의 작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5회 1사 레이번이 두산 채상병에게 우전안타를 맞자 김성근 SK 감독은 바로 정우람 카드를 빼들었다.
“아마도 1점 차 승부가 될 것 같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경기흐름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이 홈런일 수도 있고….” 이 감독의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SK 최정이 두산의 바뀐 투수 이재우의 초구를 노려 120m 좌월 2점 홈런을 기록했다. 활시위를 끌어당긴 것처럼 팽팽하게 유지되던 1-1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SK의 작전을 잘 맞출까 싶지만 이 감독이 김 감독의 수제자라는 걸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이 감독은 아마야구의 ‘김성근’으로 불린다. 그만큼 선수조련과 작전구사에 있어 대학야구 감독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그와 같은 의미로 성대 역시 아마야구의 ‘SK’로 통한다.
2001년 이후 최단기간 전(全)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올시즌에는 전국체육대회에서 2군 리그의 독보적인 1위팀 상무를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기염을 토했다. 야구계에서 성대를 ‘대학 이상의 팀’으로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스포츠춘추>가 이연수 성대 감독으로부터 SK의 우승 비결과 인간 김성근에 관해 들었다. 이 감독이야말로 SK 야구와 김성근 감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야구인이기 때문이다.
SK의 조직력 야구
이 감독이 꼽는 SK의 가장 큰 우승비결은 조직력이다. “SK는 1, 2군 선수의 기량 차가 크지 않다. 언제든 2군 선수가 1군 주전 자리를 꿰차도 실력에선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한 두 선수가 팀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전 선수들이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런 노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몇몇 스타플레이어들이 부진해도 팀 전력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느 팀이나 개인플레이보다 조직력이 우선인 팀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렇기 하기엔 난제가 많다. 이 감독은 팀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선수들이 목적의식을 갖도록 지도자가 길을 안내하고 그 길을 통해 선수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꼽았다.
이 감독은 과거 현역시절 김 감독이 어떻게 조직력을 강화했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1988년 태평양에서 김 감독을 처음 뵙다. 당시 춘천으로 마무리 캠프를 갔는데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곤 하루 종일 훈련만 했다. 여기다 하루 2시간씩 빠짐없이 정신교육을 받았다. 내용은 늘 뻔했다. ‘내가 왜 야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잠만 왔다. 그러나 어느새 세뇌가 됐는지 왜 야구를 잘 해야 하고 야구를 잘 할 때 얼마나 큰 보상이 주어지는지 실감하게 됐다. 그때 처음 깨달았지만 문제의식 없이는 목적의식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결국 ‘왜’라는 문제를 풀게 되면 ‘무엇을’이라는 도전 대상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뒤 SK 채병룡이 환호하고 있다. 리그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발투수인 채병룡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팀을 우선하는 전형적인 SK 선수다(사진=SK)
이 감독의 회고대로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해’라는 명령 대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야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렇게 야구에 눈을 뜬 선수들은 자기보단 팀을 우선했고 내 플레이보단 팀 플레이를 내세하게 됐다. ‘김성근식’ 강훈련이 성공할 수 있던 비결도 선수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해 SK를 맡았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 감독은 패배의식에 젖은 선수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들 스스로 답을 찾도록 지켜봤다.
데이터 야구의 진보
이 감독은 김 감독의 ‘데이터 야구’를 쌍방울 시절부터 줄곧 지켜봤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전력분석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 감독님은 달랐다. '포수가 어떤 볼 카운트에서 공을 잡을 때 2루 송구를 잘하고 못하는지', '초구에 1루 주자가 2루로 뛰면 얼마나 살 확률이 높은지', '주자 상황에 따라 어떻게 공배합이 바뀌는지'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수많은 데이터를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했다.” 이 감독의 회상이다.
김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1976년 충암고 감독 시절부터 시작됐다. 이를 통해 충암고 부임 이듬해인 1977년 봉황대기에서 야구부 창단 9년 만에 처음으로 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왼손 원포인트 릴리프도 김 감독이 국내프로야구에 처음으로 도입한 데이터 야구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야구계는 김 감독의 데이터 야구를 “치사한 일본식 야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 감독이 구구단을 할 줄 몰랐어도 그들은 다른 걸 찾아 비난을 퍼부었을 게 자명했다. 왜냐? 그들에게 좋은 야구감독이란 실력보단 출생지와 한국어 구사능력, 출신학교에 따라 자의적으로 규정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투구습관 역시 김 감독이 처음으로 포착해 이를 실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감독과 성대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석수철 타격코치도 과거 쌍방울에서 김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석 코치는 김 감독의 투구습관 포착을 이야기하며 눈을 크게 떴다.
“김 감독님은 당시 상대 투수들의 팔목 심줄을 보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맞출 정도로 야구에 몰입했다. 당시 선수들의 실력이 떨어져서 그랬지 쌍방울 타자들은 상대 투수들의 구종을 이미 안 상태에서 스윙을 했다.”
베이징올림픽 전초전으로 치른 한국과 쿠바와의 친선경기에 앞서 SK 김성근감독이 김경문감독을 찾아와 격려하고 있다. 야구감독 가운데 김성근 감독처럼 야구서적을 많이 읽으며 연구하는 감독도 드물다. 또한 김경문 감독처럼 자신이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령탑도 흔치 않다. 두 감독은 한국야구계의 롤모델이다(사진=두산)
이 감독은 정작 주목해야할 건 “김 감독의 데이터 야구가 아니라 데이터 야구의 진보”라고 말했다. 이 감독에 따르면 김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지바롯데 마린스 코치시절 한차례 변화를 겪은 뒤 진보했다.
“이전만 해도 김 감독님은 철저히 데이터 야구에 의존했다. 그러나 지바롯데에 2년간 머무신 뒤 자신의 야구철학을 새롭게 정립하셨다. 데이터는 데이터대로 보되 현장 분위기와 선수들의 컨디션 등을 감안해 직관의 야구를 가미하셨다.”
실제로 한국시리즈 내내 김 감독은 데이터 야구를 중시하되 중요 순간마다 자신의 감(感)을 믿었다. 특히나 투수교체 시기에선 데이터와는 별도로 선수들의 컨디션과 구장 분위기를 감안했고 심지어는 다음 시즌까지 고려했다. 이승호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3년 이후 5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는 이승호는 유효한 데이터가 많지 않은 선수였다. 그러나 김 감독은 위기마다 과감히 이승호를 기용했고 올시즌보다 더 강해질 SK의 내년을 다른 팀들에게 과시했다.
냉혹한 승부사 김성근. 그러나
광주일고-성균관대 출신의 이 감독은 1985년 11월 빙그레 이글스(한화의 전신)에 2차 지명됐던 유망주였다. 그러나 빙그레의 갑작스런 계약포기로 가까스로 1987년 청보 핀토스에 입단하며 야구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4일 사직 롯데전에 대타로 출전해 1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건 좋지 않은 증후였다.
그해를 시작으로 줄곧 2군에서 시간을 보낸 이 감독은 결국 1989시즌이 끝나고 태평양에서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며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때 그의 유니폼을 벗긴 이가 김성근 당시 태평양 감독이었다.
“김 감독님께서 그날 이후로도 2번이나 더 날 잘랐다. 주변에서 날 보고 ‘김성근 감독의 애제자’라고 하지만 이런 애제자 봤느냐” 이 감독의 유쾌한 항변이다.
쌍방울 현역시절 이연수.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3번이나 해고됐지만 정작 중요할 때 김 감독은 제자를 외면하지 않았다(사진=스포츠춘추)
실제로 이 감독은 1990년 쌍방울로 이적해 선수생활을 이어가지만 1995시즌이 끝난 뒤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에 의해 또 다시 방출의 아픔을 겪었다.
“1995시즌 마무리 훈련을 하는데 김 감독님께서 ‘넌 이제 안 되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야구계를 떠나나’ 생각하니까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이연수의 성실함을 높이 산 쌍방울은 그를 야구계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했다. 구단 매니저로 채용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김성근 감독이 그를 3번 잘랐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현역 은퇴라면 2번으로 끝나지 않는가.
“1999년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러니까 선수 겸 매니저로 뛴 것이다.” 이 감독의 말이다.
선수 겸 감독이나 플레잉 코치는 들어봤어도 선수 겸 매니저는 생소하다. 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매니저는 구단 프런트 가운데서도 가장 바쁜 이다. 어째서 그런 매니저를 김 감독은 선수로 복귀시킨 것일까.
“1999시즌이 쌍방울 최악의 해였다. 주요선수를 죄다 팔아먹고 선수부족으로 고생했던 시기다. 원체 선수가 부족하다보니 김 감독님이 날 현역선수로 뛰게 했다. 하지만 이건 눈에 보이는 이유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승부사 김성근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장면이기도 한데.
“당시 매니저 월급이 60만 원이었다. 박봉도 그런 박봉이 없었다. 김 감독님이 내 월급을 듣고 깜짝 놀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날 선수로 쓰신 게 선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 월급을 더 챙겨줄려고 하신 일이었다. 아무래도 선수연봉이 매니저보단 많으니까.”
실제로 이해 이연수는 단 2경기에 나와 2타수 무안타만을 기록했다. 사실 이연수가 현역 은퇴 뒤 구단 매니저가 된 것도 구단의 선택이 아니라 김 감독의 요청 때문이었다. “쌍방울에서 옷을 벗을 즈음, 결혼 날짜가 잡힌 상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 감독님이 그걸 어디서 들으시고 내가 불쌍했는지 프런트를 시켜주셨다.”
이연수 성대 감독은 강훈련을 중시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시하는 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선수 스스로 야구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 감독은 그의 스승 김성근 감독과 무척 닮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기자)
김 감독은 흔히 '승리밖에 모르는 야구기계',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적 야구인'으로 불린다. '냉혹한 승부사'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그러나 김 감독 만큼이나 아마추어 야구 감독을 많이 배출한 야구인이 없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아마추어 야구선수도 많지 않다. 김 감독이 야인시절 아마추어 야구계를 순회하며 어린 선수들을 지도한 건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SK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국야구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시작일지 모른다. 이 감독과 같은 아마추어 야구계의 또 다른 '김성근'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292&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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