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29
▲ 김성근 감독은 25일 인천 문학구장 감독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인생을 살면서 옆길을 보지 않았다”며 “그러니까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나를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인천 = 김연수기자
SK 와이번스 김성근(68) 감독의 ‘야신(野神)’이라는 별명은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의 김응용(69·현 삼성라이온즈 사장) 감독이 상대 LG의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감독에게 붙여준 데서 유래했다. 삼성이 ‘우승청부사’로 해태에서 영입했던 김응용은 결국 그해 우승을 하며 삼성의 21년 묵은 한을 풀었으나 당초 쉬운 상대로 점쳐진 김성근에게 혼쭐이 났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6차전까지 가 우승한 뒤 김응용은 방송인터뷰에서 “김성근은 ‘야구의 신’”이라고 말했다. 패장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지만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거다.
2010프로야구 정규리그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내리 4연승으로 우승한 뒤 김성근 감독은 몹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11월 초 대만과 챔프전을 준비하느라 SK선수단이 우승 후 첫 훈련을 한 25일 김 감독을 인천 문학구장에서 만났다. 이어지는 축승행사와 쇄도하는 언론의 인터뷰로 김 감독은 지칠 만했다. 그래도 ‘행복한 피곤’이어선지, 김 감독의 표정은 밝고 맑기까지 했다.
―올 시즌 개막 이후 처음 집에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몇십 년째 그러니까, 집에서도 그걸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그래도 올 한국시리즈는 수월하게 끝내서.
“백조가 물 위에 조용히 떠있지만 물밑에서 요란하듯, 수월했다면 그만큼 보이지 않게 혼신을 쏟은 거지요.”
이미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시리즈 얘기는 했고, 그래서 주어진 한 시간 동안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자고 계획을 했다. 그가 어떻게 ‘야신’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조직야구’로 SK구단을 최강으로 엮어낸 그의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김 감독은 특유의 조근조근 한 어조로 기대했던 걸 풀어주었다. 그가 야구에 눈을 떠간 두 번의 ‘신 내림’(기자의 표현이지만)은 다소 놀랍기도 했고, 한 분야에 전념한 사람이 도달하는 ‘경지’이기도 해 감동을 주었다.
―지난해엔 KIA에 한국시리즈에서 패하고 병원 신세까지 지셨는데. 프로세계에서 대개 그렇다지만, 김 감독은 승부욕이 각별히 센 것 같습니다.
“그걸 승부욕이라 한다면 할 수 없지만, 제 성격상 두 가지 점이 있어요. 우선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남의 탓을 안 했다는 것이고, 그다음에 어중간한 걸 못 견딘다는 거죠. 남의 탓을 안 한다는 건 해명이나 변명을 안 하고 타협도 안 한다는 거예요. 혼자 끙끙 끌어안고 앓는 스타일.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건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는 게 없어요.”
―힘드시지 않나요. 완벽주의이기도 한데.
“페넌트레이스에서도 그렇지만, 완벽하다 할 정도로 준비가 안 되면 답답해서 못해요. 어중간한 건 못 버텨요. 죽기 아니면 살기다, 연습도 그렇게 해요. 나는 권리 주장은 잘 안 하지만 의무와 책임은 성격상 강한 것 같고, 어중간한 건 넘어가지 못해요. 하지만 지나가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정리를 하고 다음 순간을 생각하죠.”
―그런 스타일은 언제부터 생겼나요.
“일본에서 어렸을 적, 워낙 가난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 일을 나가고 혼자였죠. 그래서 부모님이나 형제들의 간섭도 없었지만 누구에게 의존할 형편도 아니었죠. 가난해서 도시락에 간장을 뿌려 학교에 가면 일본 애들이 놀렸죠. ‘이지메’를 수없이 당했어요. 그래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남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때부터 있었어요.”
―일본에서 야구는 어떻게 했나요.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했는데, 지붕으로 흙을 던질 때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어요. 버스를 타면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았죠. 일부러 서서 중심 잡는 연습을 했어요. 우유배달도 했는데, 매일 도는 시간을 체크해 단축했어요. 그게 즐거움이었죠. 이런 환경에서 버텼으니까, 뭔가 잘 돼야 한다는 욕망이 늘 꿈틀거렸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립심이 길러졌군요.
“결정적인 건, 운동을 위해 한국으로 영구귀국할 때 어머님이 ‘네가 결정한 것이니까 네가 책임져라’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때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 저 혼자 영구귀국도 결정했고 비행기 타는 순간까지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오사카(大阪)공항을 뜨는 순간 어머님의 말이 가슴에 사무치더라고요. 이것이 어머니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 그때부터 김포공항까지 내내 울면서 왔어요. 비행기에서 내려오면서 다짐을 했죠.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가 되겠다고.”
―혈혈단신으로 국내로 들어와 어려움도 컸을 텐데.
“국내에서 팔꿈치와 어깨 부상으로 현역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했죠. ‘다음엔 어떻게 사냐’ 싶었죠. 지도자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남에게 청탁하고 부탁한 적은 없어요. 물론 여러분이 도움을 주셨지만. 자기 스스로와 싸움의 연속이었죠. 어떡하면 할 수 있지, 항상 그런 생각, 좋게 말하면 공부의 과정이고 달리 얘기하면 나는 왜 이렇게 모자라느냐, 라고 하는 자신과의 투쟁이었고.”
야구에만 전념하는 삶이었다. 그러다가 프로구단 쌍방울 감독 때 그는 야구에 대한 안목이 크게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팀에 가건 그 팀 선수들의 과거 3년간 기록을 자세히 봅니다. 거기서 방향성이 나오죠. 쌍방울은 선발투수 승률이 3할이 안 됐죠. 박경완(SK·포수)이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지만 당시 쌍방울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수비가 끝나고 더그아웃에 들어오면 투수에게 왜 그따위 볼을 던졌느냐고 다그치곤 했어요. 이들 재목(材木)들을 어떻게 끌고 갈 건가. 방법은 연구와 관찰밖에 없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오면 밤 11시, 밥을 먹고 자정이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는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요원도 없었다. 밤새 데이터를 정리하고 나면 먼동이 텄다. 야구장까지는 승용차가 있지만 걸어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또 경기장까지 걸어가면 이긴다는 징크스도 있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다른 사람하고는 상대가 안 되는 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 야구를 보는 눈이 확 커지고 깊어지더라고요. 갑자기 상대선수들, 코칭스태프의 몸동작 하나하나가 TV 방송의 느린 화면처럼 눈에 잡히더라고. 보는 눈이 달라진 거죠. 확확 들어온다고 할까. 이 상황에선 이렇게 할 거고, 저 상황에선 저렇게 할 거라는 게 다 보이더라고.”
상대의 사소한 행동이나 버릇까지 눈에 잡히니, 마치 야구장을 현미경으로 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놀라운 경험이다.
“놀랍고 즐거웠죠. 가난한 사람이 신이 내린다고 할까. 재목이 없는데 어떡하면 살 수 있지? 어떡하면 배부르게 밥 먹을 수 있지, 하고 연구하고 관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놀랍군요. 그런 경험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나요.
“나한테는 그런 도약의 경험이 두 번 있었어요. 쌍방울 때는 상대의 움직임이 보였고, LG에 있을 때는 우리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그렇게 보이는 경험을 했죠. 우리 투수들의 상황이 어떤지 볼 하나하나에서 알 수 있겠더라고. 2002년 삼성과 한국시리즈를 할 때예요. 삼성한테 LG가 시즌 때 무지하게 약해서 대구에선 노상 졌어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PO)를 거치면서 리그 1위 삼성과 만났죠. 더그아웃에 앉아 상대 더그아웃을 봤는데, 김응용 풍채가 크잖아요. 그런데 딱 보니까 아주 작아 보이더라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김응용이 불쌍하구나’ 싶었어요.”
―그것도 희한합니다.
“그해 4월부터 LG는 나를 자르려고 했어요. 준PO도 이기고, PO에서 이겨도 자른다 했죠. 그러니까 한국시리즈에 갔지만 나는 자리에 대해 연연함이 없었어요. 마음을 비우고, 자! 삼성 와라, 배짱 있게 붙어주겠다, 하는 생각이었죠. 반면 김응용은 우승의 부담 때문에 무척 위축돼 있었죠. 벤치에서 보는 순간 ‘뭐야 김응용이 완전히 굳어 있네’ 싶었어요. 그 순간, 아! 감독을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승부는 이런 거구나! 싶은 거야. 그게 두 번째 변화였어요. 우리와 상대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변화였죠.”
앞서 얘기한대로,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컵은 김응용 감독이 가져갔지만 그는 우승에 대한 부담이 무척 컸다. 삼성으로 옮기고 첫해인 2001년에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패했고 두 번째 한국시리즈였다. 가까스로 우승을 한 뒤 김응용이 김성근에게 대뜸 ‘야신’의 별명을 왜 붙여주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선 어땠습니까.
“그 두 개 변화가 합쳐진 게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나타났어요. 상대와 우리가 다 훤히 보이니까 ‘훈수꾼’의 입장에서 경기를 한 거지. 감독 입장이 아니고 옆에서 가만히 경기를 지켜보듯이 한 거예요. 양쪽이 다 보여요. 4차전에서 선발 글로버를 가만히 보니까 5회가 되니 4회까지 안 하던 동작을 하더라고. 아, 왔구나 싶어. 글로버 얘가 뭔가 욕심이 왔구나. 바로 교체했죠. 투수코치도, 글로버도 왜 바꿀까 싶었을 거예요. 상대 벤치가 어떻게 나올지, 그것도 하나하나 보였어요. 나한테는 획기적인 경험이죠.”
한마디로 놀랍다고 할 수밖에. 김 감독이 농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신이 들린 걸까?
몇 년 전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에 있는 법장 스님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에서 요가와 위파사나 명상수행을 오래 한 자신의 도반의 경험이다. 위파사나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 때 처음엔 사물들의 움직임이 마치 고속카메라로 찍은 필름이 천천히 돌아갈 때처럼 ‘슬로비디오’로 보였다. 그다음엔 마음의 움직임도 그처럼 천천히 보이더라고 했다. 사실, 수행을 오랫동안 제대로 한 스님이나 재가 수행자 중에도 이런 경험은 종종 듣는다.
그래서 김 감독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불교수행을 하신 적이 있으세요.
“어머니는 불교였고 집사람이나 아이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나는 종교가 없어요. 그 이유가, 무식한 얘긴지 몰라도, 뭔가에 기대면 약해진다는 신념 때문이에요.”
―사실 수행자들 사이에 감독님 같은 경험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거보다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절실함 속에 살았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나라에 와서 선수와 감독을 하면서 더 커진 절실함이죠. 수행자다 뭐다 하는 건 잘 모르지만 제게 어울리지 않고.”
아무런 의지도 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늘 벼랑 끝에 서듯 절실하게, 야구 하나에만 파고든 김 감독의 삶은 수행의 입장에서 본다면 간단치는 않다. 보통 수행의 세 요소로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말하는데, 김 감독이 야구로 뚫어온 거친 삶은 수행자의 삶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겠죠.
“우리팀이 경기가 안 된다 싶으면 감독인 저부터 뭔가 흥분하거나 욕심이 들어 있어요. 올 시즌 연패를 할 때도 혼자 송도의 아파트까지 길면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가요. 이리저리 생각해요. 그 놈아가 왜 그렇게 했지? 저 놈아는 왜 그리 못해줬지? 나는 뭐했지. 거의 도착할 무렵 딱 결말이 나는 거야. 결론은 김성근이 네가 문제 아니냐, 맞다! 나다. 남에게 왜 기대고 남에게 왜 책임을 전가 시키느냐. 집에 가 머리를 밀어버리고 잊어버렸어요. 이후 마음을 비우니 경기가 다시 선명하게 들어왔어요. 우리팀이 다시 연승을 하게 됐지.”
화제를 돌려보았다.
―김 감독이 좋아하는 말 중에 ‘적재적소’(適材適所)와 ‘일구이무’(一球二無)가 있는데요.
“쌍방울 있을 때는 팀의 살림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어요. 적은 재목을 가지고 살림을 하자면 어떻게 하나. 먼저 투수 운영에 눈을 떴어요. 김 아무개 투수는 선발로는 못 내지만 러너 1, 2루에서 내도 돼. 최 아무개는 만루에서 내도 된다. 상황마다 통하는 피처들을 볼 수 있게 됐죠. 사람들은 내가 무지막지하게 피처를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선수들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선수기용을 그때 배웠어요. ‘적재적소’란 말이 그때 나에게 온 거죠. ‘적재적소’는 전력의 극대화죠. 왜 배웠느냐. 가난해서 배운 거예요. 가난은 절박함이고. 절박하면 나온다, 어중간하면 나오는 게 없다. 잔소리와 변명밖에 안 나온다, 이거죠.”
―일구이무는.
“간단히, 인생은 두 번 없다. 한 번이니 잘 살아야 한다. 이 순간도 한 번 밖에 없다. 한순간 한순간 얼마나 잘 아껴서 잘 사느냐는 문제죠. 내일이 있다는 발상에서 오늘은 희미해져요.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 그거는 도망가는 거지. 그거 제일 싫어해요.”
―김 감독의 리더십은 절실함 속에서, 야구에 집중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인생의 성공자는 시행착오가 많은 사람 중에 나온다고 봅니다. 실패를 거듭한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선수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라. 멈추지 마라. 저의 경험에서 나온 대로 얘기해주고 실행하게 하죠.”
―스스로 돌아보시면 인생에서 성공하신 건가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남았어요.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야구선수를 깡패 취급했어요. 무식하고, 운동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취급해요. 사실 선수가 끝나고 지도자 생활을 하는 사람은 소수고 대개 장사를 하죠. 언젠가 이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2년 전부터 제가 여기저기서 불러주면 마다하지 않고 강의를 나가는데 야구선수도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튼 국가기관이나 대기업에서 저에게 꾸준히 강의를 요청하는 걸 보면 야구감독에게 배울 게 있다는 긍정적인 거죠. 그래야지 후배들에게 길이 열려요.”
―끝으로 송구한 질문 하나 드립니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일흔인데, 언제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 혼자 되는 일은 아니니까…. 확실한 건 내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야구를 위해서지 그냥 살기 위해 하는 거 아니다, 그건 확실해요. 기회가 있으면 영원히 하고 싶고, 그것이 김포비행장에 내렸을 때 나의 목적이고 사명감이었어요.”
인터뷰 = 엄주엽 체육부 부장대우
출처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0290103293300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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