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교토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이다. 해방 전 한국은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 야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1 때 처음 야구공을 잡았는데 그때만 해도 야구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다. 확실한 포지션도 없어서 이것저것 다 해봤다.

- 소질이 없던 선수가 고교 때는 유망주로 거듭났다. 

고3 때 투수로서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실력이 없는 대신 열의가 있었던 듯싶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열의다. 야구를 즐겁게 했다. 교토 이와타고 3학년 때인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뽑혀 처음 모국 땅을 밟았다. 

- 다음해인 1960년부터 한국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1960년 실업야구 교통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야구가 즐거운 게 아니라 먹고살아야 하는 직업이 됐다. 특히 나는 재일동포로 한국에 왔으니까 야구를 그만둬도 살길이 많은 동료선수들과는 달랐다.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했고 그 방법이 무엇인지 연구해야만 했다. 어쩌면 한국으로 올 때부터 프로페셔널이 되기를 시대가 요구했는지 모르겠다. 


‘반(半) 쪽발이’ 김성근 

- 1960년대 한국 실업야구 발전에는 재일동포 선수들의 힘이 컸다. 

실업야구는 물론 초창기 프로야구에서도 재일동포 야구인들의 공이 컸다. 하지만 1960년대나 그 이후나 재일동포는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외국사람 취급을 당했다. 실업야구에서 활동할 때 어느 신문이 나를 가리켜 ‘반 쪽발이’라고 했다. 나중에 지도자 생활을 할 때에는 ‘쫀쫀한 일본야구 스타일’이라고 비난하고. (씁쓸한 표정으로)그럴 때마다 같은 민족, 같은 피붙이여서 모국에 온 건데 왜 그러는가 싶었다. 

- 1962년부터 기업은행에서 뛰었다. 1964년에는 실업연맹전에서 20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때는 야구하는 데 필요한 시설도 부족하고 선수들의 의식도 지금 같지 않았다. 감독이 나가서 던지라면 무조건 던져야 했다. 그때 9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뒀는데 그 이후로도 줄곧 그런 식으로 던져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 9경기 연속 완투라, 무리한 투구였다. 

무리한 탓에 선수 생명이 단축됐다. 하지만 당시는 한계 투구수는 물론 팔을 아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내가 선수 생활을 그만둘 때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면 나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 공을 던져야 하는데 어깨가 올라가길 하나. 게다가 팔꿈치까지 다 나간 상태였다. 그래도 선수는 언젠가 은퇴하기 마련 아닌가. 아쉬움은 없다. 

- 그래도 상심이 컸을 텐데 

솔직히 상심이나 좌절할 틈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기에도 바빴다. 그때부터 야구를 ‘자기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직 야구에만 매달렸다. 그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멀어진 게 사실이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럴 때면 언제든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속으로 ‘너희들 반드시 지켜봐라. 난 꼭 승리하고 성공할 거다’하고 다짐했다. 이 세계는 톱이 중요하다. 살아남는 사람이 최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아껴야만 했다. 후회도 없고 회한도 없다. 

- 1968년 은퇴한 뒤 마산상고 감독을 맡았고 국가대표팀 코치도 했다. 

어깨를 다치고 난 이후 혼자서 지도자 수업을 했다. 독학이었는데 그냥 ‘코치가 되자’는 막연한 수준이 아니라 ‘어떤 코치가 돼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본에서 야구를 배우고 경험한 게 사실 큰 도움이 됐다. 그즈음 마산상고 야구팀이 창단했고 1972년에는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의 강화훈련 담당 코치가 됐다. 그때 가르친 선수들이 김재박(현 LG 트윈스 감독) 연배들이다. 

- 1976년 충암고 감독을 맡았다. 이때부터 지도자 김성근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생각한 건 오직 하나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때 착안한 것이 바로 데이터 야구다. 사람들은 “왜 하필 데이터 야구냐”하며 의아해했는데 사람은 궁지에 몰려야 생존의 아이디어가 나오기 마련이다. 실력은 떨어지는데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당시 나는 남의 자식들을 맡아 놓고 있었다. 선수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실업팀에 보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선수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지도자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과 싸워야 한다. 

- 당시 데이터 야구는 어떤 유형이었나.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모두 수작업이었다. 학생들이 기록하게 하고 내가 집계해 각종 데이터를 산출했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한 뒤 경기에 나섰다. 지금 프로야구에서 하는 일을 그때 시작한 셈이다. 간혹 사람들이 데이터 야구를 가리켜 “치사한 일본야구”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상황인데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나. 

- 그래서 효과를 봤나. 

감독을 맡은 이듬해인 1977년 봉황대기에서 야구부 창단 9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트러블 메이커’ 혹은 ‘음지의 명장’ 

-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코치가 됐다. 원년 우승은 차지했지만 투수코치가 타격을 지도한다고 이광환 타격코치와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는데 

후배고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 시절에는 감독도 코치들에게 타격을 가르쳤다. 세상 사람들이 자세한 내막을 몰라서 그런 거지. 

- 이듬해 말부터는 OB 감독을 맡았다. OB 특유의 ‘근성야구’가 시작됐다는 평이 많다. 

-당시 선수단에 보이지 않는 근성이 있던 게 사실이다. 원년 우승을 차지한 이후 선수들의 의식이 조금씩 나태해졌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항상 위기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아쉬움이 있어야 한다. 아쉬움이 없는 사람은 발전하지 못한다. 아쉬움이 없다는 건 그만큼 노력과 고생을 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5년간 OB를 이끌었다. 

- 1988년 OB 감독에서 물러날 때 말이 많았다. 당신의 퇴임을 위해 OB 프런트에서 ‘인기투표’도 하지 않았나. 이때부터 당신의 이미지가 강성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다 하면. (길게 한숨을 내쉬다)나는 그 팀의 감독이었다. 지금 말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고 다 지난 일이다. 강성이라는 것도 그렇다. 세상에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나 감독이 무너지면 선수들도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감독은 뒷모습조차도 당당해야 한다. 프런트와의 싸움도 의도적으로 벌일 때가 많았다. 

- OB에서 물러난 이후 1989년 태평양에서 영입작전을 벌였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태평양에 가서 보니까 코치들이 모두 구단 사장의 수족이었다. 사장 앞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였고 감독도 경기가 끝나면 다음날 오전 6~7시에 사장실로 불려가는 판이었다. 그런 상황인데 선수들이 지도자를 믿고 따라올 수 있었겠나. 취임 전 그런 관행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미국 교육리그에 참가할 선수를 뽑아 달라기에 “누구누구를 보내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이틀 만에 선수 명단이 바뀌어버렸다. 내가 사장에게 “당신은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인가”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감독도 맡지 않겠다고 버텼다. 

- 결국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화가 나도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 쪽에서 찾아왔다. 돌아보면 그때 참 인간적으로 하면 안 되는 짓을 많이 했다.

- 인간적으로 하면 안 되는 짓이라니 

그때 있던 코치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내쳤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사람들은 야구코치가 아니라 구단 사장의 얼굴만 바라보던 해바라기였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선수들의 태양이 프런트에서 코칭스태프로 바뀌었다. 그도 그렇지만 그때 나한테 선수들이 말도 못하게 당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졌지.(웃음) 

- 어떤 식으로 선수들을 훈련시켰나. 

일단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슬렁슬렁 훈련하는 선수는 훈련장에서 아예 내쫓았다. 선수 스스로 무엇을 실수하고 잘못했는지 깨닫도록 채근했고 팀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 그 무렵 오대산 극기훈련은 지금도 야구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나보고 다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구단에서도 “왜 그런 짓을 하느냐”면서 처음에는 10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순전히 선수들 자비로 떠났고 고추장이나 김치, 버너도 선수들이 준비했다. 그 훈련을 한 이유는 고생스럽더라도 팀을 하나로 만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구단도 나중에 지원해줬다. 

- 태평양 투수 3총사도 엄청난 훈련량으로 탄생한 것 아닌가. 

일단 정명원은 공이 빨랐고 의리가 있었다. 최창호는 변화구가 참 좋았다. 박정현은 잠수함 투수로 장점이 많았다. 특히 정명원과 최창호는 정말 지독하게 훈련을 시켰다. 하루에 500개씩 던지게 했다. 포수 미트를 고정해 놓고 정확히 그 안으로 공이 들어가지 않으면 심하게 ‘꿀밤’을 때렸다. 합동훈련이 끝나면 다시 개인훈련을 시켰다. 훈련이 실제 경기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옆에서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게 내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세 선수의 노력이 더해져 투구 집중력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훌륭한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 강훈련에 대해 선수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땀 흘릴 때는 감독 원망도 많이 했겠지만 나중에는 본인들도 신기해했다. 최약체라고 불리던 팀이 연승을 하니까 상대팀에서도 태평양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이 또 나를 욕했다. 욕하는 거야 개인의 자유지만 내가 이 팀을 만들기 위해 하루 2,3시간만 잤다는 사실을 아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속으로 ‘당신들이 욕을 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라. 그렇다고 당신들이 이 선수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하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 하지만 태평양에서도 쫓겨났다. 그때도 당신의 퇴임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이다. 다른 건 참을 수 있어도 거짓말은 그러지 못한다. 당시 구단으로서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만 선수들 연봉이나 지원이 매우 부족했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다가도 뒤에서는 다르게 움직일 때가 많았다. 그래도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는 꾹 참았다. 1999년 시즌이 끝났을 때 롯데 측에서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평양 구단 측과 “다음 시즌에도 열심히 합시다”하고 악수를 한 뒤 일본을 방문했는데 (허탈한 표정으로) 일본 현지에서 내가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음지의 야구인 김성근에게 양지는 우승이 아니라 과정이다.(사진 김동욱)



- 1991년에는 삼성이라는 유력 구단을 맡았는데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삼성 때는 구단과 선수 정리문제로 옥신각신했다. 당시 구단에서는 허규옥 등 팀의 원년 멤버들을 정리하려고 했다. 나는 “지금 정리하면 안 된다. 원년부터 팀을 이끌어 온 프랜차이즈 스타들인데 이 시점에서 정리하면 도리가 아니다”라면서 맞섰다. 당연히 언성이 높아지고 갈등이 생겼다. 그게 내가 해임된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김응용 감독(현 삼성 사장)이 야구단에서 선수들을 일절 못 건드리게 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 당시 ‘대구출신 감독론’을 내세우며 당신의 퇴임을 바라던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온다고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누가 뭐래도 자기 뜻대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 삼성에서 물러난 뒤 4년 동안 감독을 맡지 못했다. 1995년에야 쌍방울 감독을 맡아 야구 일선에 복귀했다. 

쌍방울은 팀 분위기가 태평양과 비슷했다. 꼴찌팀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여기저기서 패를 이뤄 뒤에서 팀을 조종하려 들거나 책임 전가에 능하고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선수들한테 “남자라면 남 밑이 아니라 위에 있어야 한다.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밖에 나가면 부끄럽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그리고서 시작한 일이 선수단의 의식 개조였다. 먼저 선수들에게 ‘야구가 너희들한테 어떤 존재냐’ ‘무슨 목적으로 야구를 하느냐’와 관련해 리포트를 쓰도록 했다. 외부적으로는 누가 선수 좀 받아달라는 청탁을 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 선수들의 희생도 컸겠지만 당신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태평양 때나 쌍방울 때나 그 이후에나 야간훈련이 끝난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었다. 아침까지 데이터를 들여다보다 새우잠을 잤고 오전 11시 훈련에 참가했다. 시즌 내내 이런저런 통증에 시달려 진통제를 먹어가며 살아왔다. 주변에서 선수들한테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훈련을 시켰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승리하지 못하면 사기꾼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에 더욱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 2002년 LG 감독을 맡아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잘렸다. 

LG에서도 거짓말을 들어야 했다. 구단 사장이 내게 3,4번 거짓말을 했다. 

- 어떤 거짓말이었나. 

주로 선수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태까지 구단과 언쟁을 벌인 이유로 내 문제가 중심에 있던 적은 없었다. 대신 선수들의 권리라면 반드시 책임을 지려 했다. 당시 구단에서 삼성한테 이기면 얼마씩 돈을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감독인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단에서 어떻게 선수들한테만 이야기하고 감독에게는 숨길 수 있나. 물론 감독과 상의해야 하는 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도 내게 숨기는 게 많았다. 뒤에서 욕도 많이 하고 다니고. 하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말에 신경을 쓰는 대신 각종 데이터를 뽑고 팀 전력을 어떻게 하면 높일까에 집중했다. 

- 2005년 순회코치가 된 후 2년간 일본 지바롯데 마린스에 있었다. 

최고관리자에서 중간관리자가 된 셈이었다. 뒤를 돌아볼 기회가 됐고 그동안 무엇이 부족했는지 반성할 수 있는 시간도 됐다. 

- 당신과 지바롯데 바비 밸런타인 감독은 다른 스타일이지 않나. 

가고자 하는 방향은 같지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밸런타인 감독은 상대방의 심리를 잘 파악해 자기 생각대로 사람을 이끄는 유형이고 나는 모든 걸 혼자 떠안고 가는 스타일 아닌가. 

- 지바롯데 코치 시절 부진에 빠져 있었던 이승엽을 부활시켰는데 

(이)승엽이는 워낙 실력이 뛰어난 선수다. 그러나 야구에서 진정 중요한 건 마음과 정신력이다. 승엽이가 자신감을 찾고 정신력이 강해지도록 유도했고 그다음에 타격폼 수정 등 기술적인 면에 집중했다. 아마 지바롯데에서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을 것이다. 원래 계약할 때 하루 2시간씩 승엽이를 봐주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선수들을 지도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온종일 승엽이한테만 매달렸다. 누가 보면 일부러 눈 감고 못 본 척했다. 

- 한때 이승엽이 국내로 복귀한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당신의 조언으로 철회했다고 들었다. 

하루는 같이 식사를 하는데 승엽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때 크게 야단을 쳤다.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어야 독을 품는데 너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 약한 것이다. 늘 머릿속으로 ‘나는 여기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라”고 타일렀다. 


새로운 시작 

- 올시즌 SK 감독이 됐다. 목표가 있다면 

계약기간이 2년 밖에 안 되지만 그동안 팀의 기반을 만드는 게 과제다. 선수단의 정신적인 면이나 플레이 면에서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떠났으면 한다. 물론 4위 안에 들고 우승까지 하면 더 좋겠지. 특히 선수들에게 왜 힘들게 훈련해야 하는지 왜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알려주고 싶다. 

- 지난해 SK 선발진은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적은 1,124이닝만을 책임졌고 선발승 비율도 51.7%에 머물렀다. 올시즌 마운드 재건이 과제다. 

예전 쌍방울, 태평양 때도 그렇지만 먼저 SK의 지난 데이터를 분석해야 한다. 어떻게 경기를 치렀고 어떤 형태로 무너졌으며 어떤 방식으로 마운드를 운용했는지 철저히 분석한 뒤 선수들을 점검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외국인선수 케니 레이번, 마이크 로마노는 선발용이다. 송은범, 이영욱도 괜찮은 것 같다. 

- 당신의 선수 보는 눈은 일본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선수들의 특성이 한눈에 들어오나. 

선수들마다 분위기나 폼이 제각각이지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대충 감이 온다. 그래도 연구를 해야지. 

- 당신을 가리켜 ‘야구의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혹사의 대명사’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혹사에 따른 부상은 여러 이유에서 온다. 일단 투구폼이 나쁘거나 밸런스가 무너지면 다치기 쉽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100이닝을 던져도 투구폼이나 밸런스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하다 싶으면 반드시 폼과 밸런스를 코칭스태프에서 잡아준다. 나도 늘 그 점에 유의했다. LG에 있을 때 이동현 같은 경우는 포크볼을 반듯한 폼으로 잘 던졌다. LG에서 물러난 뒤 보니까 투구폼이 변해 있었다. 정명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서 나온 뒤 보니까 2월 그 추운 날에 대구 경산구장에서 정규시즌도 아닌데 7회까지 던지고 있었다. 기술적인 면 외에 술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사생활이 나빠도 혹사와는 관계없이 부상이 찾아올 수 있다. 

- 강훈련을 선호하는 감독이라면 선수들의 사생활도 엄격하게 관리할 것 같은데 

나는 선수들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는다. 다음날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여자문제나 음주나 다 괜찮다는 생각이다. 왜냐? 스스로를 컨트롤할 줄 아는 게 프로이고 그걸 못하면 빨리 사라져야 하는 것 역시 프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강훈련을 거듭하는 선수들에게 사생활의 자유까지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 선수들의 사생활이 문제가 될 경우 더러 감독들은 언론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일일이 해명하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잘못했다고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고 다니는가.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나. 감독은 선수의 허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 어느 야구인은 당신이 야구판 정치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살아온 길 자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김성근이 어떻다’하는데 내 인생과 야구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말을 한다.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이나 구단의 높은 분들과 애써 술이나 밥을 먹으러 다니지 않았다. 그 시간에 연습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는 인생철학 가운데 하나가 일일이 해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기에 변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 당신은 오랜 기간 프로야구 코칭스태프로 활동하면서 한 번도 우승을 맛보지 못했다. 우승에 대한 미련이 크지 않나.

(잠시 침묵하다)우승이야 하고 싶지.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기 바란다. 1백 원밖에 없던 사람이 그걸 갖고 1천 원을 만들면 그게 우승이고 인생의 성공이다. 1백 원을 갖고 1만 원으로 불린다고 그것만이 성공은 아니라는 뜻이다. 선수가 좋아서 우승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진정한 우승은 선수나 여건이 좋지 않은데도 모두가 힘을 모아 납득할 만한 성적을 거뒀을 때를 말한다. 1996년 쌍방울이 정규 시즌 2위를 했을 때나 2002년 LG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을 때 누가 그 같은 성적을 예상이나 했는가. 

- 당신도 좋은 선수들이 풍부한 팀에서 감독을 맡고 싶었을 텐데 

솔직히 그런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양지에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음지에 머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난 줄곧 음지에 있던 사람이다. 실업야구 때부터 그랬다. 김응용을 비롯해 최강의 멤버를 구축했던 한일은행은 내가 있던 기업은행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팀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많이 이겼다. 있는 선수들과 주어진 여건을 바탕으로 부단히 노력하면 된다. 그게 내 운명이다. 

- 1942년생이면 올해로 65살이다. 꿈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다. 

지금 꿈은 SK의 우승이다. 먼 꿈은 한국야구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같은 큰 대회에서 우승하는 걸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야구의 시스템을 바꾸고 이제는 남 탓만 할 게 아니라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과거 국가대표 감독 제의를 몇 번 받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감독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열의가 조금이라도 한국야구에 밑거름이 된다면 그것으로 내 꿈은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출처] SPORTS2.0 제 42호(발행일 2007년 03월 12일)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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