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69) 감독과 SK의 허니문은 행복했다. 함께 있어서 항상 든든했고, 많은 이들은 이 부부의 금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알고 보니 원만한 부부관계가 아니었다. 뒤에서는 옥신각신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부부싸움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박아 버렸다.

김성근 전 SK 감독은 지난 8월 17일 전격적인 시즌 종료 후 사퇴의사를 밝혔다. SK는 그 다음날 경질이라는 카드로 반격했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양자는 갈라섰다. 일단 겉모습만 보면 사태는 일단락된 모양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김성근 감독이 한국프로야구를 향해 남긴 마지막 외침이 메아리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김 전 감독과 SK 프런트는 서로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6월 2일 문학구장. 경기에 앞서 한 스포츠 전문지는 관계자의 말을 인용, SK가 김성근 감독과 재계약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취재진의 문의가 빗발쳤다. 그런데 정작 SK 구단의 말은 달랐다. SK 구단 관계자는 “정황상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확률 높은 추측기사다”라며 재빨리 선을 그었다. 홍보팀 관계자들이 해당 언론사를 직접 찾아 해명했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 후 8월 중순까지 김 전 감독의 재계약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처음 분위기는 재계약의 가능성이 높다는 쪽이었다. 4년 중 세 차례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공로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러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었다. SK는 미온적인 입장을 고수했고, 이런 태도에 김 전 감독도 불만을 토로하며 공기가 험악해졌다.

당시 한 야구계 관계자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팀에서 떠날 때 항상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사태가 김 전 감독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 관계자의 말은 적중했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랐을 뿐이다. 재계약 논의에서 상처를 입은 김 전 감독은 미련 없이 결단을 내렸다. 끌려가는 상황을 우려한 구단의 대응도 신속했다. 4년 반을 함께한 이들의 관계는 단 이틀 만에 청산됐다. 그렇게 김 전 감독은 통산 12번째, 프로에서만 6번째 경질되는 비운을 맛봤다.

비운의 야구인생

김 전 감독은 지도자로서 프로야구 30년 역사를 함께했다. 각기 다른 6개 팀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당분간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이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의 자서전 제목인 <꼴찌에서 일등으로>처럼 약체를 맡아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는 역량이 탁월했다.

잡초처럼 질겼던 야구인생은 SK를 만나 빛을 봤다.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그 중 세 번은 최후에 웃었다. 당초 김응룡 전 삼성 감독이 비아냥거리며 선사(?)했던 ‘야신’이라는 별명을 원래 뜻대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한편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승리에 대한 열망도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몇 안 되는 지도자였다.

그런데 딱 하나가 문제였다. 선수들과 팬들의 마음은 장악했지만, 단 한 번도 구단 고위층의 마음을 사지는 못했다. 그가 떠날 때는 항상 고위층과의 마찰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김 전 감독 특유의 성격과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구단의 충돌은 정기적인 행사였다. 그럴 때마다 ‘을’의 입장인 김 전 감독의 야구인생은 요동치곤 했다.

첫 프로팀 감독을 맡았던 OB(1984~1988)에서는 구단의 ‘이광환 키우기’로 갈등이 빚어졌다. OB는 이광환을 차세대 지도자로 키우려 했다. 미국으로 연수도 보내고, 돌아온 뒤에는 김 전 감독과의 상의 없이 2군 감독으로 선임했다. 김 전 감독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구단이 선수단 물품까지 사사건건 간섭하고 나서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쩌면 이번 SK에서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1989~1990)에서는 그 유명한 ‘임호균 각서 파동’을 거쳤다. 1989년 말, 구단은 베테랑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려 했다. 이에 반대한 김 전 감독은 “다음 시즌 임호균이 5승을 하지 못하면 감독이 벌금을 내겠다”고 각서까지 쓰며 버텼다. 그러나 1990년 임호균은 구단의 조직적인 방해에 막혀 단 1승도 챙기지 못했다. 이에 질린 김 전 감독은 시즌 후 사임했다.

삼성(1991~1992) 시절에도 김 전 감독은 구단 고위층의 불화 끝에 해임됐다. 명목은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였지만, 구단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쌍방울(1996~1999) 사령탑 당시는 IMF 후 재정상태가 악화된 모기업과 마찰을 빚었다. 쌍방울은 김 전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조규제 등 핵심선수들을 모두 팔아치웠다. 그 다음 타깃은 눈엣가시였던 김 전 감독이었다.

감독대행으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낸 LG(2002)에서는 “구단의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김 전 감독이 구본무 LG회장을 만나기 위해 곤지암 골프장까지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김 감독은 재계약 문제와 자신의 팀 구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본무 회장은 김 감독의 말보다 LG 트윈스 사장(어윤태 현 동래구청장)의 보고를 우선시했다.


김성근 감독은 팀을 맡으면서 선수들과 팬들의 마음은 장악했지만, 단 한 번도 구단 고위층의 마음을 사지는 못했다. (사진=연합뉴스)


결론은 똑같았다

LG에서 물러난 이후 오랜 기간 야인 생활을 했던 김 전 감독은 2007년 SK를 통해 복귀했다. 그때를 기억하는 한 관계자는 “SK에서도 처음에는 김 전 감독의 선임을 놓고 말이 많았다. 워낙 반골 이미지가 강해서였다. 구단과 마찰이 잦았던 전력이 달갑지 않은 요소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 당시 SK에게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2006년 SK는 하위권으로 처졌다. 체질개선이 시급한 시점이었다. 이 부문에 있어서는 김 전 감독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부임 후 김 전 감독은 전권을 휘둘렀다. 전지훈련 일정부터 선수단 관리까지 모두 김 전 감독의 결재 아래 이뤄졌다. 파격적인 ‘1년 두 차례 전지훈련’이 정착된 것도 김 전 감독의 힘이었다. 가시적인 성적이 필요했던 SK도 김 전 감독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적어도 훈련과 선수들의 복리후생에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SK는 김 전 감독 부임 후 명실상부한 왕조가 됐고, 스포테인먼트의 기틀을 닦았다.

김 전 감독에게도 자신과 선수단을 간섭하지 않는 프런트가 필요했다. SK는 그에 부합하는 듯했다. 신영철 사장, 민경삼 단장 등 SK의 프런트는 선수단 운영에 있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김 전 감독은 성적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해줬다. 구단에서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김 전 감독은 이런 관계정립에 만족스러워했다. 첫 번째 계약기간 만료시점이었던 2008년에는 신영철 사장과 민경삼 당시 본부장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는 최근까지도 큰 변동이 없었다. 일례로 김 전 감독은 국내에서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다시 수술대에 오른 모 팀 투수를 두고 “SK라면 저렇게 하지 않았다. 좀 더 비용을 들여서라도 확실하게 수술을 해야 했다”며 SK 시스템의 우월함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은 현장 중심의 시스템을 만든 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지난해 막판부터 서서히 흔들렸다. 재계약을 둘러싼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김 전 감독은 좀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길 원했다. 그래야 김광현의 투구폼 교정으로 대변되는 ‘미래의 SK’를 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구단의 생각은 달랐다. 득실을 놓고 주판알을 튕겼다. 팀의 지향점을 수정해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는 계산을 어렵게 했다. 자연히 재계약 시점도 뒤로 밀렸다.

김 전 감독은 승리에 가장 큰 방점을 찍는다. 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때문에 부임 초기 ‘고등학교 야구’ ‘승리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야구’라는 비판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반면 SK는 팀의 스타일이 달라지길 원했다. 스포테인먼트에 걸맞은 재밌는 야구가 그것이다. 김 전 감독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구단 내 관계자가 야구를 깨끗하게 하자고 하더라”라고 털어놓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는 김 전 감독에게 간섭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감독에 대한 간섭은 곧 선수단에 대한 간섭이었다. 가만있을 리 없었다. 예전 5개 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갈등은 불가피했다. 조금씩 앙금이 쌓였고, 재계약 논의과정은 결정타가 됐다. 한 야구계 관계자는 “면담에서 이만수 현 감독대행의 이야기가 나온 것 자체가 김 전 감독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과정은 조금 달랐으나 결말은 똑같았다. 떠나야 할 대상은 절이 아닌 중이었다.


SK 문학구장 감독실 앞 복도에 걸려 있는 김성근 감독의 사진 (사진=연합뉴스)


야구는 현장이 한다

김 전 감독의 경질로 한국프로야구는 기이한 현상을 맞이했다. 지난해 가을잔치에 나섰던 네 명의 감독이 전부 사라졌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더군다나 김경문 전 두산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김성근 선동렬 로이스터)은 사실상 경질이다. 알려진 것처럼 삼성과 롯데는 구단 고위층의 입김이 감독교체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SK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다.

한 지방 구단 관계자는 “SK는 여론에 민감한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다. 파장을 감안하면 신 사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실제 신 사장은 17일 저녁 통화에서는 “결정된 것이 없다.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가 18일 오전 그룹 고위층과의 회동을 가진 뒤 경질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현장과 팬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직 ‘갑’인 구단의 결정만 있었을 뿐이다. 삼성과 롯데의 연속안타에 이은 SK의 적시타는 이 냉철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이에 해묵은 논란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현장과 프런트의 관계가 그것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메이저리그처럼 단장과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말 그대로 이상적이다. 한국프로야구의 토양은 이런 파격을 받아들일 만한 여건이 안 된다. 모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기형적 구조 탓이다. 한편으로는 현장과 구단의 보이지 않는 밀착도 부인할 수 없다. 사령탑 중 가장 힘이 강했다던 김 전 감독도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실패했다.

김 전 감독은 재임 시절 “음지에서 뛰는 프런트의 공로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야구는 현장이 하는 것이다. 현장이 프런트보다 야구를 잘 아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내가 선수들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강조했다. 또 “현장이 지나치게 간섭하면 그 팀은 제대로 설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5번이나 잘렸던 노병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현재 SK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SK는 팬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수위조절은 아쉬웠지만, 팬들은 언제까지나 구단의 뜻에 따라가는 바보들이 아님을 보여줬다. 또한 포스트시즌을 준비하던 선수단도 폭탄을 맞았다. 갑작스러운 사령탑 교체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자리를 잃은 것은 김 전 감독이지만, SK도 얻은 것은 없었다.

결국 현장과 프런트의 싸움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모두가 패자다. 양자의 마찰이 있는 팀이 오랜 기간 강호로 군림한 적은 없었다. 이는 프로야구 30년 역사가 증명한다. 오히려 잘 나갔던 팀은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구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프로구단이라면 싸움은 야구장에서 해야 한다. 그것도 적군과 해야 한다. 내전은 공멸의 길이다. 어쩌면 이는 SK를 떠나는 김성근 감독이 한국프로야구에 남기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스포츠온=김태우 기자>

출처 :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906n11823?mid=s1000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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