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15


1994년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1990년대 동포팀 가운데 가장 전력이 좋았던 팀이다. 한재우 단장(사진 뒷줄 맨 왼쪽)과 아라이 다카히로(한국명 박귀홍, 뒷줄 맨 오른쪽)가 보인다(사진=스포츠춘추)


1971년을 기점으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환영대회는 맥이 끊겼다. 경비와 일정문제가 겹치며 지역의 강호들과 혈전을 벌이던 동포팀의 전국순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이듬해부터 봉황대기대회에 초청받았다. 이전의 비중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국에서 자신들을 잃지 않고 초청한다는 게 한재우로선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선수들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모국방문이었다.

“일본 전역을 돌며 선수들을 모으고 경비를 조달하려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속으로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하고 결심했네. (고개를 끄덕이며)그래, 그렇게 하지 못했지. 왜냐고? 모국방문이 고작 1달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에 아이들은 조국에 눈을 떴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꼈네. 놀라운 건.”

방한 전 20%만이 자발적인 선수단 참여고 80%가 부모나 친지의 강권이었다면 방한 뒤는 90%가 다시 한국을 찾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20년 넘게 아이들을 데리고 방한했던 게야. 데려왔는데 싫다고 하면 어쨌겠나. 내가 장사꾼도 아니고. 좋다고 하니까 계속 왔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일본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한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재우는 지금도 당시 부모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감독님. 고맙습니다. 어제 아들놈이 저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한국말로 말입니다.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 녀석이 다시 한국말로 ‘아버지 사랑해요’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뭡니까. ‘한국’ 이야기만 나오면 ‘더럽다’던 녀석이 한국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감독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오늘 막내방에 청소하러 들어갔더니 벽에 태극기가 붙어 있지 뭐에요. 커서 자위대 제독이 되겠다던 아이였는데요. 감독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찌나 안 가겠다고 버티는지 공항에서 울고불고 하던 녀석이 허허, 집에 오자마자 한국에 또 가자는 겁니다. 어디서 샀는지 지 에미한테 비녀를 주더군요. 피가 정말 물보다 진하긴 진한 모양입니다.”

신년이면 한재우의 집은 인사 차 들른 동포팀 출신 제자들로 북적였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연락을 주고받는 등 식구처럼 지냈고 경조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1986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가네모토 도모히로(한국명 김박성, 사진 가운데)와 동료 선수들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방한 전까지 시큰둥하던 선수들도 일단 한국을 경험하고 돌아가면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니 혼자가 아님에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사진=스포츠춘추)


“이제야 고백할 게 있네. 1962년 대구 전국체전(전국체육대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난 한국말이 무척 서툴렀네. 아주 간단한 말은 알아들었지만 쓰거나 읽은 줄 몰랐네. 말하기도 다르지 않았어. 부끄럽지만 한 번은 선수들 식사를 시켜야 하는데 식당의 메뉴판을 읽지 못해 한참을 서 있었다네. 그때의 무력감은…(잠시 침묵한 뒤) 그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했네. 초등학생용 국어교과서를 빌려 매일같이 읽고 썼어.”

누군가에게 조국은 공기와 같다.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공기는 그의 폐로 들어가 심장의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생명을 전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 조국은 살점을 떼는 고통이 따른 뒤에야 찾아오는 안식이다. 그것도 불편한 안식. 다음의 이야기는 조국이 공기같던 일들이 살점을 떼면서 조국을 찾던 이들에게 행한 부끄러운 역사다.

일본에선 “조센진”,  한국에선 “반쪽발이”

1974년 4회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한 한재우와 선수들은 헬륨이 가득한 풍선처럼 들떠 있었다. 일본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것만큼이나 우승 의지가 강렬했다. 그러나 고시엔만큼이나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 45개팀과 동포팀 등 46개팀이 출전한 봉황대기대회는 토너먼트로 진행됐기에 한 번의 실수는 곧 ‘집으로’를 의미했다.

“봉황대기 우승 깃발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네. 우릴 도와준 이들이 많았으니까. 선수들과 경기마다 다짐했네. ‘저 깃발은 우리의 것’이라고.”

그리 되는 듯했다. 매경기 큰 실력차를 보이며 이윽고 결승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하필 결승 상대가 강호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였다. 전해 8강에서 1-0로 동포팀을 제압한 바 있는 대구상고는 김한근, 김운용 두 주력투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다 타선 역시 훗날 한국야구 최고의 교타자로 불릴 장효조가 버틴 터였다.

“(장효조는)멀리서 봐도 뛰어난 타자였네. 하지만….” 더 무서운 타자가 있었다. 일부 관중과 야구인들이었다.

1회초 동포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상대 관중석에서 이상한 응원구호가 들렸다. “반쪽발이! 화이팅”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지금도 잊지 않아.” 한재우의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안타라도 치면 “반쪽발이”는 “쪽발이”로 돌변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란 소릴 듣고 자란 아이들이었네. 그래도 모국이라 찾아온 아이들에게 그들은 ‘쪽바리’라 했네.” 득점기회가 오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어른들이야 참는다지만 아이들은 어땠겠나. 아이들은….” 순간 한재우의 입술이 말라서 모래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가벼운 투정에 불과했다. 동포 선수들을 향해 침을 뱉거나 쌍욕을 퍼붓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재일동포와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수들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이들도 있었다.

특히나 한국말에 능통하지 못한 동포 선수들을 대놓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다. “화교는 중국말을 잘하는데 ‘재일(在日)은 뭐냐”며 “이들을 초청하는 건 세금낭비”라고 주장한 언론도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40년이 넘게 부자연스러운 한국말로 비난받는 이가 있다. 김성근(67) SK 감독이다. 1959년 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뒤 이듬해부터 한국 실업팀에서 뛰기 시작한 김 감독은 올해로 한국 생활 50년째을 맞는다. 그러나 김 감독의 한국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이들은 “반세기 동안 한국에 살면서 도대체 한국어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며 비난을 퍼붓는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가운데 한 이는 사석에서 “일본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지”하며 비꼬기도 했다. 어째서 김 감독은 반세기가 흐르도록 한국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일까.

“김 감독의 일본어는 더 심하네. 한국말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다고. 목소리가 작은데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한단 말이지. 누가 그러더군. ‘김 감독의 혀가 짧아서 그렇다’고.” 한재우는 되레 이 같은 비난에 힘줘 대응하지 않은 김 감독을 책망했다.

“김 감독 일절 말 안했다고. ‘변명하라’해도 입 다물었다고. 그런 사람이야. 내가 선배인데도 간만에 한국 와서 ‘성근이 보자’하면 ‘선배님 죄송합니다. 이 일을 다 끝내야 뵐 수 있겠습니다’한다고. 그럼 난 밤 11시까지 기다려서 잠깐 본다고.”


김성근 SK 감독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의 한국어 실력에 집중해 비난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이 한국어 발음만 이상한 게 아니라 발화구조상 어느 언어를 사용해도 어눌한 말투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김 감독이 일체 이와 관련돼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 김 감독에게 발음이란 결코 진심보다 선행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사진=SK)


한재우가 먼 산을 바라보다 허한 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은 여기 일본에서도 대우를 해주는 야구인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반쪽발이’냔 말이지. 말이 없어 냉정해 보이지만 참 인정이 많은 이야. (혼잣말로)다시 태어나면 부모님께 그래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꼭 제가 태어나고 싶은 곳에 낳아 달라’고 말이야.”

초대받았으나, 환대받지 못한 이방인

결국 동포팀은 대구상고에 5-10으로 지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일부 관중의 극렬한 야유가 원인이었지만 이는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1990년대 초 한재우는 대구상고 출신의 유명 선수로부터 어째서 동포팀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섰는데도 번번이 대구상고에 졌는지 듣게 됐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그때 동포팀은 절대 대구상고를 이길 수 없었다고. 무슨 말인가 했네. 허허, 심판이 경기 중에 그랬다는 거야. ‘왜 외부인한테 우승기를 뺏겨야 하느냐’고. ‘스트라이크 존 잘 잡아줄 테니까 맘 놓고 치라’고 말이지.”

당시 아마추어 야구계는 심판 로비가 극성을 부렸다. 서울운동장 주변에서 감독을 불러내 ‘술을 사라’며 은근히 무언가를 요구하는 심판도 없지 않았다. 이에 불응하면 보기 좋게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한재우는 이 같은 부조리를 보며 우승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동포팀은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봉황대기에 참가하는 동안 우승 없이 1974, 1982, 1984년 공히 준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서 ‘준우승에 그.쳤.다’가 아니라 ‘준우승을 차.지.했.다’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승부를 떠나 동포 선수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조국을 이해하는데 성공했고 동포팀을 따뜻하게 반기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한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숙소로 찾아와 불편한 점이 없나 살피고 선수들을 호텔로 데려가 따뜻한 음식을 먹이던 한국일보 고 백상(百想)장기영 사장을 한재우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동포팀이 경비가 없어 쩔쩔 맬 때보다 묵묵히 경비전액을 지원하던 양원석(일본명 야나가와 지로)도 눈에 밟히는 이다. 재일동포들을 폭력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전후 야나가와구미(柳川組)를 조직한 양원석은 뒷날 야마구치구미(山口組)에 흡수되며 일본 야쿠자 사상 가장 무서운 행동대장이 됐다. 그러나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어느 교포소녀가 ‘재일동포의 이름을 더럽히는 폭력조직을 해체하라’고 쓴 것을 읽고 충격을 받아 조직을 해산한 뒤 프로복싱 조직 IBF의 국제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그 양반들은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야구를 지원하고 있을 지 몰라. 그럴 양반들이라고. 나중에 내 따라 올라가면 그땐 내가 술 한잔 대접해야겠어. 여긴 추운데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네…” 한재우의 눈가에 새벽이 찾아왔다.


한재우가 이끈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봉황대기대회에서 3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초대받았으나, 환대받지 못한 그들에게 우승이란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포 선수들은 자신의 야구인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이 대회에서 몸을 날렸다. 일부 선수들은 고시엔 대회 본선에서 자신의 소속고가 탈락이라도 하면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왔다(사진=스포츠춘추)


고교야구의 몰락, 동포팀의 사라짐

한재우는 1987년을 끝으로 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에서 물러났다. 이듬해부터 재일본대한야구협회 회장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봉황대기대회 때는 동포팀과 함께 방한했고 선수수급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네. 일본이 프로야구와 관계없이 고시엔대회의 인기가 여전한 것처럼 한국도 그러리라 예상했네. 하지만 반대였어. 3만 관중이 꽉 차던 동대문야구장에 결승전 손님도 많아야 3천 명 가량이 입장했네.”

고교야구의 몰락은 동포팀에겐 사형선고였다. 1990년대 이르러 동포팀은 화제의 대상도, 더 이상 강팀도 아니었다. 어둠 속의 한국야구를 위해 푸른 불빛을 반짝이며 비전을 제시하던 ‘비상구’ 동포팀은 조금씩 점멸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마지막 불꽃을 반짝인 적이 있었다.

“1994년 봉황대기 동포팀 멤버가 무척 좋았네. 나중 일본프로구단에 2명이나 입단했으니까. 그게 누구였냐고? 보자, (당시 자료를 들추며)긴키대부속고의 김용언과 히로시마공고의 박귀홍이었구먼. 일본명으로 긴조 다쓰히코(요코하마)와 아라이 다카히로(한신)였네."

2000년 센트럴리그 타율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거머쥔 긴조는 정확한 타격과 넓은 수비범위로 일본프로야구 외야수 가운데 톱클래스로 뽑히는 선수다. 2006년 제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해 국내야구팬들에겐 낯이 익다.

아라이는 2005년 센트럴리그 홈런왕으로 히로시마 토요카프 시절부터 거포였던 선수다. 2008년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리며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있는 한신으로 소속을 옮겼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예선 한국전에서 선제 2점 홈런 포함, 3안타 2타점으로 맹활약하고도 밝게 웃지 않아 일본야구팬들로부터 의문을 산 바 있다.


아라이는 2008년 히로시마 토요카프에서 한신 타이거즈로 팀을 옮긴다. 가네모토 도모히로, 히야마 신지로와 2명의 다른 동포 선,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한신 관계자의 증언이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예선 한국전에서 2점 홈런을 치고 난 뒤 일본기자들의 질문에 단답식으로만 대답해 일본야구팬들로부터 항의 아닌 항의를 받은 바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당시 긴조는 투수와 야수를 겸했네. 아라이는 그 나이 때 가네모토보다 힘이 좋았지. 예상대로 8강까진 쉽게 갔네.”

한재우의 기억대로 16강전에서 동포팀은 휘문고를 상대로 홍성훈의 4타수 2안타 3타점 등 타선이 고르게 터지며 8대1로 승리했다. 그러나 8강에서 만난 덕수상고는 공교롭게도 그해 최강팀이었다. 동포팀은 아라이를 중심으로 안타수 13대 10에서 보듯 막강한 타격을 선보였지만 덕수상고 이종민, 김상태의 맹활약으로 7-9로 졌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한 재일동포는 오사카에서 만난 <스포츠춘추>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대회”라고 털어놨다. 4강행이 좌절된 까닭일까. 아니다. 숙소 주변에서 한국 학생들이 “쪽발이”라고 놀리며 시비를 걸어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더듬거리는 말로 ‘우린 재일동포’라고 말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오히려 그 학생들 편이었다”며 그 때문에 분한 마음이 든 동포 선수들이 “다시는 한국에 오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73살의 야구소년의 꿈

3년 뒤 1997년. 이해 봉황대기를 마지막으로 동포팀은 더 이상 모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주최 측에선 참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동포들도 봉황대기를 조국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로 삼지 않았다. 글로벌 사회에 ‘민족’과 ‘피’는 색깔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동포 3세를 넘어 4세로 갈수록 미귀화자가 적어 선수단 구성에 애로가 있던 현실적 배경도 한몫했다.

“1969년 동포 학생야구단을 맡아 1997년 마지막으로 선수들을 데려올 때까지 쭉 계산을 해봤네. 총 600명의 선수들이 모국땅을 밟았더군. 이 가운데 총련계 선수가 70명이었네.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을 거네. 왜 안 그런가. 모국땅은 삼팔선이 쳐져 있어 왕래를 못하지만 야구엔 철조망이 없다는 걸 보여준 셈이잖나.”


젊은 시절의 한재우. 이제 그는 73살의 노인이다. 그러나 아직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나이란 오래된 라이벌에 불과하다. 한국야구계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들을 아무 대가없이 도왔던 이들을 잊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동포팀의 방한이 전무해진 뒤로도 한재우는 한·일 고교야구의 교류와 아시아고교야구 발전을 위해 음지에서 노력했다. 한국 아마추어팀이 오사카로 훈련이라도 온다 치면 무료로 구장을 알선했고 프로선수들이 부상치료 차 일본을 방문하면 자신의 방을 내줬다. 김광현, 정대현, 이진영이 한재우의 집에서 신세를 졌던 선수들이다.

한재우는 지난해 6월 재일본야구협회 회장에서 물러났다. 공식적인 활동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도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한 현역이다.

“재일본야구협회 임원들 자식들 가운데 야구선수가 좀 있다고. 봉황대기까지는 아니라도 서울이나 부산에서 친선경기를 하면 어떨까 싶네.”

마지막으로 그는 소프트뱅크 타격코치로 활동 중인 아라이 히로마사와 한 선수를 가리키며 “꼭 동포팀에 선발하고 싶던 선수였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한재우는 73살의 꿈꾸는 야구소년이다.

게다가 그는 야구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구름 뒤 숨어있지만 조수를 주관하는 달처럼 야구의 강한 인력은 언제고 그를 다시 그라운드로 인도할 것이다. “다시 감독을 맡게 된다면 저 친구를 꼭 데려가고 싶네.”

그가 가리키는 TV엔 요미우리 자이언츠 3번 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힘차게 스윙을 하고 있었다.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391&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91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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