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12
1986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가 마련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환영회에서 선수단과 관계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윗줄 맨 왼쪽이 한재우 감독이며, 아랫줄 가운데 이가 김박성이다(사진=스포츠춘추)
오사카의 호랑이’ 한신의 김박성(金博成)이라, 그게 누군지 궁금했다.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는 재일동포 선수라면 가네모토 도모아키, 히야미 신지로(황진환), 아라이 다카히로(박귀홍) 가운데 한명일 게 틀림없었다. 이 가운데 ‘김’씨는 한국명 김지헌(金知憲)으로 알려진 가네모토가 유일했다.
“그전에 말이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을 조직하기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 훗날 동포 야구단을 다시 조직할 때 혹여 노하우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지그시 눈을 감으며)해마다 꽃피는 봄부터 선수들을 찾아 길을 떠났네.”
196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감독을 맡은 이후부터 한재우는 봄 고시엔대회(선발고등학교야구대회)를 시작으로 선수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이유가 있었다.
“봄 고시엔대회에 출전할 정도면 강팀이 분명했네. 여름 고시엔대회도 출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지. 그런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하는 시기가 늘 8월이었다는 게 문제였네.
(고개를 끄덕이며)맞네. 여름 고시엔대회(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와 모국방문 일정이 겹쳤던 거야. 어린 선수들에겐 모국방문경기보단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고시엔대회 출전이 더 중요한 법이었네. 본인들도 그렇지만 학교도 내심 고시엔대회에 출전하길 바랐네. 그래 어쩔 수 없이 봄 고시엔대회를 보면서 여름고시엔대회 출전 가능성이 높은 팀은 제쳐 둬야 했다네.”
한재우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일본 전역의 3천개 고교야구부 가운데 일단 여름 고시엔대회 출전 가능성이 낮으나, 야구명문으로 통하는 200개교를 추렸다. 그리고 각 학교에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의의와 활동을 설명하고 재일동포 선수가 야구부에 있는지, 있다면 포지션과 활약 정도를 알려달라는 협조문을 보냈다.
“50, 60통의 회신이 왔네. 그 가운데 재일동포 선수가 있다는 회신은 대개 10% 정도에 불과했네. 운이 좋으면 20%가 될 때도 있었지. 만약 해당 학교가 간사이(관서)지방에 있으면 학교로 찾아가 연습을 지켜보거나 고시엔대회 지역예선을 쫓아다니며 선수들을 일일이 체크했네. 직접 선수와 만나 의향을 묻기 전 관찰의 시간이 필요했거든.”
선수 선발은 부모 설득이 관건
선수단 구성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은 여름 고시엔대회 본선진출 고교가 확정되는 6월부터 시작했다. 이때부터 8월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직접 학교 관계자와 선수를 만나 동포 학생야구단 참가를 설득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꼭 데려가야 하는 선수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네. 거리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지. ‘데려 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었네. 처음에 한국에 가자고 하면 8할이 싫다고 했네. 고작 2할 정도만이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했지. 8할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네.”
설득의 주 대상은 선수보다는 학부모였다. 선수가 거절해도 학부모가 ‘OK’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는 한국이 헐벗고 가난해도 마땅히 모국을 방문해 뿌리를 체험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거의 전부에 가까운 재일동포 부모가 자식의 한국행을 환영했고 적극 후원했다. 196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김기태(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쓰)가 그런 경우였다.
고노하나학원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기태는 중학교 시절부터 빼어난 투구로 명성이 높았다. 그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첫 지휘봉을 잡은 한재우가 팀의 선봉장으로 김기태를 점찍은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김기태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기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도 교류가 있던 사람이었네. 처음에 ‘한국에 가자’고 하니까 김기태가 시큰둥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가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하고 태도를 바꾸는 거야(웃음).”
훗날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68승66패92세이브를 기록하며 1974년 센트럴리그 다승(20승), 탈삼진(207) 2관왕에 오른 바 있는 김기태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신 타이거즈에 뛰고 있는 히야마 신지로도 아버지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가 더해져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이 됐다. 하지만 늘 선발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다. 반대였다. 역시 고시엔대회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일본프로야구의 ‘사이 영’으로 불리는 400승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는 야구가족으로 유명하다. 그의 동생, 아들, 조카도 모두 야구선수로 뛰었다. 그 가운데 조카 가네시로 아키히토(한국명 김소인)는 히로시마, 니혼햄, 요미우리를 거치며 개인통산 72승61패80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다.
“1977년 일걸세. 가네시로가 야구명문 PL학원고에 다니고 있었네. 부모뿐만 아니라 학교와도 다 얘기가 끝나서 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방문하기로 했네. 몇 밤만 자면 출국이어서 가네시로 짐 가방을 우리 집에 보관하고 있었네. 그런데 허허.”
여름 고시엔대회 출전이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됐던 PL학원고가 기적적으로 본선진출이 확정된 것이었다. 가네시로는 눈물을 머금으며 모국행을 접어야 했다. 이와 비슷한 선수로 니우라 히사오(한국명 김일융)도 있다. 니우라 역시 갑작스런 고시엔대회 출전으로 한국행이 무산됐다.
한재우는 누구보다 아쉬운 선수로 199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합류시키려 했으나 좌절된 한 선수를 꼽았다. 그 선수 역시 PL학원고 출신으로 당시 팀의 에이스였다.
“PL학원고에서 이미 확인을 해줬다고. 재일동포 선수가 맞다고. 학교에 찾아갔지. 당시 감독이 나보고 ‘직접 이야기해보라’는 거야. 그래 ‘한국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지. ‘어렵겠다’는 거야. 그때 PL학원고가 고시엔대회에 가니 마니 했거든. 결국 고시엔대회 본선에 올랐지. 그래도 선수만 좋다고 했으면 나와 감독이랑 원체 친했으니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왜 ‘마쓰이’라고 있잖은가. ‘마쓰이 가즈오’라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선수 말이네. 요즘은 메이저리그에서 뛰던데 말이야.”
가장 버거운 상대, 이데올로기
“나카무라 다케시(한국명 강무지)도 기억에 남는 선수네. 원체 고생을 많이 했거든.”한재우의 얼굴에 꽃물이 번지듯 미소가 그려졌다.
좋은 포수를 찾아 헤매던 한재우에게 하나조노고의 주전포수 나카무라는 영입 0순위였다. 한국행을 설득하기 위해 교토까지 찾아간 한재우. 그러나 나카무라의 반응은 냉담했다. 계속된 설득에 넘어가긴 했지만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다.
“방한 전 오사카에서 맹훈련을 했다고. 놀러가는 게 아니니까. 그래 오사카 이외 지역에 사는 선수들은 모두 내 집에서 재웠네. 그런데 교토는 애매했다고.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이었거든. 나카무라가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길 바랐다고. 오사카에서 훈련이 끝나면 교토까지 데려다 주길 반복했지. 어쩔 땐 기차를 타기도 했는데 그 더운 여름에 선풍기 하나 없이 몇 시간을 서서 갈 때도 있었지. 무엇보다 혹시나 나카무라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조바심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닐세.”
나카무라는 1982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땅을 밟았고 훗날 주니치 드래건즈에서 선동열과 함께 배터리로 뛰었다. 현재는 주니치의 배터리 코치로 후진양성에 열심이다.
나카무라 이야기를 하던 한재우는 모 선수의 이름이 나오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념에 관련돼 입을 열었다.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아나? 경비도, 선수 선발도 아니었네. 이데올로기였네. 예전만 해도 재일동포들이 여권을 만들려면 재일한국거류민단(민단)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네. 해마다 민단에 가서 선수들 여권을 만들었지. 그런데 (씁쓸하게 웃으며)민단에서 여권 발급 대가로 5년간 민단 회비를 내라지 뭔가. 어쩌겠나. 선수들에게 내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말이야. 우리가 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한 번은 한재우가 여느 때처럼 민단에서 여권업무를 보고 있었다. 민단 관계자가 급하게 한재우를 불렀다.
“저, 한 감독님. 죄송하지만 이 선수 여권 발급은 안 될듯합니다.” 민단 관계자가 한 선수의 여권을 되돌려줬다.
“왜 안 된단 말인가요?” 한재우가 물었다.
“이 선수 집안이 조총련이더군요. 아시다시피 총련계는 여권 발급이 힘듭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선수는 훗날 일본프로야구에서 엄청난 성적을 내며 대스타가 된다. 그러나 고교시절 집안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라는 이유로 모국행이 좌절된 뒤 한국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선수의 집안이 총련계가 된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 선수는 일반 일본학교에 다녔지만 여동생은 조선학교에 다녔네. 실은 이 선수 어머니가 이북에 남겨져 있었거든. 어쩔 수 없던 게지. 돌아보면 당시만 해도 이념이 아니라 가족 때문에 타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등을 돌려야 했던 사연이 수도 없이 많았다네.”
한재우는 “말이 나온 김에”하고 운을 뗀 뒤 “총련계 선수들을 합류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총련계는 민단계와는 달리 선수보다 부모 설득이 더 힘들었다. 이유가 있었다. 황당한 유언비어에 현혹된 부모들이 아이들의 한국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한국에 가면 당장 한국군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엔 만 18세 이상의 재일동포 남성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한국 병역법에 따라 강제 입대된다는 루머가 퍼져 있었다. 특히나 총련 사회가 이 루머에 바짝 긴장했는데 이 때문에 총련계 선수들은 한사코 한국행을 거절하게 마련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는 가족 어느 누구도 배웅을 나오지 않았단다.
한재우는 무사히 귀환한 아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눈물짓던 총련계 부모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총련계 선수들도 처음 한국 도착할 때는 얼굴이 새하얗다고. 불안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국을 깨닫고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십중팔구 일본 돌아가서 그 사실을 부모한테 말했을 것이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어도 보람이라면 그럴 때가 보람이 아니었겠나 싶어. 남북을 화해시키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 말이네.”
2류 선수에서 오사카의 호랑이로 성장한 김박성
“그래, 이제 ‘오사카의 호랑이’ 김박성이 누군지 알겠나?” 고개를 갸웃하자 마침 TV에 시작하던 스포츠뉴스를 가리켰다.
“저기 나오는구먼. 한신의 4번 타자 말일세.” 한신 타이거즈의 4번 타자라면 가네모토 도모아키였다. 실제로 TV에선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가네모토의 영상이 나왔다.
“그래, 가네모토일세.” 한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네모토 도모아키(41).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한신의 외야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선수. 2006년 4월 9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의 칼 립켄 주니어가 세웠던 904경기 연속 ‘전경기 전타석 출전 기록’을 깬 뒤 지난 시즌까지 1330경기째 대기록을 작성 중인 철인(鐵人).
왼손 타자로 왼손에 골절상을 당했으면서도 타석을 끝까지 지켜내며 오른쪽 한 손으로 안타를 쳐낸 일화는 지금까지도 일본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실력은 철인 이상이다. 센트럴리그 최우수선수(MVP) 1회, 베스트나인 7회에 뽑힐 만큼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프로 17년 동안 개인통산 2151안타, 421홈런, 1168볼넷, 1324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통산 타율 2할9푼3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역대 9위이고 421홈런과 OPS(출루율+장타율) 9할2푼2리는 각각 역대 13, 10위에 해당한다. 특히나 그의 기록이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이른 바 ‘현대 일본야구’에서 세워진 것이라 의미하는 바가 더욱 깊다.
가네모토의 인기는 전국적이다. 올스타 선정 9회가 이를 증명한다. 오사카에선 일본수상을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고 절대적이다. 재미난 경험이 있다. 지난해 8월 오사카로 취재를 갔을 때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당시 일본 총리였던 후쿠다 야스오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관심을 두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 가네모토의 부상소식이 흘러나왔다. 순간 식당의 모든 이가 식사나 하던 일을 멈춘 채 TV에 집중했다. 일단의 사람들은 가슴을 쥔 채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가네모토의 부상이 깊지 않다는 아나운서의 말이 나오자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상에 복귀했는데. 그런 가네모토가 재일동포 3세란 건 오사카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원래 이름이 김박성이었다고. 도모아키(지헌)는 일본식 이름이고.” 한재우는 가네모토의 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가네모토 아버지가 건설업자였다네. 집이 꽤 부유했다고. 그이 외삼촌들도 소시적 야구를 했는데 나와 막역한 사이였네. 외삼촌들이 다 귀화했던 걸로 기억이 나. 가네모토도 아마 (귀화)했지 싶은데.”
2001년 결혼과 동시에 가네모토는 귀화 절차를 밟았다. 여느 재일동포들처럼 자신보다는 가족의 미래 때문이었다. 일본 마이니치방송(MBS)의 야기 사키 아나운서는 가네모토의 아내와 절친한 사이다. 야기 아나운서는 “가네모토 씨가 경기 뒤 집에서 소주 마시는 걸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는다”며 그가 천상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프로야구의 거목이 된 가네모토도 고교 시절에는 평범한 선수였다고 한다. 실제로 가네모토가 고료고(高)를 졸업한 뒤 주오대 야구부에 응시했다 떨어지고 1년간 재수 끝에 도호쿠복지대에 입학한 건 유명하다.
“가네모토가 도쿄로 대학시험을 보러 간다고 인사를 왔었네. 나중에 듣자니까 떨어진 모양이더라고. 그이 외삼촌이 내게 ‘우리 조카 어디 갈만한 대학이나 사회인 야구팀이 없겠느냐’고 묻더군. 그때만 해도 이렇게 성공할 줄은 전혀 몰랐네.”
그 뒤 한재우는 가네모토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에 대해 누가 물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딱 한번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가네모토가 히로시마 토요카프에서 한창 명성을 쌓던 2002년이다.
“친구 한명이 오키나와에 구장을 갖고 있었다고. 그이를 만나러 갔는데 마침 히로시마가 그 구장에서 스프링캠프를 차렸더군. 그때 누가 내 앞에 다가와 인사를 하지 뭔가. 그래, 가네모토였네. (먼 곳을 바라보며)이제는 재일동포의 영웅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 스타가 됐지만. 과거에는 혹시나…혹시나 가네모토에게 ‘재일’이란 딱지가 불리하게 작용할까…그럴까봐 누가 물어도 말을 하지 않았네.”
가네모토는 열심히 연습하는 것과 기회를 기다리는 것의 가치를 아는 이였다. 그가 재일동포임에도 일본에서 어느 일본인보다 철인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똑같은 선수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도 있으니….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388&office_id=295&article_id=000000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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