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21

SK가 2010 한국 프로야구 통합우승을 이끌어냈다. 4년 내리 한국시리즈에 진출, 그 중 3번 우승을 차지했다. 명실상부한 최강팀이라 불리기 충분하다. 이제 SK는 기존의 변방 이미지를 완전히 씻어냈다.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도 떼어내지 못한 꼬리표가 한가지 있다. ‘재미없는 야구’라는 것이다. 한번 잡은 리드는 좀처럼 역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승부처라 생각되면 선수 교체도 빠르게 이어진다. 번트? 필요하면 1회부터 나온다. SK 야구를 폄하하는 목소리의 근원이다. 


19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시리즈 전체를 삼진으로 마무리 한 김광현이 포수 박경완과 감격스러운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


관점을 바꿔보자. 그럼 SK 야구를 재미있게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 역시 야구 속에 있다.

우선 투수와 포수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그 뒤의 야수들 움직임에 주목해보자. SK 야수들은 공 하나 하나마다 끊임없이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거리가 멀면 사인이 오간다.

볼 배합에 따라 수비할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다. 타자가 바뀔 떄, 또 위기가 찾아왔을 때 SK 야수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눈여겨 보자.

수비수의 움직임이 파악됐다면 다음엔 투수가 던질 공을 예상해보자. 2루수가 1루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아마도 잘 당겨치는 좌타자일 것이다. 2루수와 유격수가 2루 베이스 근처에 있다면 투수는 병살타를 만들 수 있는 확실한 구종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타자라면 정우람의 체인지업도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투수교체를 예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SK 불펜은 좌완 천국이다. 이승호 정우람 전병두로 이어지는 라인은 페넌트레이스를 지배했다. 한국시리즈서는 여기에 큰 이승호(37)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정대현이 있다. 마지막 투수 송은범이 나오기 전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예측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투수당 길어야 2이닝이다. SK 좌완들은 대부분 우타자에게도 강하다. 하지만 정대현은 최근 좌타자를 상대로는 조금 부족한 부분을 보였다. 그렇다면 정대현 투입 시기는 상대 라인업에서 우타자가 2명 이상 연속으로 등장하는 타이밍일 가능성이 높다.

SK 입장에선 그 시기가 8회쯤이 될 떄가 베스트다. 하지만 이전 투수들이 실점은 않더라도 주자를 제법 내보낸 탓에 그 시기가 당겨지게 되면… SK는 보이지 않는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반대로 상대팀은 막강해 보이는 SK 불펜을 무너트릴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한국시리즈를 보자. SK는 4차전을 모두 지배했다. 그러나 위기는 얼마든지 많았다. 정대현 투입 타이밍이 흔들린 경기들이 제법 많았다. 마지막 순간을 조이지 못한 삼성 탓에 경기가 끝이 났지만 모든 것이 SK 예상대로만 풀린 것은 아니었다.

대타의 기용의 복선을 음미해보는 것도 추천할 만 하다. 19일 끝난 4차전. SK가 3-0으로 앞선 6회초 1사1루. 좌타자 김재현이 대타로 등장했다.

3-0에 이미 SK가 승리할거라 지례 짐작한 몇몇 전문가들은 “은퇴를 선언한 김재현에게 마지막 무대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설레발을 떨었다.

김성근 SK 감독의 생각은 그보다 한참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삼성 좌완 차우찬을 끌어내기 위한 카드였다.

차우찬은 5차전 선발이 예정된 투수였다. 이날 경기서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게 한다면 5차전서 길게 던지는 것은 어려워진다. 만에 하나 4차전을 패하더라도 5차전서 다시 흐름을 끌어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 감독은 “차우찬이 등장한 뒤로는 계속 투구수만 세고 있었다. 40개를 넘어가는 순간, 5차전에 대한 1차 대비를 마련했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단순히 우투수를 상대로 좌투수가 나온 것이 아니다. 시리즈 전체의 큰 그림 속에 작은 변화였을 뿐이다. 숨을 길게 쉬며 좀 더 멀리 생각해보면, SK 야구 속에 담긴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지옥 훈련으로 몸은 힘들지만 야구만 하면 되는 SK 야구.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진=연합)


혹자는 SK 선수들이 즐기는 야구를 하지 못해 아쉽다고들 한다. 마치 기계의 부속처럼 쓰여질 뿐이라고도 폄하한다.

SK 야구의 묘미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기계의 부속이라면 지금처럼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SK 야수들은 끊임없이 수비의 위치를 조정한다. 벤치 사인에 의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 호흡을 맞추며 알아서 움직인다.

다카시로 한화 종합 코치는 “한국 야수들은 서로 너무 대화를 하지 않는다. 호흡이 좋은 팀을 찾기 힘들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생각을 맞춰보고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런 시도 자체가 많지 않다. 단 한팀, SK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SK 주장 김재현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최고의 훈련량을 군말없이 버텨낸다. 그 보다 더 대단한 건 야구를 알고 한다는 것이다. 감독님의 사인이 나오면 왜 지금 그것이 필요한지 잘 이해한다. 때문에 성공률이 높은 것이다.”

SK는 감독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팀이 아니다.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팀이다. 기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감독과 선수가 서로 많은 대화를 했던 것도 아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감독과 선수가 함께 흙먼지 속에서 뒹굴며 진심을 보고, 많은 승리를 통해 확신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SK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팀이다. 그러나 경쟁 탈락에 대한 반발은 가장 적은 팀이다. 아무 사심 없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노력만으로 평가받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경쟁의 반대편에 미움이 아닌 인정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이 보여주고 있다.

선수 기용과 활용에 감독의 감정이 개입되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게 되는지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SK에선 없는 일이다.

SK 선수들에겐 자부심이 있다. “어느 팀과 붙어도 우리 야구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SK라면 가능하다. 최근 4년간의 성과가 그를 증명해준다.

SK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가장 당당하게 어깨 펴고 나갈 수 있는 팀이다. 그보다 더 즐거운 야구가 또 있을까.

출처 : http://sports.news.nate.com/view/20101021n06768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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