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4일 대구에서 열린 올스타전. 슈퍼에이스 류현진이 인심 쓰듯 1회에만 3점을 내줬다. 최근 3년간 도루가 한 번도 없었던 체중 103kg의 거구 이대호는 2루를 훔치다가 어이없이 아웃 됐다. 13년 만에 올스타전을 보는 대구 팬들은 모두들 신이 났다. 다들 그렇게 올스타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들이 낯설었다. 그곳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입단 후 13번째로 서는 무대였지만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소속팀 경기에도 거의 나서지 못하는 처지여서 팬 투표는 물론 감독 추천으로도 올스타전 출전 선수 명단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경기 전날 SK 박정권이 부상을 입어 올스타전에 대신 참가하라는 연락이 갑작스럽게 왔다. 이스턴리그 김성근 감독이 불러준 것이다.

이미 나는 은퇴 결심을 하고 있는 터였다. 게다가 오랜만에 고향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이었기 때문에 작별 인사를 할 무대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축제 같았던 2010년 올스타전은 그래서 내게 뜻 깊었고 또 서글펐다. 후보 선수로 있다가 6회 초 김현수 대신 좌익수로 교체 출전했다. 그리고 7회말 그날 첫 타석에 섰다. 3-8로 밀리던 상황에서 시원한 우월 3점 홈런을 때려냈다. 1만 관중석을 가득 메운 대구 팬들은 폭발적인 함성을 내질렀다. 18년간 야구 하면서 내 이름이 그렇게 크게 메아리 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루를 돌 때는 눈물이 살짝 맺힌 것도 같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만하면 나의 마지막 모습으로 나쁘지 않겠다.'
이틀 후 나는 은퇴를 발표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홈런을 때렸다고 생각했지만 올스타전 MVP 역시 내 몫이 아니었다. 쇼맨십이 좋은 홍성흔의 차지였다. 이 또한 나 다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무대를 만들어준 김성근 감독이 참 고마웠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습할 때 형편없었는데 경기에 들어서니 타격 밸런스가 딱 잡히더라. 역시 양준혁이다." 라고 말씀해주신 것도 감사했다. 많이 쓸쓸할 뻔했던 내 뒷모습을 감싸주셨다. 하지만 내가 김성근 감독을 최고 은사로 꼽는 이유는 나를 따뜻하게 대해줘서가 아니다. 반대로 차갑고 독해서다.

나는 2001년 LG에서 김성근 감독 밑에서 야구 수업을 받았다. 호된 가르침이었다. 그분으로부터 야구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배웠다. 아무리 준비하고 끝없이 변화해도 야구는 너무나 두려운 상대임을 알았다. 스스로에게 가혹해야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의 열정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꽤 힘들었다. 언젠가 광주 경기가 끝나자 김성근 감독이 "너, 버스 타지 말고 숙소까지 걸어와" 하며 호통친 적이 있다. 그날 4타수 무안타에 그치긴 했는데,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터벅터벅 걸었다. 학생야구선수도 아니고 프로야구선수가 이런 체벌을 받는 게 한심스러웠다. 김성근 감독 원망을 참 많이 했다.

얼마 후 또 혼이 났다. 김성근 감독은 시야가 워낙 넓고, 심지어 뒤에 있는 선수들도 본다 해서 '잠자리눈'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훈련을 하다가 김성근 감독이 멀찌감치 떨어져 지나가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다 말았다. 분명 날 보기 힘든 위치여서 신경 쓰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이 발길을 돌려 내게로 왔다.
"너, 자존심 세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싫은 소리 하지 않도록 먼저 알아서 해라."

앞뒤도 없는 말씀에 당황했다. 인사를 하지 않은 건 어떻게 보셨는지, 그리고 자존심 얘기는 왜 꺼내셨는지 알 수 없었다. 김성근 감독 아래서 야구를 몇 달 해보니 어렴풋하게라도 그분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야구를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쉬지 말고 노력하라는 뜻이었다. 나이 좀 먹고 야구 잘하는 선수라 해도, 어리고 이름 없는 선수와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다. 야구를 대하는 자세에서 감사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누구라도 엄한 벌을 내렸다. 그분이 야구를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가장 많이 공부하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1년 4월, 내 방망이는 물을 먹은 것 같았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초반 타율은 1할 대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이전 해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3할 타율을 기록했기에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데 이광은 LG 감독이 갑자기 2군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프로 데뷔 9년 만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건 처음이었다. 몇 경기나 했다고 3할 타자를 쉽게 2군으로 보내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팀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았으니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것 같다. 감독 입장에서는 양준혁이라고 해도 성적이 나쁘면 가차 없이 2군으로 보내겠다는 메시지를 선수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억울한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성적이 나쁘니까 항변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

열흘간의 2군 생활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다. 이후에도 나의 시련은 계속됐다. 김성근 감독 아래의 LG에서 나는 1인자는커녕 2인자고 뭐고 없었다. 4번 타자인 적도 있었지만 하위타선으로 떨어진 날도 많았다. 심지어 이 덩치로 1번 타자도 해봤다. 출루율이 높았기 때문에 나를 톱타자로 세워본 것이다. 1번 타자로 나설 때는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내 덩치가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아마도 역대 어느 1번 타자보다 내 덩치가 클 것이다. 그러나 그건 팀이 이기기 위한 김성근 감독의 최선의 결정이었고, 모든 선수들은 그걸 따랐다. 팀을 위해 개인이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 그러면 팀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계기였다.

과거 도성세 감독과 김응용 감독 등 엄한 지도자를 많이 만났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들과는 또 다르게 선수들에게 엄격했다. 김성근 감독은 야구에 대한 절박한 열망과 함께,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근거로 선수들을 설득해 강한 훈련과 독한 경기를 이끌었다. 그분 스스로가 야구에 대해 워낙 엄격했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그분의 진심을 믿고 따랐다.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길의 끝에는 항상 깨달음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그해 말 나는 삼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늘 참된 스승으로 생각했다. 김성근 감독은 최약체 팀을 이끌면서도 늘 4강 이상의 성적을 냈다. 선수들은 그분의 힘을 잘 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우승시키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멍에를 썼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내가 '우승시키지 못하는 4번 타자'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2002년, 2005년, 2006년 삼성에서 우승하면서 한을 풀었다.

이후에는 스승의 차례였다. 2007년 SK 지휘봉을 잡자마자 우승을 지휘했다. 이후 2008년, 2010년 우승으로 명실 공히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에게 중위권 전력만 주어진다면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됐다.

2010년 한국시리즈를 앞둔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양준혁 선수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등록되지 않았는데, 삼성 더그아웃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겁니까?"
김성근 감독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난 이미 은퇴했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없으니 더그아웃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인정상 모른 척해줄 수도 있겠지만 질문을 받은 이상 룰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예상대로 반응은 싸늘했다. "양준혁이 유니폼을 입고 나서는 마지막 경기인데, 김성근 감독이 너무 모질게 대했다", "양준혁이 더그아웃에서 사인을 내거나 훔칠 것도 아닌데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양준혁은 김성근 감독을 고마운 스승이라고 항상 얘기하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너무 냉정했다" 등의 말들이 쏟아졌다.

오히려 내가 너무 죄스러웠다. 김성근 감독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승부에 있어서는 자신에게도 결코 관대하지 않은 분이기에 그랬을 뿐이다. 원칙이 정해지면 죽어도 따라야 하는 분이기에 그랬을 뿐이다. 한국시리즈는 감독과 코치, 1,2군 선수 전체, 그리고 프런트까지 100명이 함께 싸우는 전쟁이다. 연간 200억 이상의 예산을 쓰는 프로 야구단이 1년 실적을 평가 받는 무대다. 그라운드에서는 바늘 하나조차 꽂을 빈틈도 보이지 않는 것, 그게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의 철학이다. 그걸 잘 알기에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더그아웃에 들어갈 수 없어 구단 버스에서 TV 중계를 봤지만 김성근 감독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김성근 감독다운 모습으로 나를 보내주셔서 감사했다.

SK가 2007년 이후 프로야구를 석권하자 많은 팀들은 '타도 SK'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SK가 아닌 김성근 감독을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걸 통해 김성근 감독은 필요 이상으로 독하다고, 그의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성근 감독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독하고 강해야 한다. 그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프로야구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출처 : 양준혁 에세이 <뛰어라!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중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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