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김성근 감독이 지난 11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SK와의 홈경기를 위해 야구수첩을 챙기며 준비하고 있다. 대전 | 이석우 기자
ㆍ2015 프로야구 화두가 된 ‘김성근’… “꼴찌 한화 반란, 그가 하면 된다”
지난 2월 어느 날, 일본 오키나와 고친다구장 조명탑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주변의 인가라고 해봐야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여서 야구장을 덮은 불빛은 어둠에 대비돼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동네의 한 유지가 야구장을 찾아 김성근 한화 감독에게 인사했다. “고친다구장에 조명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일본 고치 1차 캠프부터 밤을 낮처럼 보낸 한화 선수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불빛이었다. 선수들은 밤 9시가 돼야 훈련을 마치고 숙소행 버스에 탔다. 오전 6시30분 아침식사로 하루를 연 것을 감안하면 고3 수험생이나 훈련소 신병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 수준이었다.
머리가 클 대로 커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통념상 반발심이 생길 수 있는 스케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훈련했다. 리더가 바로 김성근이기 때문이었다.
2011년 8월 구단과의 갈등 끝에 SK 감독에서 경질된 김 감독이 꼴찌 한화 감독으로 프로야구에 돌아왔다. 홈팬들은 지난 7~8일 LG와의 시범경기가 열린 대전구장의 1만3000석을 가득 메웠다. 한화가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시범경기에 입장료를 받았지만 5개 구장 가운데 유일하게 매진을 기록했다. 김성근 감독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 무엇이 김성근을 따르게 하나
겨우내 한화의 훈련과정이 글로 사진으로, 또 영상으로 야구팬에게 생중계되듯 했다. 3년 연속 꼴찌를 한 한화 이글스와 4년 만에 프로야구로 컴백한 김성근 감독의 절묘한 만남. 둘의 결합이 어떤 화학적 작용을 일으킬지 야구팬들은 벌써 몇달째 설레는 밤을 보내고 있다. 야구팬이 궁금해하는 것은 김 감독이 이룰 한화의 극적인 변화다. 선수들이 김 감독을 따르는 것은 자기 야구인생의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헛품’ 팔듯 ‘개고생’만 하고 끝날 훈련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먼저 잘 알고 있다.
SK 시절 김 감독과 5년을 함께한 이력이 있는 내야수 정근우는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로 4년 총액 70억원에 한화로 이적했다. 정근우는 한화에서 김 감독과 재회하게 되자 후배들에게 “훈련이 고되지만 따라가다 보니 큰돈을 벌게 되더라”는 경험담을 들려줬다.
올 시즌을 앞두고 FA로 KIA에서 한화로 이적한 우완투수 송은범은 원소속 구단에서보다 제시액이 적은 액수로 ‘다운계약’을 하고도 김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팀을 선택했다. 최근 몇년 부진의 시간을 보낸 그는 SK 시절 김 감독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부자가 되기보다는 부활을 꿈꿨다.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최고경영자(CEO) 유형 중 하나로 ‘비전제시형’이 꼽힌다. 입에는 너무도 쓰지만 제대로 삼키면 보약이 될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 김 감독의 훈련을 향한 여러 선수들의 접근법이다.
■ 그라운드로 나온 리더십
김성근 캠프에서는 리더의 불성실 때문에 선수들이 푸념할 일이 없다.
김 감독은 야수가 수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직접 공을 쳐준다. ‘펑고(fungo)’라는 것이다. 몇해 전 팔꿈치 통증 탓에 펑고를 치지 못한 적이 있다. 김 감독은 부상한 선수들이 하는 것처럼 재활훈련을 거쳐 다시 방망이를 들었다. 1942년생으로 올해로 만 73살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야수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펑고를 친다. 김 감독은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거부한다. 신체적 쇠약함이 싫어서만은 아니다. 김 감독은 길에 넘어진 손자와 손녀에게 손부터 내미는 할아버지보다는 자식 앞에 엄한 아버지로 선수를 키우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혹여라도 선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다.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부터 ‘김성근교 장로’로 통하는 주인욱 삼성서울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김 감독을 “한마디로 못 말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주 교수는 1998년 쌍방울 사령탑을 맡고 있던 김 감독에게 신장암이 발병했던 때를 기억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김 감독의 주치의로 보통 곤욕을 치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단 사장에게도 병명을 속이느라 혼났지만 다른 것보다 암환자가 도무지 암환자 같지 않았다”며 “퇴원을 막는데도 소변주머니를 차고 운동장에 나가 펑고 치는 것을 보고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고 했다. 김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화 선수들 또한 전지훈련을 함께하면서 김 감독을 먼저 퇴근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 발상과 열정, 도전하는 행동
김 감독이 고양 원더스 사령탑이던 몇해 전 어느 날. 김 감독은 경기도 고양의 한 단골 식당 주인의 하소연을 들었다.
“이 일도 오래 하니 하기 싫어지네요.” 그 자리에서 김 감독은 “하기 싫다는 건 그 일에 한계를 느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라며 “난, ‘어제 한 야구를 오늘 또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매일 새 아이템을 갖고 나오면 하는 일이 즐거워질 겁니다”라고 얘기해줬다.
김 감독은 선수들을 곧 새 사업 대상이자 아이템으로 여긴다. 매일 출근길에 ‘새로 만나는 선수를 어떻게 만들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싫증 날 틈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한화 캠프에 야구장에선 보기 힘든 별난 도구들이 등장한 것도 발상의 전환 덕분이다.
스탠스가 너무 넓은 황선일은 노란 박스 안에 들어가 스윙을 하도록 했고, 팔스윙 뒷손이 안으로 감겨버리는 투수들에게는 방망이를 쥐여준 뒤 투구 자세를 반복적으로 취하도록 했다. 손이 감기면 방망이 끝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게 되므로 선수들은 자신의 버릇을 바꿀 수밖에 없다.
김 감독은 매번 ‘또 다른 내일’을 얘기한다. 만족하는 순간, 바로 퇴보할 것이라고 한다. 한 기업 강의에서는 “여러분, 한 해 매출 목표가 100억원인데 혹여 상반기에 달성하면 하반기에는 그냥 놀아도 되느냐. 손놓고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SK 감독 시절 3차례 우승을 일궈내는 동안 ‘독한 야구’를 한다는 평을 들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SK는 1위로 승수를 어느 정도 벌려놔도 멈출 줄 몰랐다. 기업 생리와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 김성근, 한화를 어떻게 만들까
김 감독은 대기업 면접실에서도 면접관을 100% 만족시키는 신입사원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30% 만족시키는 사람과 40%짜리, 50%짜리를 두루 뽑아놓고 베스트로 조직을 만드는 일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했다.
김 감독이 1984년 OB 베어스 사령탑이 된 뒤 올해 한화까지 7번째 프로야구 팀을 맡는 동안 만난 팀도 대부분 그런 모양이었다. 대체로 약팀을 맡았던 탓에 그런 색깔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사실, 어느 팀도 팔방미인형 슈퍼스타는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특기 하나씩을 갖고 있는 선수는 꽤 많다.
김 감독은 그들을 적극 활용한다. 김 감독 야구에 좌완 스페셜리스트와 대타 요원, 대수비 요원 등이 특히 더 주목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 감독은 지난 겨울 한화 캠프에서도 선수들의 특장점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어떤 선수의 20%, 또 다른 선수의 30%를 한데 모아 100% 전력을 만들려는 조합 찾기 과정을 거쳤다. 그는 과거 어느 팀에서든 고된 과정을 거쳐 끝내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냈다. 가을야구 초대권을 한 차례도 쥐지 못한 채 맡은 팀의 지휘봉을 놓은 적은 없다. 김 감독이 맡은 한화의 변신이 기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안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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