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감독님은 숫자로 쓰고, 코치들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그러다보니 서로 헷갈릴 때가 있어요.”
사람이나 사물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숫자를 빨리 머리 속에 넣어두는 이가 있는 반면 형태나 이미지로 먼저 생각하고 떠올리는 이가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넷인 김성근 한화 감독은 아직 숫자로 기억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주장한다.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의 훈련 일정을 짜거나, 출전 선수를 통보할 때 꼭 숫자로 한다.
김성근 한화 감독은 선수의 이름보다 숫자를 선호한다. 아주 오랜 습관이다.
큰 틀에서 김 감독의 지시를 받고난 뒤 코치들은 투수조, 타자조, 수비조로 나눠 훈련 시간과 장소를 배분한다. 김 감독은 여기에다 그 때 그 때 ‘특훈’ 참가자들을 통보한다. ‘몇 번 몇 번을 전체 훈련이 끝난 뒤 따로 타격 훈련을 시키라거나, 몇 번 몇 번을 보조 구장에서 수비 훈련을 더 시키라’는 식의 지시한다.
순간 코치들은 깜짝 놀라기 일쑤다. 몇 번이 누구더라. 그런 코치들도 환갑을 훌쩍 넘겼거나 환갑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한화 선수단의 일정표를 보면 마치 ‘난수표’를 보는 듯 하다. 선수 이름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온통 숫자 뿐이다.
김성근 감독은 지난 15일 마산 NC전에 앞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전 9시부터 2시간여 동안 용마고에서 진행한 특별 타격훈련 참가 선수에 김태균이 포함된 것은 ‘착각이었다’고 털어놨다. “원래 62번인 오준혁이 대상이었는데 52번으로 잘못 지시하는 바람에 김태균이 따로 타격 훈련을 더 하게 됐다”고 밝혔다.
야구 선수의 등번호는 ‘1’부터 ‘99’ 또는 ‘100’ 이상까지 순서대로 쓰이지 않는다. 저마다 좋아하는 숫자를 선택해 이름과 함께 사용한다. 이름 없이 숫자로만 선수를 기억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하물며 칠순을 넘긴 노인에게는.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숫자 쓰기’를 고집한다. 이 역시 아주 오래 된 습관이다.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성근 감독은 철두철미하다. 지금도 더그아웃에 앉아 뭔가 열심히 쓴다. 경기 중에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상황을 일일이 메모하고, 숫자로 표기한다. 그리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아마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이름을 달지 않았다. 그저 번호만 붙이고 경기에 집중했다. 일본 아마 야구는 이런 전통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어느 날 프로가 생기고, 프로 선수들이 등 번호 위에 이름을 쓰자 아마 선수들도 흉내를 냈다. 번호와 이름을 함께 붙이기 시작했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다.
김성근 감독은 일본에서 고교 생활을 끝낸 뒤 현해탄을 건너와 실업 야구에서 활약했다. 국가대표로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위를 선양했다. 기업은행의 선수로서 인기도 누렸다. 선수 생활을 오래하지 않았다.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됐다. 1969년 마산상고(현 용마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뒤 1972년부터 기업은행의 감독을 맡았고, 그 후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충암고와 신일고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김 감독에겐 선수 이름보다 번호가 더 익숙하다. 숫자는 편견을 배제한다. 선입견을 갖지 못하게 한다. 허명(虛名)에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이름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쫓지 않고 오직 기량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물론 ‘고희(古稀)를 넘긴’ 김 감독이 '김태균이나 정근우, 배영수'라는 스타급 선수들의 이름과 경력에 영향을 받을 지도자는 아니다.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치고, 가슴 속 열정이 가득하고, 장내 장외에서 야구만을 생각하고 생활하는 진정한 프로다.
야구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대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 그런데도 한번 더, '편견을 경계한다'며 ‘번호 쓰기’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코치나 선수들과 ‘소통 장애’를 겪더라도 변치 않을 고집이다. <뉴스1스포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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