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프로야구는 680만 관중을 기록하며 흥행에 대성공했다. 운집한 팬들은 참신하고 톡톡 튀는 응원으로 경기에 재미를 더했다. 그 중에서도 창의적인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는 해설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물론 관중과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팬들은 독창적인 생각을 플래카드로 표현했고 이는 야구팬들의 대표적인 응원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올 시즌 흥행 이면에는 각종 사건들도 있었다. 스캔들을 비롯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청문회(?),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 감독교체 등등. 그 중에서도 SK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 경질과 이만수 감독 선임 과정은 시즌이 끝나는 순간까지 문제였다. 매끄럽지 못한 교체 작업에 팬들은 의아해 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SK팬들은 시합이 끝난 후 경기장에 난입해 ‘불타는 그라운드’를 몸소 실천했다.
이후에는 플래카드가 전면으로 나왔다. 보통의 플래카드는 신조어와 사투리, 인터넷용어 등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선수들에게 사랑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한다. 하지만 화가 난 SK팬들의 플래카드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표현도 응원의 메시지도 없었다. 반대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된 딱딱한 표현과 비판과 질타의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천야구에 근조를 고한 엄숙한 플래카드서부터 구단에 대한 거친 표현이 적힌 것까지, 표현의 수위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높았다.
이와 같은 플래카드의 범람은 팬들의 분노가 그 주된 원인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억누르고자한 구단의 억압이 부채질한 측면이 있다.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기 약 한 달 전인 7월 27일 홈페이지 내 게시판인 ‘용틀임마당’을 폐쇄하며 팬들과의 소통수단을 대폭 차단한 상태였다. 팬들은 그 흔한 인터넷을 통한 의사표현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은 SK팬들은 시즌 말까지 꾸준하게 외야 한 켠에 플래카드를 걸었다. 이는 어쩌면 SK팬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구단은 이마저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구단 측 경호원들은 구단의 눈에 거슬리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힘으로 제거하느라 팬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팬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구단은 더 이상 그들을 팬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팬들을 사진 찍었고 경호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부는 야구장을 떠나 경찰서로 가야했다. 물론 그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가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있다. 팬들이 구단 내부 사정을 완벽하게 알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단이 했어야 할 일은 오해한 팬들의 무지를 무시하고 짓밟는 게 아니라 오해를 풀기 위한 소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SK구단과 심지어 선수들조차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선수단은 되레 응석 부리기에 바빴다. 시기는 한창 2위 싸움을 펼치고 있을 9월 초. 팬들의 목소리는 점점 거세졌고 주말을 맞아 플래카드의 수는 10여 개에 달했다. 이에 선수단은 이례적으로 이것을 안건으로 경기 전에 ‘미팅’을 가졌다. 선수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팬들이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것. 그럴 수 있다. 선수들에게 플래카드는 항상 달콤하고 힘이 되는 비타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뒤통수에서 독설이 날아오니 생경할 법도 하다. 하지만 선수단의 이런 목소리가 기사를 통해 보도가 됐다는 점은 응석부리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선수단도 인간인지라 관중들의 지나친 욕설과 모독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에 영향을 받아서 선수가 경기를 못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프로선수의 모습으로 보기 힘들다.
이런 모습은 시즌이 마지막을 향해 치닫던 9월 30일 삼성전에 다시 나타났다. 당시 문학구장의 외야 좌측 관중석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심판진이 팬들에게 플래카드를 내려줄 것을 설득하는 동안 SK선수들은 캐치볼을 하기는커녕 덕아웃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경기를 할 수 없다는 제스쳐였다. 그리고 15분 후 플래카드가 내려가자 그제서야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단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등에 두고는 경기를 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뉴욕 양키즈의 간판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마돈나 사진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관중들을 보고는 기분 나빠서 경기 못하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다. (물론 A.Rod는 그러지 않았다.)
해설진과 심판의 말과 행동에도 어폐가 있었다. 문제점으로 공히 지적한 부분은 경기진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시간을 시즌 초 4월 14일로 돌려보자. 장소는 잠실구장. LG와 삼성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외야 우측 관중석에는 LG전자의 홍보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적힌 ‘흰 바탕’의 광고홍보물이 걸렸다. 당시에는 심판이나 해설자 그 누구도 이를 두고 경기에 방해가 된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기업의 홍보를 위한 플래카드는 괜찮고 구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허용할 수 없다는 말인가. 구장마다 영향을 주는 범위와 조건이 다르다 하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선수단이 팬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부탁할 수는 있다. 그리고 다수의 팬들은 당연히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팬들의 비판과 지적을 막을 권리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정상적인 소통의 과정을 통해 풀어 가면 될 일이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 팬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가지고 경기를 하네 못하네 응석부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팬이라는 집단은 균질한 개인의 집합이 아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섞여있고 그 집단을 팬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소한 비판이나 말 하나 하나가 부담스러워 경기를 못하겠다면 찾는 관중 하나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야구만 하면 될 일이다.
구단, 선수, 방송을 포함해 어느 한 주체도 팬들의 오해를 풀어주거나 소통을 위한 중개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모두 팬들의 표현방식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과도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30년 프로야구 역사를 뒤돌아 봤을 때, 이제까지의 ‘과격’했던 -버스를 불태우고, 소주병을 투척했던- 팬들과 2011년의 SK팬들의 의사표현 방식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만큼 팬들은 성숙했고 SK팬들은 ‘불타는 그라운드’ 이후 정돈된 모습으로 소통을 갈구했다. 이에 대한 구단과 선수단의 반응은 여전히 아쉽다. 구단과 선수단은 ‘플래카드? 네 멋대로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의견이 다른 국민들을 향해 ‘외부세력’ 운운하며 물대포를 쏘는 경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PS) 최근 한 구단이 또 인터넷 게시판을 폐쇄했다고 한다. 소통의 장을 없애고 억압한다고 해서 팬들의 목소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풍선효과처럼 한 쪽을 누르면 되레 다른 쪽으로 다시 나오게 되어 있다. 풍선이 터지기 전에 구단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인터넷 게시판 하나 관리하지 못하면서 야구단이라는 복잡한 조직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
<야구라> 이응수 flight303@gmail.com
출처 :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1012n03859?mid=s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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