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장상용.하남직]


▶만화와 야구, 좌절과 극복

이 "저는 이런 주인공을 하나 만들고 싶었어요. 아직 아무도 만나지 못한 인물. 그래서 까치 오혜성이라는 반항아를 낳았죠. 그 캐릭터로 모든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소재는 직관에서 찾았어요. 친구들하고 술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술주정꾼 아버지에게 맞은 야구 선수는 어떻게 자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죠. 캐릭터 인기 덕일까요. 아니며 술 자리에서 시작한 그런 이야기들이 사회 흐름과 맞았던 것일까요. 오랫동안 인기 작가로 있었습니다. 저는 만화가의 삶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멋있는 직업이 야구감독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잖아요. 감독님의 직업에 만족하시고 계신지요."

김 "2011년 8월에 SK에서 해임되고, 10월에 일본에 갔어요. 야구장 관중석에서 맥주 한잔 하면서 일본 포스트시즌을 보는데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왜 여기서 경기를 보지'라는 생각을 들더라고요. 소외감이랄까. 2011년 SK에서는 경기 뒤 거의 매일 술을 마셨어요. 패한 일이 많았고, 구단과 마찰도 잦았으니까. 위가 늘 아프더라고. 감독 그만두니 속은 편해졌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졌지요."

이 "30년 이상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가 뭐죠'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죠. 나는 '밥 같은 거. 먹어도 먹어도, 배가고프고 질리지 않는. 그래서 지금도 그리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감독님께 야구는 무엇입니까."

김 "영원한 도전. 야구에는 끝이 없어요. 강물을 볼 때, 늘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들 하잖아요. 하지만 강물은 매일 다르게 흘러요. 야구를 매일 가르치지만, 매일 다릅니다. 그런 변화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훈련이지요.

제가 훈련을 많이 시키는 감독입니다. 이유가 있어요. 선수들의 미래가 나에게 걸려 있거든. 이건 내 삶의 큰 테마입니다. 선수는 만지기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나 철두철미 해야 하나'를 생각해요. 만들긴 쉬워도 가꾸기는 어렵죠. 난 자주 어깨를 다쳐요. 펑고를 직접 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생각도 해요. '내 어깨에 많은 애들의 목숨이 달려있으니까, 난 자주 아파도 된다'고."

이 "저는 절필에 대한 유혹에 자주 빠졌어요. 가장 큰 이유가 외압이죠. 예전에는 줄거리와 제목을 사전 심의실에 넣어야 했습니다. 심의실에서 통과해야 제작할 수 있었죠. 심의실 낼 때는 '착한 만화'로 포장해요. 실제로 만들 때는 '악한 사람, 나쁜 놈'을 만들 수밖에 없죠. 나중에 심의실에서 ' 이 놈이 사전에 제출한 줄거리로 그리는 지'를 심사합니다.

두번 적발되면 경고를 받습니다. 작가들은 경고에 겁을 내지 않는다. 가진 건 종이와 펜, 머리 뿐이니까. 그래서 경고를 출판사에 줍니다. 군부독재 때는 모든 게 가능했잖아요. 국가가 '이현세가 또 그렇게 그리면 너희 출판사 폐간한다'고 압박했죠. 만화가들이 남산(안기부)으로 끌려간 적도 있어요. 거기에 만화가들을 모아놓고 자정운동 맹세를 하래요.

마침 비도 부슬부슬 오는데…. '일, 우리는 불경한 만화 그리지 않는다. 일, 우방을 비방하지 않는다. 일, 미풍양속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 자존심이 상하는데 개인의 힘은 미약하니까. 만화를 그만둘까,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김 "저도 남 때문에 야구 못한 적이 있긴 해요. 퇴장을 가끔 당했지요. 여기 전주에서도 쌍방울 시절에, 항의하다 퇴장당했어요. 뒤에 손을 놓고 항의했는데 심판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하더라고. 5경기 출장금지에 벌금 500만원. 사실 일부러 퇴장당한 적도 있어요. 쌍방울은 가난한 구단, 현대는 부자구단이었어요. 선수들이 현대만 만나면 부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선수들에게 의욕을 살려주려고 현대랑 만날 때는 더 강하게 어필했죠. 그런 싸움은 내가 해요. 감독은 선수를 움직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살기위해 선수를 움직이지 않아요."

이 "저는 '천국의 신화' 때문에 6년동안 재판을 했어요. 그 기간 중에는 만화 안 그렸죠. 그때 벌금이 작가와 출판사 각각 300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300만원이 아니라, 3만원도 벌금이고 전과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최고 만화가라는 내가 그런 물리적인 힘에 '졌다'라고 승복하면, 내 후배들은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겁니다다. 출판사는 벌금을 냈지요.

장사를 해야하니까, 이해해요. 그러나 나는 싸웠어요. 귀찮은 일이죠. 해외에 나가려면 검찰청에 나가 도주할 위험없다는 증명서, 법원에서 재판이 잡히지 않다는 증명서. 경찰서에서 보안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했거든요. 300만원 내면 자유였죠. 그러나 부당한 것에 타협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없는 죄를 인정하고 자유를 얻는 게 나와 맞지 않았어요.

또 내 뒤에 수많은 희생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깡패잡듯이 만화가를 불순 세력으로 모는 악순환을 끊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부당함과의 투쟁, 자존심하고의 투쟁이었습니다."

김 "저도 야구 선배께서 현장에 계셨다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선두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야구 선수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했습니다. 우리 세대에 대한 가능성을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재판은 언제 받으신 건 가요."

이 "40대 초반이었죠. 저는 30대에 최고 작가가 됐습니다. 40대에 하고 싶은 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니까 50대가 됐더라고요. 가장 창작욕구가 충만해야할 시기에,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쉽습니다.

심의라는 물리적인 힘에 40대를 갈취당한 기분이랄까. 내 40대. 재판과 술, 담배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40대에는 '투쟁에 대한 기록'에 파묻혔어요. '역사는 투쟁이고 그 기록을 남겨야 해.' 그래서 역사만화를 택했습니다. 50대가 되니까 용서와 포기를 배우게 되더라고요. 세상에 용서못할 것은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역사는 순리구나. 결국 강은 흘러간다. 물고기가 강을 바꾸지는 못한다. 시대에 맞춰서 역할을 한 걸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2년을 향해 던지는 화두, 감성

이 "저는 '땅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기록을 통해 내 자취도 남기고. 작게는 가족에게 크게는 만화 동료·애호가들에게 자취를 남기고 싶었어요. 얼마전부터 예전 만화 보니까 '왜 이런 얘길 했을까. 맞지도 않구만. 얻은 게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바람같은 존재였어요. 한 시즌을 풍미를 했지만, 그저 바람이었던 겁니다. 땅이 되어서 풀을 자라게 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김 "화백께서 겸손하셔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다. 시작이 있으니, 후배들이 그 길을 걷는 것 아닙니까. 시작이 중요합니다. 화백께서는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사셨습니다. 선배가 위기를 극복하니까, 후배들이 편안하게 창작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저는 최근 새로운 가치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만화를 통해 했던 이야기가 과연 맞는 것일까를 고민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어떤 만화를 그릴까를 걱정하고요. 물론 저는 만화를 계속 그릴 겁니다."

김 "얼마 전에 일흔이 됐습니다. 그런데 옷차림은 20대죠. 나를 나이 속에서 보호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앞에 가고 싶은 마음이죠. 지금 아이들과 야구를 합니다. 아이들보다 체력에서 앞에 가야 그들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런 터전 속에 살아 가야하지 않을까요."

이 "저는 운동을 싫어합니다. 만화가 사회인야구 구단주이기도 하고 월성초등학교 때 야구부를 잠깐 하기도 했는데, 천성이 좀 그런가 봅니다. 군대에서도 구보를 하루종일 했습니다 전력질주가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뛰어서 택시나 버스를 탄 적도 없어요. 술 마신 뒤 친구는 집에 도착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택시 잡고 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스포츠 만화는 제가 가장 많이 그렸네요. 까치가 '저의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저는 행동하지 않은 양심이니까요. 그래서 까치를 더 많이 훈련시킵니다(웃음). 전 노래와 춤도 안합니다."




김 "저도 노래, 춤 안합니다."

이 "감독님은 그림을 안 그리시고, 나는 야구를 안하네요."

김 "화백께서는 다른 재능 때문에 운동을 할 필요가 없던 것은 아닐까요."

이 "그럴지도요. 방학이 되면 방안에서 그림만 그리는 제가 있더라고요. 저는 감독님의 재능을 '감성'이라고 봅니다. 야구에 감성적으로 접근하니, 영혼이 들어가는 거죠. 한 소설가는 '만년필로 쓴 소설은 영혼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컴퓨터로 쓰면 영혼이 안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감성적인 사람입니다. 젊은 세대들도 '감성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보면 온갖 일을 다 겪었네요."

김 "높은 데 계셨으니까, 바람이 있는 것 아닙니까. 낮은 곳에 있으면 바람이 없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창작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공포의 외인구단을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강한 것은 아름답다', '세상을 살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지는 않겠다. 대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네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였습니다. 이런 철학적인 메시지 속에 30권을 펴냈습니다. 감독님이 살아오신 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김 "감독할 때는 온 몸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외롭죠. 그러나 낙이 있습니다. 외롭다는 것은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선행주자는 늘 외롭습니다. 화백도 혼자서 투쟁하셨던 것 아닙니까. 얼마나 힘들게 사셨나 싶어요. 그러나 외로움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야지 타협은 하면 안되죠. 요즘 선수들 중에 인터넷을 통해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해졌다는 뜻이에요."

이 "저는 약해지지 않겠습니다. 감독님께 또 다른 에너지를 받았으니까요.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깊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캐리커쳐는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이현세는

1983년 야구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발표하며 한국 만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한국 만화 역사상 최대 히트작으로 성인 독자들을 대본소(만화가게)로 끌어모았으며, 수많은 아류작을 파생시켰다.

1979년 '시모노세키의 까치놀이'로 데뷔했으며,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해 '국경의 갈가마귀' '남벌' '천국의 신화' 등 수많은 히트작을 발표했다. 현재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최근 출간한 '이현세 만화 세계사 넓게보기'(전 15권)도 호평을 받고 있다. 베스트셀러인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에 이어 교양학습만화의 강자로 자리잡았다. 특히 전세계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독보적이다.




▶김성근은?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김성근 감독은 1965년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했다. 가족은 극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한국 국가대표가 되겠다. 나중에는 한국 최고의 감독이 되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깨 부상으로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어야했던 그는 1969년 마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에게 야구는 종교이자 신념이었다. 아마와 프로에서 열 세번의 해고를 당하면서도 "야구를 무시하는 일은 참을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켰다.

전주=장상용 기자· 하남직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068270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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