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8
SK 구단이 김성근 감독을 '해고'했다. 전격적이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김성근 감독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섭섭할 것 없다. 각본대로 갔다"는 짤막한 소회로 5년여의 SK 생활을 정리했다. 침묵에 빠진 선수들은 당일 인터뷰를 아예 않겠다고 선언했고, 최고의 명장을 잃은 팬들의 비통함이 야구 커뮤니티 전체를 적시고 있다.
김성근 감독의 해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남긴 '위대한 성적'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SK가 지난 4년 동안 3번이나 우승하지 못했더라면 올 시즌 역시 우승에 도전하고 있는 감독을 이처럼 순위 싸움의 막판에서 쉽게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SK를 진정한 강자로 만들어 놓았고, 이젠 그 강자가 드리운 횡포에 떠밀려 옷을 벗게 됐다.
▲ 이제 더이상 김성근의 SK 왕조는 없다. 김성근이 만들어낸 SK의 빛나던 시절은 기록으로만 남게 됐다.ⓒ연합뉴스
김성근 감독이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빚고 있단 얘기는 시즌 전부터 프로야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라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룻밤 사이에 '야인'이 되어버린 김 감독이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또 애써 삼키는 모습은 곪아있던 상처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징표라 할 것이다.
물론, 김성근의 야구가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건 '비즈니스의 문제'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고'에 앞서 김 감독은 "구단만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독도 구단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김 감독의 이 말에 구단 수뇌부는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임명권은 물론 해임권도 갖고 있다고 믿는 구단 수뇌부 입장에선 한낱 '을'에 불과한 감독이 '갑'을 선택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괘씸죄'인 셈인데, 보통 '괘씸죄'는 비즈니스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갑'을 선택할 수 있는 '슈퍼 을'이 분명하다. 그가 걸어온 길이, 그가 거뒀던 성적이, 그가 갖고 있는 철학이 그걸 증명해왔다. 김성근 감독은 이번 해고를 '열두 번째 해고'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앞선 열한 번에서 모두 재고용됐다. 그는 여전히 강력히 필요한 존재다.
구단과 김성근 감독의 갈등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는 당사자들 외엔 알기 힘들겠지만, 결정적으로 드러난 정황은 있다. 이른바 '김성근 사단'이라고 불리는 주요 코칭스태프들의 보직 보장 문제에 대해 구단과 김 감독은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단 측은 ' 김성근 사단'의 축소를 압박했고, 김 감독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문이 든다. 실제 SK의 코치진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투수 코치, 배터리 코치, 타격 코치가 모두 일본인이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코디네이션 코치'라는 이름의 코치들도 있다. '코디네이션 코치'는 다른 팀엔 없는 보직으로 김성근 감독의 아들로 SK의 전력분석팀에서 활동했던 김정준 코치와 역시 전력분석원 이었던 노석기 코치가 있다.
구단은 아마도 주요 스태프가 모두 일본인인 것과 다른 팀에 없는 '코디네이션 코치'의 존재를 문제 삼았던 것으로 보이고, 김성근 감독은 이를 자신을 흔드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 같다. 김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구단이 코칭스태프를 이유로 자신을 흔들고 있단 뉘앙스의 얘기를 했다. 김 감독은 이걸 서운함의 문제를 넘어 구단이 그간 자신이 이루어 놓은 성과 자체를 폄훼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성근 사단'은 김성근 야구를 가능케 한 실체이자 바탕 그 자체였다. 다른 팀들에게 SK의 불펜은 흡사 '강철로 빚어놓은 것 같다'는 공포감을 심은 데는 가토 코치의 역할이 컸다. 진심으로 김 감독을 존경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가토 코치는 SK 투수진 전체를 언제나 연투가 가능한 집단으로 개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토 코치 부임 후 SK 투수진이 언제나 리그 최강이었다. 슈퍼스타는 없지만 리그에서 가장 능수능란한 타선을 가꾼 것도 그야말로 적재적소에서 역할을 해내는 배터리를 만든 것도 이른바 '김성근 사단'의 힘이었고, 이는 SK의 우승으로 확인됐다.
전력분석의 경우에는 더 높이 살만하다. 김성근 감독이 '야신'으로 불리게 된 밑바탕의 자료를 만든 것이 바로 SK의 전력 분석팀 이었다. SK가 언제나 다른 팀 보다 '노림수'와 '수비 시프트' 등에서 적중률 높은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모든 것을 데이터화 한 전력 분석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야구인은 "SK의 전력 분석 수준은 일본에서 벤치마킹 할 정도"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올 시즌부터 전력 분석원의 분석 내용이 덕 아웃으로 전달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러면서 전력 분석원이었던 이들이 덕 아웃에 앉을 수 있는 정식 코치가 된 것이었다. 이걸 부정한다는 건 김성근의 야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김 감독이 '시나리오가 있다'고 표현한 것에 수긍이 간다. 4년간 3번이나 우승컵을 안긴 이유가 됐던 것들에 대해 구단이 부정적인 상황을 어떤 감독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그 과정에 이만수 신임감독이 끼워있다곤 하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SK의 야구를 '감독의 야구'라고 평한다. SK에서 김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다. 지금 SK 라인업의 대부분은 김성근 체제에서 야구를 다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들이다. 신예들도 그렇고 노장들도 그렇다. 전반기 SK 고공질주의 주요한 동력이었던 임훈도, 후반기 '난세의 영웅'이 된 안치용도 김성근 감독이 아니었다면 빛을 볼 수 있었을까 싶은 선수들이다.
김성근 감독 이후에 SK에 남겨진 것은 40경기 그리고 그 이후에 포스트시즌만이 아니다. 지금 SK가 기록하고 있는 승률과 남겨진 경기를 보건데 SK가 올 시즌 급격히 추락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다만, SK의 빛나는 왕조는 이제 마감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승리를 향한 집요한 의지만으로 다른 모든 것을 덮어버리던 명장의 시대가 그저 '협잡'에 능한 몇몇의 결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려졌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이 애통한 일이다.
▲ 이만수 신임 SK감독이 취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연합뉴스
신임 이만수 감독은 "우선, 선수들의 마음을 수습하겠다"는 취임의 변을 밝혔다.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의 취임 일성이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란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맞고자 5년을 묵묵히 코치로 복무한 것이 아닐텐데, 모든 비난을 맞게 될 그도 안타까운 처지가 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깃발은 누구나 들 수 있지만 깃발을 든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와 깃발 아래 모여 있는 이들의 미래까지를 두루 고민하는 것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리더십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성근 시대의 종말, 팬들은 바로 그 리더십을 잃었다.
출처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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