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이종남기자 1995년 기사
1988년 8월2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그리스에서 채화한 성화가 제주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OB 김성근 감독은 부산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박용민단장과 마주앉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침통함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당신 떠나기로 했다며? 신문보고 알았어."
"신문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경이사한테서 보고받았을 텐데요."
"……음. 떠나기로 했으면 누구누구 데려갈 텐가?"
"제가 데려가면 안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무도 없어. 괜찮아.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아무나 다 데려가. 아무나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감독이 떠나겠다는 말을 공식으로 하라는 것은 김독과 프런트의 싸움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선수들을 더이상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죠.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를 마친 박용민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숍을 떠났다. 김성근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박용민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신문에 난 기사란 그날 아침 스포츠전문지에 [김성근 "재계약포기"선언]이라는 것이었다.
『김성근감독이 OB를 떠난다. 프로야구 원년(82년)부터 투수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간 OB에 몸담고 있는 김성근감독은 26일 "시즌을 마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나서 새로운 진로를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김성근감독은 24, 25일 양일간 경창호구단이사와 만나 계약만료(11월30일)후 재계약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전하고 퇴임후의 투수진 강화와 코칭스태프 정비에 대한 조언을 했다.
OB 박용민 단장은 "김감독의 거취는 전적으로 감감독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전제, "굳이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구단주 협정사항에 따르면 감독 또는 코치는 계약이 만료되더라도 전소속구단의 동의없이는 1년간 타구단과 계약할 수 없도록 돼 있으나 OB는 김감독의 발길을 묶지 않을 것임을 공언했다.
김성근감독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교섭을 해오는 구단은 여러 군데 있다. 그러나 아직 시즌중이고 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아 최종결정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구계에서는 김감독의 진로가 태평양이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7년간 몸담아온 OB에서 떠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박용곤구단주에 대한 보답"이라며 "떠난다는 마음을 굳히고 나서도 그동안 무성의하게 게임을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마무리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OB는 25일 해태와의 더블헤더에서 1패를 추가함에 따라 21승2무19패를 기록, 계산상 플레이오프 진출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변색해버린 상태다.
박용민단장은 "당분간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감독’을 우리는 만들려고 했으나 구단방침과 김성근감독이 부합되지 않아 결별하게 된 것이 서운하다"고 말했다.
OB는 김성근감독과의 결별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임감독을 물색하고 있다. (하략)』
이 기사에는 박용민단장이 "구단방침과 김성근감독이 부합되지 않아 결별하게 된 것이 서운하다"는 발언이 인용돼 있다. 그렇다면 박단장이 김성근감독의 퇴진의사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도 김감독을 만나자 ‘전혀 모르고 있다가 신문을 보고 알게 돼 깜짝 놀랐다’는 식으로 대했다. 김성근은 박단장의 이런 어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사직구장에서 치를 예정이던 롯데전은 비로 취소됐다. 김감독은 그날 오후 선수단숙소인 플라자호텔의 2층 연회실에서 미팅을 갖고 선수들에게 감독사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것이니까 서로 악감정은 갖지 않기로 하자. 그동안 열심히 해줘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내가 있는 날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김감독이 침통한 목소리로 이임사를 하자 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OB 초대감독인 김영덕이 구단을 떠나며 고별사를 했던 바로 장소이기도 했다.
김 감독은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당부했으나 이미 선수단분위기는 ‘부부가 이혼하려는 집안의 애들’처럼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해져 있었다. 의욕마저 잃은 OB는 이튿날[28일]더블헤더 1차전에서 김용철, 유두열에게 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한게임에 만루홈런을 두개나 얻어맞고 11:7로 패하는 등 9연패에 빠지고 말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95년으로부터 불과 7년전에 있었던 김성근의 OB감독 사임은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어가노라면 그 7년이라는 세월에 너무나 많은 변화가 묻혀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김성근감독은 OB를 떠난 후 7년사이 태평양, 삼성감독, 해태 2군감독을 거쳐 96즌부터는 쌍방울을 지휘하게 된다. 전체 8개구단중 절반 이상의 팀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여기서 그의 성격과 능력을 더듬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감독의 자리옮기기는 ‘회전목마타기’처럼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김성근의 OB감독 사임에는 너무나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그것이 감독신분의 전환점이었다는 관점에서 그때 일들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김성근감독의 사임은 충분히 예견돼온 것이었지만 막상 시즌도중에 그의 입에서 공식사임 발표가 나오자 구단관계자들은 ‘올 것이 왔구나’하면서도 강한 충격을 느꼈다. 김응룡감독이 83년부터 해태감독 자리를 꾸준히 지켜나오고 있었지만 프로원년멤버로서 한 구단에 눌러 있던 코치나 감독은 김성근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김응룡감독이 10년도 훨씬 넘겨 13년째 해태구단의 터주대감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해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우리나라에도 재임기간 10년을 넘기는 감독이 나올까"하는 물음에 김성근과 OB 말고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감독이나 구단은 없었다. 10년재임이라는 것은 그만큼 명예로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김성근이야말로 10년을 채울 유일한 후보자로 꼽혔기 때문이다.
그가 OB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88시즌을 맞기 전부터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단행되지는 않으리라는 예측도 만만치 않았다. 김성근 역시 10년재임의 ‘명예’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계약감독에게는 비록 재계약금을 주지 않는다는 구단주 합의사항이라는 게 있었지만 암암리에 보너스 형식으로 거금을 건네는 게 관행이었고 다시한번 계약연장을 통해 ‘앞서가는 구단’ OB의 사령탑으로 남는다는 것은 지극한 영광일 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용곤 구단주는 김성근이 88년1월15일 창단기념식장에서 구단중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이, 성근이. 사람은 하나님이 오라고 오고 아직 남아 있으라면 남아 있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서는 안돼. 알았어?"하고 웃으면서 말해 절대 신임을 보여줬었다. 이에 감읍한 김성근은 평생 OB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또 박용민단장은 "우리 두산그룹은 한번 쓴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감독을 갈아치울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성근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자진사퇴라는 너울을 쓴 타의의 밀어내기가 아니었을까. OB구단과 김성근감독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살펴보자. 이는 단순한 옛날얘기가 아니라 앞으로도 구단과 야구인 사이의 갈등을 헤아리고 정리해보는 눈을 갖추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화두를 김우열의 OB복귀로 잡아보겠다. 빙그레가 1군리그에 가담하던 시점에 맞춰 86년에 빙그레로 트레이드됐던 김우열은 왼쪽눈 시력약화와 무릎부상으로 87시즌에는 단한게임도 뛰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다가 은퇴를 선언, 88년 5월24일 OB 2군타격코치로 복귀했다. [실제로는 4월말에 OB와 코치계약을 했으나 헛돈만 쓴 꼴이 된 빙그레가 김우열을 보류선수명단에 집어 넣고 "우리도 코치로 쓸 용의가 있다"며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OB합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때만 해도 각팀들은 타격이론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뜻에서 타격코치를 한명씩만 두고 있었다. 한꺼번에 두명을 두어 타격이론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 지도를 받는 선수들이 헷갈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OB 박용민단장은 윤동균에게 좌타자들을, 김우열에게 우타자들을 맡긴다는 ‘복수타격코치’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다른 구단보다 앞서가는 구상이었고 김우열의 복귀는 이런 취지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천구장에서 김우열을 만난 김성근감독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야 임마. 네가 코치로 오기로 했으면 먼저 나한테 전화로라도 알렸어야 할 게 아냐. 너와 나 사이가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그동안 전화 한통 할 시간이 없었어? 맹추같은 놈."
김성근감독이 김우열에게 쏘아붙인 데에는 나름대로 짚히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우타자 지도를 위해 김우열을 데려왔다고 하지만 OB구단은 소위 ‘OB맨’들로 코칭스태프를 채우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김감독은 자신이 물러난 뒤에 ‘포스트 김성근 체제’를 갖추려는 취지에서 구단이 미리 김우열을 데려다 놨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김우열의 등장이 곧 자기 등을 떠미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OB구단에서 말하는 ‘OB맨’이라면 김성근 역시 그 범주에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거기에 속해있지 않았다. 구단은 사사건건 마찰을 빚는 김성근을 내보낸다는 의도아래 코칭스태프를 미리 포석하고 있었고 김우열 영입은 그 일환이었다.
김성근은 김우열의 등장을 보면서 자신이 떠밀려난다는 느낌이 한결 짙어졌다. 87년12월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광환을 OB구단이 2군감독으로 기용한 것이 첫 신호탄이었다. 구단은 이광환으로 하여금 3년간 2군을 지도하면서 감독경험을 쌓도록 하고 나중에 1군을 맡긴다는 공식방침을 밝혔지만 그의 등장을 보고 야구계는 "김성근 후임자를 키우고 있는 중"이라고 수근거렸다. 박용민단장과 경창호이사는 그런 주위의 수근거림에 굳이 반박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후계자를 키우는 판에 전문기술로 먹고사는 야구감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닌 이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후임자를 키우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구단관계자들은 오히려 그렇게 떳떳이 말했다. 김성근이 등뒤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 구단관계자들이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김성근감독이 저만 잘하면 앞으로도 5년이건, 10년이건 얼마든지 OB감독을 더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왜 공연히 이광환 2군감독을 의식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등뒤에 ‘자기가 원치 않는’ 후임자가 자리를 노리고 앉아 있다면 당사자는 의식하지 않을래야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게 인간 아닌가.
김성근-이광환의 사이가 원만치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영덕-김성근과 함께 원년우승을 이끈 코칭스태프의 일원이었던 이광환은 84년 김영덕이 삼성감독으로 옮겨간 후 김성근감독 밑에서 2년간 타격코치로 일했다. 그러나 야구관이 서로 달라 마찰이 빚어지자 이광환은 코치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가는 길을 택했다.
이광환은 당초 이 기회에 친구가 놓아준 다리를 건너 미국 예일대학에서 스포츠생리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박용민단장의 주선에 따라 86년에는 일본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87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각각 1년씩 야구연수를 했다. 그런 다음 귀국한 이광환이 ‘후임자를 육성한다’는 구단의 공공연한 지원을 등에 업고 2군감독으로 등장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밖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야구관이 서로 다르다는 게 무슨 말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김감독은 투수출신이면서도 타격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선수들의 타격을 직접 지도하고 나섰다. 그는 일본야구 스타일대로 배트헤드의 스윙스피드를 이용한 타격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광환은 근육의 힘은 직선운동이 아니라 물걸레짜듯 비트는 데서 훨씬 강하게 나온다는 인체생리학에 의거한 타법을 펼쳤다.
예를 들면 박종훈을 놓고 김성근감독은 "이렇게 스윙하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게임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김감독이 돌아서고나면 이코치는 "이렇게 쳐라. 그게 타구를 더 빠르고 멀리 보내는 방법이다"고 다른 타법을 가르쳤다. 중간에 끼인 박종훈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이론의 차이도 차이지만 코칭스태프로서의 직무에 대한 생각도 두 사람은 엇갈렸다. 김성근감독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손수 보살피고 가다듬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반면 이광환코치는 야구이론을 통일시키되 전문코치로서의 활동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광환은 훗날 감독이 되고나서 코치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했다.] 타격코치로서 전문영역을 잃은 이광환은 타격연습시간에 외야에서 잡초나 뽑으며 겉돌다가 코치생활 2년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이다.
이런 야구이론의 차이, 감독-코치로서의 업무분담에 대한 이견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우애마저 갈라놓았다. 그런 마당에 OB구단관계자들이 이광환을 후계자로 키우겠다고 내세운다는 것은 곧 김성근을 배척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김영덕 초대감독이 삼성으로 옮겨간 뒤 ‘게임의 수읽기’가 뛰어나다는 평판을 들으며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내면서 86, 87년 2년연속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잡아낸 김성근을 구단측이 배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성근감독이 구단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첫번째 사례는 87년 플레이오프가 끝난 직후였다.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OB는 9회초까지 3:2로 리드, 한국시리즈 진출을 목전에 두었으나 9회말 2사후 유지훤이 주춤거리는 바람에 동점을 허용하고 기어이 역전패당했고 5차전마저 내줘 아쉽게도 그것으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성근감독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급성간염에 걸려 영동정형외과에 입원했다가 1주일뒤에는 강동성심병원으로 병상을 옮겼다.
김감독은 양쪽 병원을 합쳐 보름이상 입원하고 있었으나 박용민단장, 경창호이사는 물론 구단직원 중에서 문병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선수들이 문병을 가려고 하자 구단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얘기까지 김감독의 귀에 들려왔다. 안부전화나마 걸어준 사람은 민병준 구단사장(현 광고주협의회장) 뿐이었다. 사람을 이토록 냉대할수 있는가…. 김감독은 이때 구단프런트에 철저한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면서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한다. 구단이 김성근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이광환을 2군감독에 임명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88시즌은 김성근의 임기 마지막해였다. 구단은 사사건건 구단과 마찰을 빚는 김감독에게 재계약에 대한 확고한 언질을 주지 않았고 지위가 불안해진 김감독에게는 ‘레임덕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김성근-이광환의 대립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88시즌을 앞두고 동계전지훈련을 실시할 때였다. 그해에는 외화사정이 나빠져 해외전훈이 금지됐었는데 그바람에 OB 1군은 제주 로얄호텔에 캠프를 차렸고 2군은 창원에서 훈련하게 돼 있었다. 훈련장을 이렇게 2원화한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어느날 김감독은 2군에 머물던 정삼용 등 3명을 제주의 1군훈련장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감독은 창원에서 대학팀들과 연습게임을 하도록 스케줄을 잡아놓아 그들이 빠지면 게임을 치를 수 없다며 선수파견을 거부했다. 박용민단장은 김성근감독에게 "당장 2군연습경기도 중요하지 않느냐"고 이감독 편을 들었다. 그러자 김감독은 그날부터 호텔방에 들어앉아 훈련장에 나가지도 않았다.
"나는 더이상 감독이 아니다. 내가 필요한 선수를 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 감독은 내가 무슨 감독이냐. 나를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김 감독이 흥분을 감추지 않자 구단은 그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김감독은 이감독의 ‘보모’역할을 맡는 박단장을 상대로 3가지 ‘합의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2군감독은 1군감독의 지시를 절대로 따를 것. 둘째, 2군선수 이동에 관한 모든 연락은 2군감독과 신용균 수석코치가 협의할 것. 세째, 1군이 이천구장을 사용할 때는 2군은 언제라도 장소를 비워줄 것. 박단장은 이를 모두 수락했다.
이때부터 1, 2군감독 사이에는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알력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김감독은 이감독이 하는 일이라면 매사에 시비를 걸고 비난을 퍼부었다.
당시 이감독은 미국, 일본에서 배운 것을 OB에 전파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제몫을 해내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600게임 이상을 치러봐야 한다는 지론을 세운 그는 훈련을 위한 훈련보다는 게임을 통한 훈련을 앞세웠다. 당시로는 가히 충격적인 훈련방법의 전환이었다. 어린이회원 모집은 원년부터 있어 왔지만 성인팬클럽을 만드는 것도 이광환이 가져온 아이디어를 따른 것이다.
시즌 초에 ‘세탁기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OB구단은 이광환감독의 요청에 따라 2군본거지인 이천구장에 세탁기를 들여놓았다. 그러자 이를 본 김성근감독이 1군에도 세탁기를 구입하라고 요구했다.
이감독은 미국에서 야구를 연수하는 동안 선수들의 편의를 봐주는 방법을 배워와 2군에 도입했다. 미국 프로선수들은 ‘빨래보따리’를 을러메고 다니지 않고 유니폼을 비롯한 각종 세탁물은 구단이 세탁소와 계약, 일괄처리하는 것을 보고 왔던 것이다. 요즘은 세탁소에서 직접 야구장을 찾아와 대기하고 있다가 세탁물을 수거, 처리한 후 정시에 각 선수의 라커에 갖다주는 것이 일부구단에서는 관행이 됐지만 [이런 세탁소 영업을 하는 사람은 주로 전직 프로선수다. 그들은 은퇴후 상부상조 정신에 따라 새로운 생계수단을 얻은 셈이다] 그 때만 해도 이런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이감독은 2군선수들의 집합소인 이천에는 선수단의 세탁물을 처리할 마땅한 세탁소가 없자 아예 세탁기를 들여놓고 숙소를 관리하는 종업원에게 빨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빨래감을 집까지 들고 왔다갔다 하는 고역에서 해방된 선수들은 자연히 이감독의 ‘신종 선수단운영’에 쌍수들어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이를 본 김감독은 1군에도 세탁기를 들여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단은 이를 ‘괜히 배아파서 하는 투정’으로 받아들였다. 1군선수들은 여전히 빨래보따리를 메고다녀야 했다.
이것은 선수들로 하여금 ‘이광환감독은 구단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만 김성근감독은 그렇지 않구나’하고 느끼도록 만드는 사례였다. 선수라는 족속은 눈치가 여간 발달하지 않아 이런 데에 매우 민감하다.
그밖에 이광환감독이 도입한 새로운 선수단 운영방식과 이를 받아들이는 김성근감독의 반응을 몇가지 살펴보자.
이감독은 벽에다 차트를 그려놓고 자기 컨디션을 매일 스스로 표시하도록 했다. 오늘은 90점, 오늘은 70점 하는 식으로. 감독은 그 차트를 선수기용에 활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미국에서 배워온 방식.
"흥, 선수들은 한 게임이라도 더 나가려고 아픈 것도 안아픈 척 숨기려는 생리를 갖고 있어. 각자 양심껏 쓰라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이건 겉으로는 선수들을 보호하는 방식같지만 실제로는 선수를 더 혹사시키는 방식이다."
이감독은 게임전에는 오트밀이나 야채스프 따위로 가볍게 배를 채우는 게 좋다고 권했다. 너무 많이 먹는 선수는 벌금에 처한다고도 했다.
"흥, 배에 기름기가 낀 양놈들은 그렇게 해도 되겠지. 우리 선수들이야 배가 든든해야 뛸 게 아닌가."
이 감독은 타격연습때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로 펑펑 타구를 날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단 하나의 공을 치더라도 정신을 집중하는 게 중요하고 베이스러닝은 따로 별도의 시간을 할애할 게 아니라 타격연습때 직접 베이스에 나가 몇사몇루라는 상황을 설정하고 타구를 보고 진루여부를 결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2백개, 3백개씩 연습배팅을 하던 선수들은 겨우 20개 정도의 타격연습에 그쳤다.
"흥, 그래서야 어떻게 스윙을 자유자재로 하고 공을 맞히는 감각을 익힐 수 있겠어. 그까짓 연습량갖고 어떻게 게임을 한단 말이야. 여기는 한국이야 한국."
이런 대립들은 자질구레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OB구단 프런트는 주로 이광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김성근은 공연히 트집이나 잡는다고 받아들였다.
자기가 하려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것을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다’고 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세다’고 한다. 아무튼 이광환감독은 자기가 도입한 새로운 방식에 김성근감독이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이감독 자신이 한국야구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킬 책임을 지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갖고 있었다. 그는 구단프런트의 절대적인 지지도 업고 있었다. 그러니 굽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감독은 최근 "그 당시에는 내 소신껏 선수를 키워내고 싶었다. 김감독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내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의 입장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도 OB를 그만두고 물러나왔을 때 그 분이 얼마나 어려운 입장에 몰려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 김성근-이광환의 대립과는 별도로 김감독-프런트 사이에 알력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것은 감독이라는 존재가 구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피는데 중요한 사례가 된다.
구단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감독의 권한이란 실로 막강했다. 감독은 야구단을 창단했다는 데에 들뜬 구단주와 직통할 수 있었고 야구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장이나 단장은 감독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사장이라 봤자 다른 계열사의 대표가 주임무이면서 야구단사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담사장’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대체로 야구단 업무에 어두운 편이었고 그 밑의 중역이 실무를 맡고 있었다. 이른바 ‘실행이사’였다. 그들도 야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기는 오십보백보여서 감독으로부터 "야구도 모르면서 괜히 끼어들지 말고 내가 해달라는대로만 하면 돼요"하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구단주는 어쩌다 야구장이나 연습장에 들러 감독을 만나게 되면 "수고한다"며 금일봉을 내놓거나 선수단에게 회식을 베푸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가 감독이 각종 요구사항을 직접 들이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구단주의 입장에서 보면 감독의 요구라는 게 대수롭지 않은 금액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므로 사장이나 단장에게 "감독이 원하는대로 해주시오"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결재과정만 복잡하고 일의 처리속도가 더디고 ‘트집’만 잡으려 하는 구단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구단주와 독대(獨對), 직접 담판지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구단중역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구단주를 감독이 마치 친구 부르듯 툭하면 "독대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나서니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착각한 어느 감독은 구단주에게 "여기 있는 사장, 단장 그리고 나의 서열을 매겨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프런트의 반격이 뒤따랐다. 야구의 생리를 알게 되고 구단운영의 노하우를 서서히 쌓은 프런트는 점차 목소리를 높여갔다. 구단주도 무작정 감독의 요구를 받아줬다가는 구단업무와 위계질서가 엉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장이나 단장은 구단주가 감독을 직접 대면할 때 생기는 실무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 구단주의 ‘각성’을 재촉했다. 이에 따라 감독은 회사규정에 따라 결재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감독이 사장이나 단장에게 예속돼가는 과정이었다.
구단은 사장-단장-부장 순으로 조직돼 있고 감독과 단장은 대등한 지위에있는 것이 정상적이다. 영어로 general manager라고 하는 단장은 필드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구단운영을 종합적으로 관장하며 field manager인 감독은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에 대한 전권을 갖는다. 단장과 감독은 동등한 입장에서 선수단 전력강화를 위한 제반 조치(신인 스카우트, 트레이드)를 협의하고 흥행진작을 위한 홍보활동에도 상호협조한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원칙론일 뿐 실제로는 어느 한쪽으로 무게가 기울게 마련이다. 초창기와 달리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역급인 단장이 우위를 확보하고 감독은 부장과 임원 사이의 ‘공장장급’정도로 전락하는 등 무게중심이 완전히 역전돼 있다. 대기업에서는 회사가 내주는 승용차가 곧 그들의 서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감독에게 제공되는 차종에서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70년대 이후 단장의 파워가 일선감독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성근감독-박용민단장, 경창호이사의 갈등은 이런 저울추가 구단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던 결정적인 시기에 벌어졌던 일이다. ‘앞서가는 구단’을 표방한 OB는 다른 구단에 비해 프런트의 조직이 훨씬 탄탄했다. 발빠르고 정열적인 박용민단장이 일본 미국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의아한 점들을 외국구단에 직접 문의하면서 프런트 업무의 선진화를 가장 앞장서서 주도한 결과였다. 김성근감독은 강한 개성으로 선수들 편에 서서 팀을 이끌며 프런트와 팽팽한 힘겨루기를 해왔으나 계약기간 말년을 맞아 밀리는 기색을 완연히 드러냈던 것이다.
88년에 일어난 김성근-OB프런트의 대립은 단순히 특정인-특정구단의 대립이라기보다 한국야구계에서 감독의 위상이 프런트에 복속돼가는 최종단계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물론 90년 LG를 우승으로 이끈 백인천감독처럼 프런트보다 강력한 힘으로 구단 전체의 주도권을 쥐었던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그 역시 바로 그 해에 프로야구에 뛰어든 LG가 구단경영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감독이 우위에 섰던 케이스였을 뿐 이듬해에는 제법 알 것은 알게 된 프런트의 입김이 강해짐에 따라 백인천감독도 ‘성격이 괴팍한 사람’으로 찍힌 채 밀려나고 말았다.
88년 당시 OB베어스 사장은 두산그룹 계열사인 베리나인사장이던 민병준씨(현 광고주협의회 회장)가 겸직하고 있었고 야구단의 실무를 총지휘한 사람은 88년2월부터 ‘대표이사 부사장’의 직함을 갖춘 박용민단장이었다. (그가 정식으로 구단사장으로 승진한 것은 1989년1월21일이다. )그러나 그는 정식 사장직에 오른 뒤에도 사장이라는 타이틀보다 ‘단장’이라는 용어에 더 애착을 가지면서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자기가 단장이라고 불리운다고 해서 감독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카운터파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언론계(합동통신)에서 부국장까지 올라간 경력을 가진 그는(1936년생) 7살 아래인 김성근감독(1943년생)과는 될 수 있는대로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경창호이사(1941년생 현 구단사장)에게 실무적인 접촉을 맡겼다. 따라서 외부에는 김성근의 카운터파트가 경창호로 비쳐졌다. 박단장은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담당기자나 열렬팬등 제3자에게 슬쩍 흘려 김감독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교묘한 전달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해에 양자간에 부딪쳤던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성적부진에서 비롯됐다. 성적만 좋았더라면 모든 것이 덮어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성적부진의 책임은 언제 어느 구단에서나 몽땅 감독에게 덮어씌워진다. 그게 팬들에 대한 사죄를 포함한 문제해결에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년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의 꿈이 눈앞에서 깨진 OB는 88년에는 기필코 어려운 고비를 돌파하고 빛을 보자는 결의에 가득차 있었다.
마침 OB는 4월2일 장호연이 롯데를 상대로 사상 최초의 시즌개막전 노히트노런을 장식하는 등 2연승으로 더할 나위없는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꾸준한 순항은 기약할 수 없었다. 마운드가 엉망진창이 돼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날 개막전 선발투수로 내정돼 있던 김진욱은 경기전날 경남상고에서 연습을 하다가 김광림이 때린 타구에 급소를 맞아 전열에서 빠져나갔다. 장호연은 ‘꿩대신 닭’으로 나섰다가 노히트노런을 잡은 행운을 안았다. 김진욱은 부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4월4일 고환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초 개막2차전 선발요원이던 계형철은 갑자기 왼쪽 발목을 삐었다며 등판일을 늦추는 것이 불가피해져 김성근감독을 열받게 했다.
86년 19승을 올리며 바짝 상승세를 탔던 최일언은 그해 어깨와 허리에 무리가 간 탓인지 87년에는 ‘자기보호본능’을 드러내면서 적당히 던지는 통에 14승에 머물렀다. 그는 연봉재계약에 진통을 겪으면서 늦게 훈련에 합류했는데 워낙 훈련 페이스가 늦어 4월중순이나 돼야 제대로 마운드에 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최일언은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4월8일에는 아예 엔트리에서 빠져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5월1일이 돼서야 귀국했다. 그뒤로도 그의 부진은 이어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박철순의 부상이었다. 이루 헤어릴 수도 없을만큼 부상의 미로에서 헤매던 그는 87년말부터 구위가 살아나기 시작, 88년에는 제법 한몫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87년 가을철 연습때는 "어허, 지금 이 구위라면 우리팀 에이스인데 시즌이 한달만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을 보름여 앞둔 3월15일 CF촬영을 하다 그만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시즌을 열어보기도 전에 고스란히 물러앉고 말았다. 박철순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CF를 받아들였던 이태현 홍보과장은 사표라도 내고 싶을만큼 박철순의 이탈이 팀전체에 주는 타격은 심각했다.
이렇게 마운드가 엉망진창이 된 가운데 84년 신인왕에 올랐던 윤석환이 3년간 부진하다 구위를 되찾은 게 김감독에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는 시범경기와 연습경기에 주자를 둔 위기상황에서 나가 자신있게 던짐으로써 재기의 희망을 부풀렸고 공의 스피드는 신인시절에는 못 미쳤지만 바깥쪽 스크류볼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추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김감독은 ‘이없으면 잇몸’이라는 격언대로 마운드를 꾸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장호연을 로테이션의 기둥으로 삼고 황태환 박상열로 선발진을 이으면서 윤석환으로 뒤를 막아나가는 운용책을 썼다. 그러나 시즌초반부터 이렇게 투수들이 잇달아 무너져 마운드를 넝마깁듯 허겁지겁 돌려써야 하는 형편 아래서는 좋은 성적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김성근감독의 마음을 반짝 들뜨게 만든 사건아닌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한오종의 승리였다. 4년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오종이 4월10일 삼성전에서 선발로 나서 6:3 승리를 따낸 것이었다. 당초 2이닝만 던지라는 주문 속에 ‘바람잡이’로 나섰던 그는 6이닝을 6안타 1실점으로 버텨 마침내 ‘효자노릇’을 한 것이었다. 그러자 구단은 즉각 "그동안 8천9백만원을 들여가며 버리지 않고 키운 덕분"이라고 생색내기를 잊지 않았고 김감독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야마[머리의 일본말]가 확 돌았다"고 했다.
‘그렇게 자르려고 기를 쓰다가 이제 와서 1승 하니까…. xx같은 놈들.’
한오종은 그해 4승을 거두었다.
4월14일. 인천으로 이동한 김성근감독은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 야구시즌이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농담할 정도로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예감이었다. 4월13일 빙그레전에 나선 장호연은 어금니가 아파 "으으"하고 신음하며 던지다 보니 컨트롤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고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그는 개막전 이후 극심한 치통에 시달려 왔던 것이다. 김진욱과 최일언이 언제 본격적으로 합류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둥투수 역할을 하던 장호연마저 비틀거리니 감독으로서는 믿을 구석이 없었다. 한오종과 계형철[이 무렵에는 발목상태가 호전돼 있었다]이 정상 운용된다 하더라도 박상열 황태환 이상훈 중 하나가 살아주지 않으면 레이스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13승6패. 그럭저럭 잘 버텨 4월을 2위로 마감했다. 문제는 5월이었다. 네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가 바퀴 하나는 펑크나고, 또하나는 바람이 빠지고, 다른 하나는 나사가 헐렁거리는 판인데 여기다 4단기어를 넣고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해도 가봤자 얼마나 가겠는가?
OB의 5월은 신문에서 ‘魔의 5월’로 표현됐다. 10승12패로 반타작도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의 5월이라니! 10승12패를 거두었는데! 요즘의 눈으로 보면 그만하면 그럭저럭 잘 버텨나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달랐다. 한 시즌이 전·후기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팀이나 후반부를 대비하는 힘의 비축은 아랑곳없이 단거리경주하듯 전력질주해야 했다. 플레이오프진출권이 걸린 2위안에 들어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팀은 후기리그의 재출발에 대비한다며 레이스를 중도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0승12패로 승수쌓기에서 뒷걸음질친 것은 충격적인 것이었고 ‘마의 5월’로 표현됐던 것이다. 전·후기리그 제도가 마지막으로 시행된 이 해까지만 해도 "선수들의 건강을 보살핀다"는 것은 듣기 좋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5월말 현재만 하더라도 OB는 23승18패로 승패차 +5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자체 성적만 놓고 보면 훌륭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상위권일 텐데도 마의 5월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빙그레의 돌출이었다. 86년부터 1군리그에 끼어들어 2년간 7위[꼴찌], 6위를 마크했던 빙그레는 김영덕감독을 새로 맞아들여 세번째 시즌을 출발하고 있었다. 시범경기와 연습경기에서 보여준 빙그레의 전력은 "어쭈, 제법이네"하는 정도였다. 김영덕감독은 "작년에 4할승률을 올렸으니까 올해는 절반이상의 이겨 중상위권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큰소리(?)쳤지만 그 말을 신빙성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막내둥이인 너희들이 꼴찌해주지 않으면 누가 꼴찌하겠느냐는 게 다른 팀 감독들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4월29일 13승6패로 OB와 공동1위를 마크하더니 30일과 5월1일 OB가 게임을 쉬는 사이 [당시는 7개팀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경기일정상 1개팀은 부득이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롯데를 3:2, 1:0으로 연파, 당당히 단독1위로 올라섰다. 매스컴은 연일 ‘빙그레 돌풍’이니 ‘하위팀의 반란’이니 하는표현으로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한동안 그러다 말겠지 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빙그레는 5월에도 15승8패라는 호조를 이어가 같은 기간 10승12패에 머문 OB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빙그레가 그 정도의 호조를 유지했다면 선두를 달렸어야 옳겠지만 그랬으면서도 겨우 2위에 그쳤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해태였다. 86, 87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는 4월중 9승10패의 부진에 빠지는 바람에 5위에 처져 있었다. 그러나 4월30일 전주에서 태평양을 12:4로 잡은 것을 기점으로 5월15일 잠실에서 MBC를 3:1로 꺾을 때까지 거짓말같은 12연승(1무 포함)을 올려 일약 1위로 뛰어올랐다. 해태의 5월중 성적은 무려 18승4패였다.
여기서 참고삼아 그해의 정규시즌 진행방식을 돌이켜 보고 지나가도록 하자.
그해에는 1주일을 세토막으로 갈라 팀간 2연전으로 정규시즌이 진행됐다. 그리고 스케쥴이 없는 팀은 주중 이틀을 쉬거나 주말이나 주초에는 월요일을 끼어 사흘을 쉬어야 했다. 그런 휴식일을 믿는 바 삼은 각팀은 "이 경기만 잡으면 편안히 쉴 수 있다"며 다소 무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휴식의 달콤함보다는 무리의 쓰라림이 더많이 남아 선수들을 골병들게 했다.
더구나 2연전으로 진행되다 보니 ‘선수들을 무리시킨다’는 말을 듣기 싫은 팀들은 적당히 1승1패의 나눠먹기식으로 게임을 치르다 보니 3연전처럼 하나의 카드에서 우열을 가리는 흥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86년이후 3년째 이런 텁텁한 페넌트레이스가 진행되는 통에 조속히 제8구단을 만들어 게임스케줄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고 89년부터는 전·후기로 나누지 않은 단일시즌제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6월들어 해태와 빙그레는 1위자리를 주거니받거니 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그것은 전기리그 우승, 김응룡-김영덕의 名將대결이라는 자존심싸움이었기에 치열했을 뿐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해태는 34승19패1무, 빙그레는 34승20패로 불과 반게임차로 1, 2위를 차지했고 OB는 빙그레에 3게임차로 뒤진 31승23패로 3위에 머물렀다. 3게임차란 54게임으로 꾸며진 ‘중장거리싸움’에서는 따라잡기가 거의 불가능한 거리였다.
김성근의 퇴진은 성적부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빙그레의 욱일승천 기세가 김성근감독의 자리보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만약 OB가 이 시점에서 또다시 플레이오프에 나갈 티켓을 쥐었더라면 아무리 프런트와 냉전을 벌인다 하더라도 김감독의 발언권이나 자리는 튼튼하게 보장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감독만이 항상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으라는 신의 가호를 받은 바 없었고 주변팀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자극에 결국 떠밀린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명장 노무라감독은 "적(敵)은 밖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갈파했다.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프런트, 밉살스러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주전선수들의 부상, 쥐어박아도 시원치 않은 사인미스 등이 모두 내부의 적들이다.
그러니까 빙그레의 성장도 무시할 수 없지만 OB가 그들에게 짓밟히게끔 힘을 잃은 것은 내부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응전하는 것만으로도 김성근은 힘겨웠던 것이다.
"우리 그룹은 인재를 아껴. 어지간하면 중간에 사람을 자르지 않는 게 구단주의 방침이야."
박용민단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박단장은 88년 전기리그가 3위로 끝나면서 김성근과의 감정대립이 극에 달하자 후기리그부터는 아예 감독을 갈아치우기로 내부방침을 정하고 매스컴의 반응을 떠보았다. 그러나 OB담당기자들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며 구단만 일방적으로 잘하고 김감독만 혼자서 잘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감독을 자르려면 경창호이사도 함께 잘라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박용민이 여기서 주춤하는 바람에 김감독 중도해임이라는 내부결정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5년이라는 계약기간을 불과 반시즌 남겨두고 OB구단이 중도해임이라는 극약처방을 쓰려고 했을 정도로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든 갈등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그 단적인 예는 ‘숙소와 훈련장’의 문제였다.
4월12일 OB는 청주에서 빙그레와 대결할 예정이었으나 비 때문에 경기가 5월8일 더블헤더로 넘어가고 말았다. 노게임이 되자 김성근감독은 일단 서울로 올라갔다가 이튿날 다시 내려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단은 유성의 S장에다 방을 예약해 뒀으니 거기서 하루를 묵은 후 청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이에 김감독은 "S장은 요즘 나이트클럽 시설을 해놓는 통에 시끄러워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청주의 여관방에서 자도록 해달라"며 S장으로 갈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경창호이사는 청주에서의 유숙을 일언지하에 거부하며 "구단에서 이미 조치해놓은 것이니까 잔소리말고 그대로 하라"며 S장으로 갈 것을 강권했다.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이것이 ‘사사건건 시시비비’가 벌어지는 발단이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연습장 확보였다. 구단은 이천에 마련된 전용연습장에서 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감독은 이천-잠실을 오가는 데에만 5시간이 소모될 뿐 아니라 그런 이동중에 선수들이 버스 안에서 잠자는 것도 근육에 악영향을 미치니 서울시내에다 연습장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년도에는 명일동 두산연수원에서 겨우 토스배팅만 한 채 경기에 들어간 적이 있었고 실내에서 배팅연습을 해봤자 타격감각만 잃게 만든다고 김감독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김감독은 서초동의 서울고구장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거기는 이미 롯데가 서울에 오면 빌려쓰기로 하고 벌써 사례금까지 줘 놓은 상태였다. 반면 OB는 4월19일 연습중이던 주인(서울고 선수들)을 몰아내고 연습을 했으면서도 교장선생님이 운동장에 나타났을 때 구단간부가 "죄송하다"는 사과조차 한마디 하지 않더라며 김감독은 면구스러워 했다.
또 매게임 선수의 연봉고과평가서에는 감독의 결재난이 있는데도 87년도에 108게임을 치르는 동안 감독이 결재한 것은 불과 4게임 뿐이었다는 것도 불평사항 중의 하나였다.
새로운 고과평점 기준에는 "4타석에 연속으로 나가면 보너스 4점을 준다"는 조항 이 들어 있었는데 코칭스태프에게 이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 교체당한 선수들이 감독을 원망하게 만들었다고 고까워 했다. 연습을 마친 선수들이 목욕을 마친 후 곧바로 귀가할 수 있도록 목욕탕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무려 4개월이 지나서야 힐탑호텔을 수배해 놓았다는 것도 김감독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선수들의 부상이 자주 발생하자 김감독은 2군트레이너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구단은 2군도 트레이너는 필요한 실정이라며 거부하고 구단지정병원인 영동정형외과를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가만히 있으면 됐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 매사가 그 모양이야." 김성근감독이 늘상 입에 달고다니던 불만이었다. "뭐든지 반대로만 나가려고 해. 우리가 여기서 더이상 어떻게 해줘?" 구단측이 김감독에 대해 늘어놓는 불만이었다. 노상 이런 식이었다.
4월28일 김감독에게 괴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현대장의사인데요. 저는 관을 배달하는 사람인데 혹시 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바겐세일중이니까 하나 구입하시지요." 오밤중인 새벽 3시에 이런 전화를 받은 김감독은 등골이 오싹하며 소스라칙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장난전화였지만 당시 김감독의 신경으로는 자기가 그저 재수없이 그런 장난의 대상으로 걸려든 게 아니라는 심증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2군의 이광환감독은 2군경기와 대학팀과의 연습게임을 합쳐 연간 162게임을 치른다는 다부진 목표를 세웠으나 정작 치르는 게임보다도 취소되는 것이 더 많았다. 선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감독은 1군에서 필요없이 선수를 28~30명씩이나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외야에 내세울 선수가 없어 등판하지 않을 투수를 빈 자리에 세우기도 하고, 타자가 모자라는 바람에 타순이 1번부터 8번까지 갔다가 다시 1번타자로 올라가는 ‘불가피한 부정위타자제도’를 써야 한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른 팀은 2군경기까지도 전적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역부족인 OB 2군은 대학팀과의 연습경기까지 포함, 1승29패까지 혀를 빼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감독은 어차피 한두명을 키워내는 게 2군의 임무일 바에는 5, 6명의 선수가 남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 치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게 자기의 본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 2군의 선수교류는 거의 전무한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김감독이 1군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2군선수를 보내 달라고 요청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김성근은 이삼열코치를 2군에 내려보내 혹시 쓸만한 선수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천 2군연습장을 둘러본 이삼열은 박단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야 했다.
김감독을 만난 이삼열코치의 보고는 이런 것이었다.
"2군에 쓸만한 선수가 한명도 없던데요."
6월에 접어들면서 어느날 김성근은 가까운 친구로부터 술한잔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박단장 참 웃기는 사람이야. 글쎄 나더러 ‘우리팀 감독 갈아치워야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 거였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
"스탠드에 앉아 너희 게임을 보고 있었는데 단장이 내게 다가오더니 ‘저런 감독을 그냥 두었다간 우승은 영영 못할 게 아닙니까? 감독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닙니까?’하고 묻는 거야. 나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내가 너하고 친구인 줄 몰랐던 모양이야."
박단장이 스탠드를 돌아다니며 소위 OB의 골수팬들로부터 감독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김성근의 귀에 들리고 있었다.
6월13일 월요일. 태평양과의 인천경기를 앞두고 박용민단장과 김성근감독이 대좌했다. 두 사람 모두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있는 상태였다.
박단장은 "가고 싶으면 가고, 남고 싶으면 남아라"고 최후통첩과도 다름없는 말을 던졌다.
김감독은 열흘전쯤 주간야구에 게재된 감독교체를 시사하는 기사에 대해 해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박단장은 "난 그 주간지는 보지도 않는다"고 잘라말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OB베어스가 89년에 대비한 제3대 코칭스태프 구성을 마쳤다. OB는 김우열(39)을 타격코치로 받아들이면서 ‘장기적인 코칭스태프 개편’의 단계를 마무리, 세대교체가 임박했음을 예고해주고 있다.
OB 창단멤버인 김우열의 복귀는 ‘단순복귀’이상의 몇가지 복선이 깔려 있다. 빙그레와 마찰을 각오하면서 김우열의 복귀를 강력하게 추진한 OB의 속마음은 바로 앞으로 다가온 ‘김성근 후계체제’에 대비한 사전포석과 구단의 운영방침을 은연중에 제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중략) 김감독은 비교적 약체인 OB를 이끌면서 기대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지난해부터 구단과의 마찰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OB의 미래감독' 점찍어놓은 이광환씨가 귀국하면서 김감독은 "2군에 차기감독이 와 있다", "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간에 계약만료와 함께 나는 OB를 떠나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해왔다.
김감독의 ‘사임설’이 꼬리를 물자 OB는 "김감독이 원하면 2~3년정도 더 계약을 할 수도 있다"면서 "김감독의 사임설은 단순히 김감독 본인의 의사일 뿐"이라고 변명해 왔다. 그러나 구단은 김감독이 OB를 떠날 때를 대비해 코칭스태프 개편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중략) OB는 김성근감독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해놓고 ‘제3대감독’을 위한 코칭스태프 개편의 첫 작업으로 김우열의 복귀를 추진하는 셈이다.
(중략) 김우열의 복귀로 OB는 일단 왼손타자 코치에 윤동균, 오른손타자 코치에 김우열을 포진시키는 1단계 코칭스태프개편이 마무리된 셈이다.
제3대 감독체제로의 변환을 추진하고 있는 구단의 구상을 보면 1군에 감독 이광환, 투수코치 박철순, 타격코치 윤동균, 김우열, 수비코치 이삼열이고 2군은 이선덕, 최주억 또는 선수중에서 승격된 코치가 맡을 가능성이 높다. 』
[88년 6월8일자 주간야구]
김우열의 OB복귀를 놓고 김성근감독의 거취를 연관지어 풀이한 해설성 기사였다. 김우열의 영입은 곧 김성근 퇴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김감독은 계속 박단장을 다그쳤다.
"내 거취에 관한 기사에는 분명히 해명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구단 의사와는 관계없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 잡지기사는 보지 않는다고 했잖아."
김감독의 박단장의 이 두마디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집어냈다. 기사를 보지도 않았다면서 무엇이 구단의사와 관계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왜 2군선수는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2군을 별도로 분리해서 운영하기 때문이야. 그건 회장 지시사항이고 구단방침이야."
"OB그룹에서는 자동차가 10만㎞가 넘게 굴리면 새 차로 바꿔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요즘 제 차는 10만㎞가 넘은 데다가 며칠전 접촉사고가 나서 공장에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
"그건 처음 듣는 얘기야."
"아니 접촉사고가 난지 1주일이 넘는데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하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
한동안 말문이 막혀 있던 박용민단장은 또다시 김성근감독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어떻게 하겠어? 남느냐 가느냐는 당신이 결정하기에 달려 있어. 우리는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어. 돈이냐 명예냐.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독단적으로 파워를 행사하려던 김성근감독, 더이상 감독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프런트. 이들의 갈등에서는 누구의 잘잘못도 따질 수 없다. 다만 프로야구의 연륜이 쌓임에 따라 파워의 핵심부(구단주)에 가까이 있는 프런트가 좀더 강한 자장을 자랑하면서 감독을 원심분리시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갈등이었고 그런 것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게 된 또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6월의 비오는 어느날 영등포 OB맥주공장 안에 있는 구단사무실의 경창호이사 방에 모인 구단간부들은 김감독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급기야 김감독을 차후 재기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신임투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정식으로 무기명투표를 했거나 거수로 표를 헤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감독을 신임한다는 쪽에 손을 든 사람은 이태현 홍보과장과 정진구 운영차장 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OB구단에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과 ‘투표결과’는 김감독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박용곤 구단주로부터 ‘평생 OB맨’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자부하던 김감독은 "뭐가 어쩌고 어째? 제까짓 것들이 뭔데 감히 내 목을 놓고 투표하고 자시고 하는 거야?"하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구단주는 멀리 있고 구단직원들은 가까이 있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불신임했다는 데에 김성근은 환멸을 느꼈다. 구단주를 찾아가 "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구단사람들을 바꿔 주십시오"라고 하소연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감독은 일단 박용곤구단주를 만나 이 문제를 거론하고 처분을 따르기로 했다. 독대의 기회가 왔다.
"사실 회장님을 뵙자고 한 것은 구단간부들이 저에 대한 신임을 놓고…"
"알고 있어! 자넨 그저 열심히 하고 있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전에 박용곤회장은 말허리를 자르며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박용민단장으로부터 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는 얘기가 되며 그렇다면 박단장이 어떤 식으로 보고했을지는 말하나마나라고 생각했다.
중이 절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었다.
김성근감독이 OB와의 결별을 공식선언한 후 일의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9월8일 MBC와의 시즌최종전. 이날 김진욱의 완봉 역투에 힘입어 OB는 김감독의 고별전을 1:0으로 승리했다.
9월9일 OB는 이광환 2군감독의 1군승격을 공식발표했다. 9월10일 태평양은 김성근감독과의 입단계약을 발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루 앞뒤로 일이 진행된 것은 모든 문제가 사전접촉을 통해 조율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감독은 당초 MBC청룡으로부터 감독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88시즌을 전기리그 꼴찌, 후기리그 6위로 마친 유백만감독이 리더로서의 신임을 얻지 못하자 구단측은 후임자로 김성근을 지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감독은 ‘이웃집’의 사령탑으로 건너가 같은 서울팀끼리 맨날 얼굴을 맞대고 아웅다웅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박용민, 경창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OB는 구단의 체계가 비교적 훌륭하게 [당시는 그게 정평이었다] 짜인 반면 MBC는 조직이 엉성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프런트의 지원을 크게 기대할 수도 없었다. MBC를 거쳐간 전임감독들의 입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성근에게 추파를 던진 또 한군데는 태평양이었다. 앞서 말한 MBC와 꼴찌와 꼴찌에서 두번째를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며 나눠가졌던 태평양은 굳이 ‘감독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않으려 했던 임신근감독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태평양 신동관사장과 만난 김성근감독의 요구조건은 많은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OB프런트와의 대립으로 곤욕을 치른 그는 코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단프런트까지도 제 손으로 선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신동관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것은 말도 안된다"고 했다. 김성근감독은 "그렇다면 나도 안갈테니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뒤 신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 요구조건을 수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김감독은 태평양감독직을 수락했다. 8월20일께의 일이었다.
이 글의 맨앞에서 말했듯이 박용민단장이 김감독이 OB를 떠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나서야 처음 알았다는 식으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은 것은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김감독은 23, 24일 경창호이사와의 면담내용을 박단장이 보고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늦어도 25일 아침에는, 그러니까 김감독이 면담내용을 기자에게 털어놓기 만 하루전인 그 시점에는 박단장이 알고 있었을 게 뻔했다.
실은 그것만도 아니었다. 박단장은 그보다 보름 전에 이미 김감독이 구단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행선지는 태평양이라는 것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었다. 신동관사장이 박단장과 골프장에서 만나 "우리는 감독을 갈아야겠는데 김성근을 데려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박단장은 즉석에서 OK사인을 냈던 것이다. 신사장은 "김감독은 사람됨됨이가 어떠냐"고 묻기까지 했고 박단장은 "매우 능력있는 사람이니까 잘 쓰면 성공할 것"이라고 덕담을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박용민은 이렇게 파국을 맞기에 앞서 김성근에게 최후통첩과도 같은 말을 했다.
"남느냐 가느냐는 당신이 결정하기에 달려 있다. 우리는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다. 돈이냐 명예냐.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라."
돈이라는 것은 다른 구단으로 가 새로이 계약금을 챙기라는 것을 가리키고 명예라는 것은 OB에서 10년감독이 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말하면 명예를 택해 OB감독으로 재계약한다면 거기에 따른 재계약금은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당시는 그게 ‘구단주합의사항’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엄연한 룰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너나할 것 없이 그 룰을 깨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돈을 따라 OB를 뜬다는 것이 반드시 명예를 잃는다는 것과 등식을 이루지는 않았다.
OB 외의 다른 구단의 감독을 맡는다는 것이 불명예스러운 길로 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렇다면 구단은 겉보기로는 매우 공평하고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허락한 것같지만 내막적으로는 김감독을 외통수의 길로 몰아간 셈이었다. 김감독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감독은 태평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상 초유의 대규모 ‘김성근사단’을 형성했다. 심지어 프런트의 정진구차장까지 동행시켜 OB사람들로부터 "우리 구단을 거덜냈다"는 원성을 샀다.
그러면 이런 김성근사단을 결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김감독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가 의리의 보스이기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면 OB를 뿌리채 흔들어놓으려고 앙심을 먹은 것이었을까.
앞서 얘기했듯이 박용민단장은 김감독의 사의표명이 기사화된 후 마주앉은 자리에서 "데려갈 사람은 아무나 다 데려가도 좋다"고 언명했다. 그렇지않아도 구단은 OB출신이 아니고 다른 구단을 거쳐온 코치들은 모조리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정리대상 중에는 현역투수였던 박상열도 포함돼 있었다. 김감독은 OB에서 동고동락하던 신용균 수석코치를 비롯, 최주억 작전코치, 은퇴단계에 있던 박상열을 대동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물러나 있던 이근식과 이종도를 불러들였고 현역에서 은퇴, 구단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이대진도 새로운 일터의 코칭스태프에 포함시켰다. 태평양의 기존코칭스태프 중에서는 오직 박용진 코치만을 유임시켜 2군감독으로 앉히고 OB에서 연이 닿은 인물들을 대거 거느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김성근사단’이라는 신용어를 낳았다.
여기서 특별히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은 신용균코치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60년대 아마추어 실업무대에서 투수로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던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다가 85년에 다시 한국 프로야구의 문을 노크했다. 당초 청보에 몸담았던 신코치는 코칭스태프가 풍비박산(風飛雹散)되자 김성근감독의 영접을 받게 됐다.
김감독이 OB를 떠나는 게 기정사실화됐을 때 박용민단장은 신용균코치에게 후임감독 자리를 제의했다. 이광환 2군코치를 3~4년동안 2군에서 경험을 쌓게 한다는 당초의 방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방침에 따른다는 명분을 갖추기 위해서는 ‘과도기’에 팀을 이끌 제3의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OB구단의 제시는 상식적으로 "가능하다면 감독을 맡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즉 계약금없이 종전보다 약간 연봉을 올려줄 테니 감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모욕에 가까운 제시였다. 그렇지않아도 후임자가 뒤에 버티고 있기에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판인데 계약금마저 주지 않겠다는 것은 형식상으로만 감독직을 제의했을 뿐 내용적으로는 떠나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감독은 신코치를 태평양 수석코치로 대동했다. 김감독은 자신의 대우를 놓고 구단과 아웅다웅하기보다 신코치에게 계약금이 돌아가도록 조치해준 것을 지금까지도 떳떳하게 자부하고 있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김감독이 떠날 때에 즈음한 경창호이사와 은퇴를 눈앞에 둔 윤동균의 동태였다.
김감독이 태평양으로부터 프런트 인선까지 권한을 일임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요즘의 구단구성의 풍조로 보면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김감독이 그런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89년 태평양 돌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이었다는 사실은 다시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차후로도 일사분란한 조직력으로 전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팀이라면 감독에게 그런 식의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각설하고, 경창호이사는 김성근감독이 떠나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시원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구단에서 누구누구 데려갈 거야?"
"구경백이는 가자고 하니까 싫다고 했어. 하긴 걘 OB에서 잔뼈가 굵었으니까
여기에 남는 게 좋겠지."
1군주무였던 구경백(현 홍보팀장)은 시즌종반 대구원정 중에 김감독으로부터 태평양으로의 동반이동을 제의받았다. 그는 자신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다 곧바로 서울에 있는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상의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너를 사람 만들어준 데가 OB인데 어떻게 다른 데로 갈 생각을 하느냐. 그냥 남아 있거라."
부친으로부터 그런 조언을 들은 그는 당장 그날 밤으로 김감독에게 자신의 거취를 분명히 밝혔다. 김감독의 계속되는 얘기.
"정진구차장은 데려가겠어."
"간대?"
"응, 여기 남아 봤자 비젼이 없지 않겠어?"
"잘 생각했지."
이사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간부회의에서 어떤 사안을 놓고 의사결정을 할 때 박단장은 경이사 대신 정차장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이사로서는 하급자의 의견이 구단고위층에 받아들여지는 게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므로 그가 떠난다는 것은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기업은행팀에서 김감독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정진구는 대구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바로 김감독의 추천으로 OB프런트에 입단한만큼 ‘김성근 사람’으로 분류돼 있었고 김감독이 떠난다는 것은 곧 보호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이사, 당신도 같이 가지 않을래? 거기가서도 이사 자리는 내가 책임질게."
김감독이 엉뚱한 제의를 했다. 두 사람은 구단-선수단 갈등의 상대역이었지만 태평양에서 구단의 체질개선을 하려면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과 손잡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경이사는 인간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양반’이었다.
"나도 가고 싶어. 야구라면 지긋지긋해. 그렇지만 간다면 형님회사에 가서 일해야지 어떻게 다른 구단에 갈 수 있겠어. 날 끌어준 박단장을 생각해서라도 다른 구단에서는 일할 수 없는 거 아냐."
그는 박용민단장과 강력한 결속을 다져놓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OB집단이탈사건’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한다. 아무튼 그는 박단장을 떠나 김감독을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훗날, 그러니까 3년뒤 일약 대표이사 사장 자리까지 물려받은 것을 놓고 돌아보면 그때의 결정이 적어도 그 자신에게도 얼마나 운명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윤동균. 그는 음주문제로 김성근감독에게 숱하게 페널티를 먹고 말썽도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김성근 사람’이었다. 동대문상을 졸업하고 기업은행에 입단했을 때 처음 만난 감독이 김성근이었고 그때부터 사제지간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감독님,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자 김감독은 한동안 망설였다. 인맥으로 따지면 윤동균은 김성근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OB가 공들여 가꾸려는 ‘OB맨’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넌 여기에 남아 있어. 잘난 OB맨들로 팀을 만든다니까 너한테도 기회가 올지 몰라. 넌 여기서 크는 게 나아."
윤동균이 구단과의 사이도 좋고 그룹고위층의 총애도 받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고 내린 결정이었다. 윤동균은 3년뒤인 91년8월부터 감독대행에 오른 뒤 92년부터는 정식 감독으로 활약했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됐더라면 그의 인생항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만났듯이 그로부터 2년뒤인 90년 10월 김감독이 태평양을 떠날 때도 또다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그리고 95년말 김성근이 쌍방울감독으로 임명되자 또다시 많은 이합집산이 이뤄졌다. 그런 뭉침과 헤어짐은 줄곧 이어졌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서로의 가슴에 조금씩 감정의 앙금을 남기면서.
자, 김성근이 OB를 떠날 때 박용민단장이 한 말을 다시한번 인용하기로 하자.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이 말뜻을 아는 사람은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힌트.
박용민단장은 "우리 두산그룹은 한번 쓴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출처 : http://cafe.naver.com/oblove/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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