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별로 인기가 없다. 오로지 이기는데 열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좀 들쑥날쑥, 때로는 폭발적인 힘을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멸하고 자폭하는 롯데 스타일의 야구야말로 어쩌면 팬들의 사랑을 가장 받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끝까지 발견해내고, 이겼다 싶은 게임을 철저하게 마무리해버리는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을 잘못된 야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승리하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아무래도 보는 눈, 전문성이 다소나마 미흡한 일반 관중에게는 덜 매력적일 순 있겠지만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성근 감독, 그야말로 승부의 化身(화신)인 사람이다. 오늘은 이 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까 한다.

이글을 쓰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독자가 김성근 감독에 대한 글을 써주시면 어떠냐는 메일을 보내왔고, 이에 나는 좋은 생각이지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그 분의 생일이 양력인지 음력인지를 확인하지 못해서 쓰지 못하는 애로가 있다는 답변을 했다.

그랬더니 다시 그 독자 분은 구단에 전화해서 인터넷의 생일이 양력인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 성의를 산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의 생일을 가지고 그간의 일들을 살펴보니 역시!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삶과 야구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에 있어 龜鑑(귀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분이셨다.

김성근 감독의 운세 바닥은 1990 년이었다. 1942 년생이니 우리나이로 49 세였다.

1989 년 하위 팀이던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을 맡아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으나 해태에게 패배하며 탈락했고, 다음 해 바닥운인 1990 년에 돌핀스가 또 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하자 감독직 재계약에 실패했다.

1991 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으나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으로 직업을 이어갔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한 개인이 운명의 바닥지점에서도 이 정도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는 감독직을 맡은 것이 일생의 최고 시점일 수도 있겠지만, 김성근 감독은 운세의 바닥에서도 하위 팀들을 맡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키고 또 우승까지도 노릴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거야말로 운을 떠나 命(명)의 차이인 것이고, 다시 말하면 능력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명이 더 중요하다고 얼마 전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준치는 썩어도 준치인 것이다.)

앞의 글들에서 바닥운을 한 해로 비유하면 입춘이라 했다. 그리고 봄은 처절할 정도로 힘든 계절이라 했고, 그 기간은 15 년이고 그로부터 또 다시 2.5 년의 보릿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모든 것이 뻗어가는 본격 여름이 시작된다고 했다.

1990 년에 입춘을 맞이한 김 성근 감독은 봄의 15 년 동안 중에서 12.5 년 무렵은 穀雨(곡우)로서 씨앗을 뿌리는 때가 되는데 이 무렵의 일이 아주 흥미롭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2002 년 하위권의 LG 감독을 맡아 한국 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아쉽게도 김응룡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했으나 이때 김 감독은 야구의 신, 줄여서 ‘야신’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것이 이 분이 한창 씨를 뿌릴 때의 일이니 ‘야신’표 품종을 우리 야구계에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1990 년으로부터 15 년이 지난 2005 년이면 立夏(입하)를 맞이했다.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여러 차례 말하곤 하는 보릿고개 운이 시작되었다. 국내 프로팀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김 감독은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타격 코치 자리를 얻어 계속 일을 이어갔다. 당연히 시련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릿고개에서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야구를 혹독하게 精練(정련)하고 담금질해낸 김 감독은 드디어 2007 년 운명의 小滿(소만), 본격 여름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SK 와이번스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 뒤의 일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야구에 관심이 있다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성근 야구는 한마디로 지독한 야구, 이기는 야구라 하겠다.

그 지독함에 질리고 식상해버리는 팬들도 많으니 그 또한 관중으로서의 특권이라 하겠지만 철저하게 이기는 야구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김 감독은 오늘에 이르러 야구라는 게임의 맥과 급소를 짚어내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상한 안목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추산이다.

이 분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지, 1998 년 그러니까 1990 년의 바닥인 입춘으로부터 8 년이 지날 무렵 신장암으로 고생했지만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신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서도 바로 야구장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양반이 아닐 수 없다. 수술 후유증으로 어지러워서 서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야구를 떠난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 양반은 이런 사실마저도 무려 10 년이 지나 2007 년 시즌에서 SK 와이번스를 우승시킨 다음에야 주변에 털어놓았다고 한다.

1998 년은 戊寅(무인)년이니 庚金(경금) 일간인 김성근 감독으로서는 명리학상으로 偏印(편인)의 해, 즉 건강이 좋지 않은 해가 되는데 그 해 신장암을 앓았던 것이다. (나 호호당 역시 2005 년 편인운에 건강이 좋지 않았고, 우울증 등등 내심 여러 가지 일로 상당히 고생을 했었다.)

김성근 감독 스스로도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 야구를 그만 둘 때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내 생각엔 계속 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더 해야 한다고 본다. 계속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성근 야구는 이제야말로 한창 물이 올랐다는 말이다.

물론 나이 때문에 감독직을 물려주고 떠날 수도 있겠지만, 물러난다 해도 뒷방 신세를 지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앞으로도 할 일이 정말 많은 분이다.

적어도 이 분의 야구는 2014 년 갑오년에 가서야 활짝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이로 일흔, 그러니 일흔 세 살에 가서야 약간 직성을 풀고 떠나도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 누구보다도 한국 프로 야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남으리라 본다.

나이 48 세에 바닥을 보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 자포자기하고 만다. 하지만 이 분은 그 나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야구를 더욱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장차 관중들의 사랑도 듬뿍 받게 되는 날도 올 것이라 본다.

소나무는 겨울이 되어서야 더 푸르다더니 실로 그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겠다.

틈을 내어 밖으로 다녀왔다, 하지를 앞두고 산하는 온통 백열의 빛으로 가득했다. 그늘이 좋은 계절이 온 것이다.

출처 : http://www.hoh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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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운명이나 사주, 명리학쪽에 관심이 좀 있었는데 <희희락락호호당>이라는 명리학 관련 사이트에서 일반적인 사주팔자가 아닌 인생의 주기와 관련하여 사람의 운명 뿐 아닌 여러 자연현상과 그외 많은 사건을 연관시킨 글에 흥미를 느꼈고 올라오는 포스팅을 많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많은 유명인들의 삶의 굴곡을 조명한 글을 읽던중 우연한 기회에 운영자이신 김태규 선생님께 김성근 감독님의 인생의 주기와 관련한 글을 하나 써주실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고 이것이 그에 대한 답글이다. 저 위에서 말하는 독자란 나를 말한다.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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