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기고글

 

 

[타자와 투수의 치열한 두뇌싸움]


찰나의 시간에 물리학 법칙을 적용해 공을 정확히 쳐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야구의 매력은 타자가 이를 극복하고 친다는 데 있다. 소숫점으로 표현해야 하는 순간적인 시간 사이에 투수와 타자의 묘한 심리와 기교가 흐르는 맞섬의 양상은 달라진다.

위기에 처한 투수가 일부러 위험하다는 가운데 직구를 던져 타자와 승부할 때가 있다. 헛스윙으로 삼진을 잡으면 자기구위, 다시 말해서 스피드와 힘으로 이겼다는 쾌감을, 또 보내기 삼진으로 잡으면 타자가 기다리고 있던 구질과는 반대의 공 배합으로 이겼다는 두뇌 싸움 승리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수읽기가 높은 수준에 오를수록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부분 투 스트라이크 후에는 가운데 직구보다는 바깥쪽 낮은 직구나 몸쪽 낮은 직구 아니면 변화구가 들어올거라고 생각하며 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가운데 직구가 오면 놀라는 법이다. 물론 생각없이 방망이를 치는 타자들한테는 위험천만이다.

 


[공배합 속에 담겨진 의미]

 

투수와 포수의 공배합에는 몇 가지 기본은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전타석의 공배합을 참고로 한 공배합, 직구나 변화구 등의 동일 구질을 계속 던져 타자의 생각과 반대로 가는 방법(SK 박경완이 이런 경우가 많다), 직구와 변화구를 섞어서 완급을 조절하며 승부하는 공배합, 그날 투수의 좋은 공을 중심으로 하는 방법, 자기 주무기를 타자에게 의식시켜 역으로 다른 공으로 범타시키는 방법, 마지막으로 몇 구째 무슨 구질로 승부한다는 것을 전제로 마지막 승부구를 결정하고 그 승부구를 살리기 위해 1, 2구를 던지는 역산법 등이 있다.

역산법의 예를 들면 4구째 바깥쪽 슬라이더를 승부구로 던진다고 했을 때 초구는 외곽 낮은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아 볼 카운트 1-0으로 유리하게 시작하고, 2구째는 몸 쪽 직구로 파울을 유도하거나 스트라이크를 잡아 2-0으로 만든 다음, 3구째는 몸쪽 높은 볼 직구를 던져 타자를 위협해 2-1, 마지막 4구째는 외곽 낮게 스트라이크에서 볼이 되는 슬라이더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수가 있다.

 

이때 타자는 초구였던 바깥쪽 직구 스트라이크가 머릿 속에 남아 있어 직구와 비슷하게 들어왔다가 변화하는 슬라이더를 스트라이크로 착각해 방망이가 나가기 쉬운 법이다. 또 3구째 몸쪽 높은 공은 대각선 쪽으로 볼 때 거리감이 느껴져 시선이 흔들리게도 된다.

 

이렇게 공 하나하나에 다 뜻이 있는 것이다. 투수는 빠른 직구에 낭만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언제나 빠른 공을 던지려고 해 핀치가 되면 될수록 힘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직구 스피드는 투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빠른 공을 살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변화구다.

 

빠른 공은 치기 힘들고 느린 공은 때리기 좋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타자의 눈을 어떻게 착각 속에 유도하느냐는 투수와 타자의 승부의 원점으로, 135킬로미터의 느린 직구를 위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투수가 있고, 145킬로미터가 넘는 빠른 직구를 던져도 간단하게 얻어 맞는 투수가 있는 것은 사람의 눈이라는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135킬로미터 느린 직구를 던진 투수가 90~100킬로미터의 변화구를 던지면 타자는 이 변화구의 스피드에 눈과 몸을 맞춰 타이밍을 잡기 때문에 30~40킬로미터 빨라진 135킬로미터의 느린 지구가 150킬로미터대의 빠른 속도로 느껴지는 착각에 빠져 스윙이 늦어지는 법이다. 이것이 완급투구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타이밍에 승부를 건 타자와 투수]


투수는 타자의 타이밍을 무너뜨려서 범타를 유도하려고 하고, 타자는 어떻게 해서든 투수의 공에 타이밍을 맞춰 치려고 타석에 들어가는 등 서로 자기 능력을 총동원해서 대처하게 된다. 

 

타자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와 투수의 투구 동작이 시작될 때부터 마음속에서 그린 몸동작을 가지고 투수와의 타이밍을 잡아가야 되는 법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타이밍은 방망이의 중심에 맞추느냐 빗나가게 하느냐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84~86센티미터 길이의 방망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방망이의 중심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10센티미터 안팎이다. 방망이 중심에서 빗나가면 타구의 스피드가 떨어지고 멀리 나가지 않아 야수에게 잡히는 범타가 된다. 반대로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맞으면 타구에 스피드가 생겨 비거리가 길어지고 야수 사이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 안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투수는 변화구를 섞어 완급조절을 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을 필요가 있고 타자는 마지막까지 공을 보고 때려야 하는 필요성이 있는 거다. 요즘 투수는 포크볼, 체인지업, 투심 패스트볼, 싱커, 슬라이더, 커브 등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기 때문에 타자들이 자기 몸 가까이까지 공을 당겨서 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때린 타구에 자기 발이 맞는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타자들의 스윙폭이 컸던 2001년도 까지는 투수들이 140킬로미터대 후반의 빠른 공만 있으면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2002년도부터는 타자들의 스윙폭이 전체적으로 작아지면서 빠른 직구에 강해져 변화구 구사 능력이 부족한 투수는 제 몫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올해 각 팀의 마무리 투수들이 실패하고 있는 원인 중 하나도 변화구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안이한 자세로 시즌을 맞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확률에 의거한 야구의 재미]


타자들한테는 각기 헛스윙 존, 범타 존, 장타 존, 안타 존 , 파울 존이 있다. 일본으로 간 이승엽의 경우,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가운데에서 약간 바깥의 허리 높이가 장타 존이고, 몸쪽 무릎높이는 보내기 존(손이 나가지 않는 존)이고, 가운데 낮은 스트라이크 높이에서 볼이 되는 변화구는 헛스윙 존, 몸 쪽으로 바짝 붙은 높은 공은 플라이 존이다.

 

이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투수로서는 대체로 몸 쪽으로 던지면 안전하다. 단, 이승엽이 싫어하는 몸쪽 존을 의식해서 타석에서 평상시보다 스파이크 반 개에서 하나, 1루 벤치 쪽으로 물러나 섰을 때는 장타 존이 범타 존이 되고, 보내기 존이 된다. 외곽 좋아하는 존이 투수를 중심으로 한 유격수 쪽 땅볼이 많아진다.

 

현재 일본에서 포크볼 체인지업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이승엽의 헛스윙 존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 쪽 공을 의식해서 좋아하는 바깥쪽 직구를 그냥 보내거나 잡아당겨 내야구가 될 때가 많다. 이승엽은 투수의 실투를 확실하게 때려내는 기술을 갖고 있기는 하나 요즘에는 타석에서 너무 신경 쓰는 바람에 투수의 실투를 놓치거나 집중력이 떨어져 파울 팁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56개 홈런 신기록을 세운 지난해에도 5월 초까지 그리고 9월 들어서도 투수의 실투를 놓칠 때가 많았다. 타자로서는 이거다 싶은 공을 제대로 때리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안정을 잃어 슬럼프에 빠지게 마련인데, 이승엽 정도 되는 타자도 1년에 몇 번씩 이런 현상을 보인다. 그만큼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과거의 성적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중심으로 지금의 컨디션, 게임 상황을 보고 일 구 일 구 많은 생각 속에 플레이를 해야되는 법이다.

 

원래 투수와 타자는 너구리와 여우의 싸움과 같이 서로 상대의 역을 지르려는 끝없는 심리전을 펼친다. 매 순간마다 타자의 컨디션, 피처의 볼, 게임의 상황 등 변수가 많아 이것이 베스트라고 하는 방정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야구는 두뇌 싸움이다. 그것도 기억력 싸움이다. 타자는 기술3, 두뇌 7의 비율, 투수는 5대 5의 비율이 시합 때 적정 비율이 아닌가 싶다


 

 

글을 쓴 김성근 감독은 대표적인 지장에 속하는 감독으로 일본의 데이터 야구를 국내에 보급시킨 장본인이다. 국내 프로야구 구단에서 두루 감독을 역임하며 불같은 승부 근성으로 다양한 용병술을 보였던 그는 야구 9단이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이 시대 최고의 야인답게 현재는 프로야구 무대에서 잠시 물러나 있다.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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