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이상서]



2007년 10월 29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 두산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김성근 감독이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힘내. 인생은 한순간에 바뀌기도 하니까.”


연이은 고난에 흐느끼는 신데렐라에게 마법사인 팔레트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후 신데렐라의 인생은 거짓말처럼 달라진다. 동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실제로 우리 인생을 꿈같이 뒤바꿔 놓기도 한다. 프로야구에서도 두 팀이 그랬다. 2007년의 SK와 2015년의 한화다. 마법사의 이름은 당연히 김성근 감독. 야신을 교집합으로 두고 묘하리만치 닮은 두 팀을 비교해 봤다.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일까. 물론, 한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감안했다.


▲야신을 만나기 전



를 만나기 전 5년간의 성적



약체였다. 동네북이었다. 물론 영광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득해져 버린지 오래. 아직 마법에 걸리지 않은 두 팀은 보릿고개를 보내고 있었다.


먼저 2007년의 SK부터 살펴보자. 직전 해의 성적은 60승 65패 승률 0.480으로 페넌트레이스 6위. 팀 타율은 0.254로 전체 5위였으며 팀 평균자책점은 3.80으로 전체 7위에 머물렀다. 시즌 막판까지 4위 KIA를 맹추격 했지만,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힘이 빠졌다. 특히 9월에 주전 포수 박경완과 외국인 선발 투수인 세라노가 부상으로 이탈했던 게 뼈아팠다. SK의 밑에는 비밀번호를 찍어가는 두 팀만 있었을 뿐이다. 88885‘7’7의 롯데와 666‘8’587의 LG가 그들이다. 



조범현 감독 체제 시절의 SK



범위를 5년으로 넓혀보자.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강병철-조범현 체제의 SK는 6위-2위(KS 준우승)-5위-3위-6위의 들쭉날쭉한 그래프를 그렸다. 5년 평균 4.4위, 승률 0.506. 2000년 팀 창단 후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해였던 2003년을 제외한다면 썩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이다. 그러나 2005년 김재현, 2003년 박경완 등 FA 시장에서 꾸준히 선수들을 모아 내실을 다졌다. 또한 채병용, 윤길현, 송은범 등 영건들의 기량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SK의 미래를 기약하기에 충분한 이유다.


2015년의 한화는 어땠을까. 9위다. 꼴찌다. 한화는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2년 동안의 9구단 체제에서 아무에게도 9위 꼴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화의 1년 간의 비극에 대해선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터. 그러나 한화에 부임한 기간 내내 속앓이를 했을 김응용 감독만큼 힘들었던 이가 또 있을까. 그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10회 우승에 빛나는 역대 최고의 명장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2014년 10월 18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김응용 감독은 “나는 지금도 오늘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4월 14일 대전구장서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LG트윈스 경기가 열렸다. 한화 정현석(가운데 삭발)등 선수들이 9회말 마지막 공격을 더그아웃서 지켜보고 있다. 결국 LG에 8-0 패배로 팀 최다인 13연패를 당했다



한화의 5년도 살펴보자. 이런, SK보다 심하다. 2010년부터 8위(꼴찌)-6위-8위(꼴찌)-9위(꼴찌)-9위(꼴찌). 그 사이 세 번의 사령탑이 바뀌었다. 5년 평균 8위에 승률은 0.389. 이 기간 동안 팀 평균자책점 꼴찌를 도맡았다. 한대화-한용덕(대행)-김응용 체제의 마침표는 모두 씁쓸한 퇴장으로 귀결됐다. 이 기간 동안 최고 성적은 2011년의 6위였다. 이것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12년 중도 사퇴한 한대화 당시 감독 체제에서 나온 점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였다. ‘한대화 명장설’의 시작. 한화의 부진엔 선수 유출의 탓이 컸다. 2010년 김태균과 이범호가 일본으로, 2013년엔 류현진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투타의 기둥이 다 뽑혔다. 그러나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추운 법. 이들에게도 새벽은 찾아왔으니…


▲야신을 모시고 오기까지



2006년 10월 인천시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신영철 당시 SK 사장(왼쪽)과 김성근 감독



USA 투데이의 할 보들리 메이저리그 기자는 “감독들은 잘리기 위해 고용된다(Managers are hired to be fired)”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칼럼을 통해 “나갈 때를 알고 스스로 물러난 감독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미국엔 모르겠지만 한국엔 있다. 12번이나 잘린 감독은 4년 여의 야인생활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SK는 2006년 10월 9일 “김성근 감독과 계약기간 2년에 계약금 3억원, 연봉 2억5000만원 등 총 8억원에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8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불펜코치 경험을 쌓은 이만수 수석코치도 함께였다. 이 코치는 “삼성 선수 시절 사령탑으로 모셨던 김성근 감독님을 보좌하게 된 건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김성근 체제의 출범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SK 구단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연고 도시의 시청사에서 김 감독의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감이 컸고, 우승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는 방증이다. 김 감독은 2006년 10월 15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재미있는 야구를 하겠다”라며 “야구 인생을 SK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청사진과 함께 구단도 변화를 시도했다.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문학구장을 관중 친화적으로 진화시켰다.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 1기의 출범이다. 지금은 유명해져버린 바비큐존과 키즈 파크 등이 이때 나왔다. 개장 후 단 한 번도 매진이 된 적 없던 3만여 석의 문학구장이 가득 차는 날도 생겼다. 2007년 5월 26일 이만수 코치의 ‘팬티 퍼포먼스’와 함께.



김성근 감독이 2014년 10월 28일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정승진 한화 이글스 대표이사가 김성근 감독에게 한화 유니폼을 입혀주고 있다. 김 감독은 한화와 3년간 총액 20억원(계약금 5억원, 연봉5억원)에 계약을 채결했다. 한화는 그가 맡게 된 7번째 프로구단이다



한화의 팬도, 구단도 목말랐다. 당연히 성적에 말이다. 특히 ‘보살’ 한화 팬들이 나서 구단 게시판 등에 '김성근 감독 영입'을 큰 목소리로 주장했다. 유망주들이 넘치고 투수진이 허약한 한화에는 기초부터 엄청난 훈련량을 강조하고 투수 조련에 남다른 노하우를 지닌 김성근 감독이 적격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한화가 야신을 품기까지 팬들의 역할이 컸다. 팬들이 제작한 ‘김성근 감독 청원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11만건을 넘겼다. "우리는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보살이라 놀림 받고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훨씬 더 많지만 우리는 또 응원합니다" 팬들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화 그룹 본사 앞에선 1인 시위도 이어졌다.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청원까지 실시했다. 그만큼 김성근 감독을 향한 팬들의 갈증은 심했다.


결국 한화 이글스는 팀의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위해 제10대 감독으로 김성근 감독을 선임하고, 3년간 총액 20억원(계약금 5억원, 연봉 5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김성근 감독은 작년 10월 28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신 한화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성원해 주신 팬들에게도 고맙다. 많은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한화를 명문 구단으로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감독 취임식까지 찾은 80여 명의 부처들은 “당신이기에 행복합니다”라는 글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시범경기도 시작되지 않은 지금, 2015년을 논하는 것은 설레발이 맞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올해 스프링캠프의 승자는 단연 한화였다. 


▲우리에게 오기까지 그는 어디서 무얼했나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의 김성근



철저한 야인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2002년 LG를 한국시리즈에 올려놓고도 경질 당했다. 구단 고위층과 마찰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한국프로야구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야구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으로, 고등학교로, 때로는 부진에 빠진 박찬호의 과외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05년 2월 26일, 김 감독은 짐을 꾸려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뛰고 있던 이승엽을 돕기 위해서다. 1,2군 순회코치 겸 타격 인스트럭터의 자격으로 지바 롯데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일본에 도착해 이승엽을 만난 그는 “특별히 가르칠 것은 없다”면서도 “캠프에서 익힌 것을 실전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부활을 노리는 일본야구 2년차인 이승엽 역시 "경험이 많으신 감독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마음가짐과 일본 투수들의 볼배합 등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야신의 버프’를 받은 이승엽은 국내에서 보여준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30홈런과 82타점을 기록하며 완벽한 부활을 선포했다. 또한 일본시리즈 선발로 출전하며 홈런 3방을 날리는 등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여지없이 과시했다. 지바 롯데가 31년만에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1등 공신은 단연 이승엽이었다. 이승엽은 시즌이 끝난 뒤 “올해 가장 큰 은혜를 주신 분은 김성근 감독님”이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김성근 감독 개인으로서도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설움을 날리는 1년이었다.


역설적으로 한국프로야구 바깥에서의 4년은 김성근 감독을 더욱 성장시켰다. 자신의 자서전(<꼴찌를 일등으로>, 자음과 모음 펴냄)을 통해 밝혔듯 “소탈한 성격의 바비 밸런타인 감독을 통해 새로운 야구를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지바 롯데의 정식코치로 올라선 2006년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것을 낳기 위해선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그걸 열심히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어렵고 엄한 환경 속에 던져라. 그게 새로운 발견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화염에 추락한 뒤 흰색의 간달프로 레벨업해 돌아온 영화 <반지의 제왕>의 마법사처럼, 김성근은 한층 성장해 한국프로야구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소환한 팀은 SK 와이번스였다. 



독립구단 고양원더스의 마무리훈련이 2012년 11월 19일 서귀포 강창학구장에서 열렸다. 김성근 감독이 외야 펑고를 쳐주고있다



“프로에 가는 꿈을 꿔라.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더라도 전력투구해라. 나중에 인생을 한참 지나고 보면 절실한 상황에서 전력투구했던 때가 그리울 것이다. 너희들은 바로 지금. 그 순간에 있다”


4년 만에 야신으로 돌아왔지만 4년 만에 다시 야인(野人)이 됐다. 야인은 또 다른 야인들을 만나 팀을 출범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다. 위의 대사는 김성근 감독이 훈련이 끝나고 여는 강의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원더스의 선수도, 감독도 전력투구 했다. 2012년 출범부터 2014년 구단 문을 닫을 때까지 30여 명의 원더스 출신 선수들은 프로에 진출했다. 낙오자들을 모아놓은 원더스는 프로 2군과의 교류전에서 3년간 90승 25무 79패에 5할이 넘는 승률을 남겼다.


그 사이 프로구단의 러브콜도 계속 됐다. 한화는 2012년 중도 퇴진한 한대화 감독의 후임으로 김성근 감독의 영입을 시도 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원더스와 2년 재계약을 택했다. 한화가 한대화 전 감독을 시즌 중 해임하는 걸 보고 프로 복귀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이제 프로구단행 가능성은 사라졌다”며 원더스에 전념할 것임을 내비쳤다. 이어 2014년 5월엔 LG가 다가왔다. 김기태 감독의 중도 사퇴로 공석인 된 사령탑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백순길 LG 단장은 직접 김성근 감독을 만나 영입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김기태 감독은 내 제자다. 시즌이 끝나고 갈 수는 있지만 지금 옮기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다.


원더스의 질주는 3년 만에 멈췄다. KBO와 좁혀지지 않은 이견 차이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성장했다. 김성근 감독은 2014년 9월 11일 해단을 알리는 선수단 미팅에서 "나도 원더스에서 지도자로, 인간 김성근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감독 물량이 유달리 부족했던 2014년 말, FA 시장에 나온 그를 탐하는 구단은 많았다. 손을 잡은 구단은 하나였다. 어쩌면 그가 지금껏 거쳐왔던 팀과 비슷한 면이 많은 21세기 최약체 야구단, 한화 이글스였다. 


▲스프링캠프 키워드 2, 무한경쟁-지옥훈련




(위)2007년 SK의 일본 고치 스프링캠프, (아래)2015년 한화의 고치 스프링캠프



2007년 SK의 당시 주축 선수들은 김재현-박재홍-이호준 등의 베테랑이었다. 2군 출신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김 감독을 향해 고참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이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심지어 ‘전력의 반’인 박경완마저 철밥통이 아니었다. 정근우, 최정, 정상호, 박재상 등 언제든 베테랑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신예들이 호시탐탐 주전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경쟁자 위치에 있던 건 아니었다. 2006년 10월 31일 제주도에서 첫 훈련을 시작했을 때 이만수 당시 수석 코치는 "앞이 캄캄했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너무 왜소했고 기량도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기량을 끌어올린 비결은 강훈이다. 제주도와 일본 전지훈련에서 바로 지옥훈련이 시작됐다. 


김성근 감독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 먹을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훈련을 이어갔다. 끝내 성에 차지 않으면 말 한마디 없이 선수들을 남겨둔 채 훈련장을 나왔다. 주전 유격수 이대수는 '근성이 부족하다'며 바로 2군 캠프로 내쳤고, 외야수 이진영도 쉬는 날 2군에 보내 경기를 뛰게 했다. 그 결과 SK는 포지션별로 2명 이상이 대등하게 주전 경합을 벌일 정도로 알찬 팀이 됐다. 팀 내 최고액 연봉자(4억원)인 박재홍도 주전을 꿰차지 못했다. 비로 경기가 취소된 어느 날, 혼자 훈련장에 남아 운동기구와 씨름하는 모습은 예전의 박재홍에게선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김 감독은 "아직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계를 넘어선 훈련은 자신감을 가져온다. 2007년 1월 4일 8개 구단 사령탑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어느 팀이 제일 강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김성근 감독은 “현재는 우리가 제일 강하다. 연습을 많이 해서”라고 말했다.


2015년의 한화도 그들 못지 않게 힘들었다. 야구팬이라면 한화의 연관 검색어인 지옥캠프, 강훈 등은 지겹게 들어 봤을 게다. 장소는 같다. 일본의 고치현이다. SK와 원더스 선수들의 땀이 밴 그곳이다. 김 감독은 "SK 감독 시절부터 고치에서 땀을 흘렸다. SK가 3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고치현의 배려 덕분에 SK는 강한 팀이 되었고, 이제는 한화가 그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겨울 내내 한화는 뒹굴고 쓰러졌다. 빨리 시즌이 시작되길 바랄 정도로. 그들에게 무서운 소식 한 가지. 한화의 스프링캠프는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다.


▲그리고 정근우



2006년의 정근우, 2014년의 정근우. 시간은 모두 겨울, 장소는 모두 스프링캠프



2007년의 SKVS2015년의 한화. 교집합엔 김성근 감독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 정근우다. 2013 WBC 당시 화제가 된 사도스키 리포트에서는 그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 “김성근 감독의 수제자. 한국에서 가장 근성이 강한 선수” 오랜 사제지간이라 쿵짝이 잘 맞았다. 정근우는 가족여행을 ‘알아서’ 취소하고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다. 3년 만에 보스를 만난 그는 “여전히 (김성근) 감독님의 훈련은 힘들다”면서도 “몇 년동안 해보지 않아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서른세 살의 정근우는 성숙해졌다. 스물 여섯의 그때와는 달랐다. "SK시절 캠프 때에는 내가 감독님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라'는 제일 많이 들었다. 어렸을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던 것 같다. 지금은 훈련을 하면서도 생각을 많이 하고 보는 눈도 넓어졌다. 김성근 감독님을 다시 만난 것이 내 야구인생에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다" 물론 그 사이 훈련도 더 독해졌다. "SK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훈련 스케줄이 너무 타이트하다!"


정근우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 한 2007년부터 2011년까지만 5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준우승을 차지한 2009년이 압권이었다. 이때 기록한 168안타, 53 도루, 9 홈런, 59 타점, 98 득점, 출루율 0.483 등의 성적표는 생애 최고 성적이었다. 리그에 정평이 난 수비를 바탕으로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따냈다. 이 사이 우승 3번과 준우승 1번을 합작해냈다. 정근우는 프로 경력에서 유일한 우승의 달콤함을 이때 맛봤다. 


2001년 부산고를 졸업한 정근우는 그 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했다. 172cm라는 작은 신장이 이유였다. 김태균, 이대호, 추신수, 정상호 등 자신의 동기생들의 화려한 출발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4년을 더 고려대에서 갈고 닦았다. 2005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프로에 입단했다. SK였다. 이듬해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다시 1년 뒤 김성근 감독을 만났고 첫 우승도 했다. 국가대표에도 뽑혀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 정근우는 일본 고치의 한화캠프에서 “우리 팀이 우승하면 (김)태균이와 울 것 같다”고 말했다. 2007년 SK에서 첫 우승 당시 물기 하나 없는 웃음을 보여주었던 그 였음에도. 정근우의 생각대로 이번엔 눈물을 볼 수 있을까. 자신의 네 번째 우승, 팀의 두 번째 우승의 중심에서 다시 만난 스승과 함께 말이다. 김성근 감독은 2017년까지 한화에 머문다.



2007년 10월 29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SK 정근우가 팬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id=241&aid=0002336729&redirect=true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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