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장상용.하남직]


임진년(壬辰年)이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벽을 넘고 틀을 깨는, 소통과 화합의 장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소망을 담아 신년특집 대담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지금까지 만나기 어려웠던, 만나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던 이들의 특별한 만남을 일간스포츠가 주선합니다.

이현세(56) 화백이 김성근(70) 고양 원더스 감독의 얼굴을 그렸다. "제가 주름이 좀 많죠? 최근에 살을 7㎏ 정도 뺐습니다. 주름이 더 늘었어요"라는 김 감독의 말에 이 화백은 "세월이 묻어나옵니다.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있어야 멋이 풍기거든요"라고 답했다. 3분 뒤 이 화백이 캐리커쳐를 들어보인다. 한국 만화의 거장이 그린 한국 프로야구 명장의 모습.

이 화백은 '세월까지 그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긴 세월 존경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세월이 묻어나온' 캐리커처를 받아든 김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김 감독은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 얼굴을 누군가 그린 건 처음입니다. 가보로 삼겠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화백은 "제가 영광입니다"라고 화답했다.

거장과 명장이 만났다. 이 화백은 지난 해 12월 27일 오전 7시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자택을 떠나 전주로 향했다. 전주야구장에서 훈련 중인 김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화백은 붓과 종이로 '공포의 외인구단' 손병호 감독을 만들어냈다.

김성근 감독은 한국 최초의 독립팀 고양 원더스를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키우고 있다. 이 화백은 "김 감독님을 꼭 뵙고 싶었다"고 말했고, 김 감독은 "나도 만나뵙고 싶다. 그러나 지금 막 탄생한 고양 원더스의 훈련을 지켜봐야 한다. 전주로 내려오실 수 있으신가"라고 물었다. 이 화백은 김 감독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 감독은 열 세차례나 해고됐다. 이 화백은 국가를 상대로 6년간 법정다툼을 벌였다. "뛰는 걸 창피하게 생각합니다"라는 이 화백과 달리 김 감독은 늘 선수들과 함께 움직인다.

인터뷰 직전까지 "두 분의 대화가 잘 진행될까"라는 걱정을 한 이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 감독과 이 화백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한 시간으로 예정했던 둘의 대화는 2시간30분이나 이어졌다. 선두에 서서, 온갖 바람을 맞아가며 살아 온 세월. 둘의 대화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겼다.

▶200㎞를 달려, 실존하는 손병호 감독을 보다

김성근 감독(이하 김) "주위 모든 사람이 이현세 화백을 아십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길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이현세 화백(이하 이) "최근 TV에 가장 많이 나오시는 분을 뵙게 됐습니다. 영광입니다. 200㎞ 정도였던 것 같은데, 멀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김 "화백을 뵈니 떠오르는 일이 있네요. 태평양 감독 시절, 사장과 단장 두 분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완도로 가자'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섬에서 야구를 합니까'라고 물었죠. 그러니 두 분이 '책도 못봤나'라고 나무라시더라고. 알고보니 공포의 외인구단은 '외딴섬'에서 훈련했던데요."

이 "사실 저에게 야구는 정말 '죽여주는' 소재였죠. 당시 심의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아십니까. 선수가 불의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돈과 관련된 승부조작·선수 사고팔기도 심의에 걸렸어요. 현실에는 있을 법한 일인데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니까.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인 거죠. 새마을운동 때문에 초가집도 못 그리고, 일본과 사이가 안 좋을 때는 기모노를 그리는 것도 문제 삼았어요.

그런데 1982년에 프로야구가 생겼죠. 서로 이기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스카우트 하면서 파문도 생기고. 어느 한팀을 응원할 수도 있고요. '이제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프로야구 출범은 저에게도 큰 기회였던 것이죠. 그렇게 외인구단이 탄생했습니다."

김 "지금은 마음대로 그릴 수 있나요."

이 "저는 천국의 신화라는 만화 때문에 음란 폭력 작가로 찍혔습니다. 6년동안 재판을 했죠. 우리 민족이 역사를 그린 만화였는데 옷을 입지 않은 태초의 모습을 문제 삼더라고요. 6년을 싸웠습니다. 그 덕에 지금 후배들은 스트레스 없이 만화를 그릴 수 있죠."

김 "1980년대부터 저는 야구인들의 위치를 위해 싸웠습니다. 구단과 야구인 사이에서 야구인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바람에 해고도 당했고, 비난도 많이 받았죠. 후배들이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시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 있다."

이 "작가들에게 감독님은 좋은 캐릭터입니다."

김 "나는 '문제아'니까."

이 "공포의 외인구단 손병호 감독도 그렇습니다. 손 감독이라는 괴짜 감독이 주인공입니다. 손 감독은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상처입은 선수들을 모아 외인구단을 만들죠.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선수들에게 '너희들이 지옥훈련 해주면, 세상에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리고 섬에 들어가 강훈련을 하지요. 선수들에게 또 약속을 합니다. '이 훈련을 모두 소화하면 사생활에서는 자유를 주겠다. 극한의 훈련을 소화했고, 강해졌으니까. 사실 외인구단의 모태는 삼미 슈퍼스타즈 입니다. 그런데 손 감독은 감독님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김 "나와 화백이 비슷한 것 아닌가요.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나에게 외인구단은 태평양입니다. 외인구단이 훈련한 외딴섬는, 태평양 시절 오대산이죠. 추운 겨울에 오대산으로 가서 훈련했어요. 구심점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태평양은 김일권과 같이 다른 팀에서 그만 둔 선수를 모아서 창단했어요. 오대산에 갈 때, 쌀과 같은 취사도구를 각자 준비하게 했습니다. 구단 돈을 쓰지 않았죠. 팀 일원으로서의 자세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팀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야구선수가 왜 오대산?'이냐고 묻더라고. 세상 사람들이 내 뜻을 몰랐죠. 나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말이죠."

이 "뜻대로 팀이 움직였나요."

김 "선수들과 나는 마음을 주고받았죠. 그런데 구단이 문제였어요. 1990년 시즌을 앞두고 임호균 각서 파동이 있었습니다. 구단에서 임호균을 방출시키려고 했어요. 1989년에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이 잘했거든. 그러니까 구단에서 '고참들을 버리라'고 하더라고요. 야구를 모르니까요. 젊은 투수들은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요. 베테랑들이 필요하죠. 나는 '임호균·양상문을 버리지 말자'고 했고, 구단은 버리라고 고집했어요. 임호균은 '미국 가겠다'고 하더라고. 내가 '돈 있냐'고 물었더니 '없습니다'라고 해요. 임호균에게 '1년 더 봐줄게'라고 약속한 뒤 구단에 '임호균 5승을 책임진다'고 했죠. 그런데 다음날 '선발 5승'으로 조건이 바뀌더라고. '안되면 500만원 내가 내겠다'고 나섰어요. 그게 임호균 사건이다."

(임호균은 5승 달성에 실패했다. 임호균을 5승 투수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임호균을 쓰지 않았다. '내가 손해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500만원을 내놨다.)

이 "이런 부분이 손 감독과 비슷합니다. 만화에서 손 감독은 구단주와 계약할 때 '50승, 100승을 못 이루면, 돈을 하나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구단주는 팀이 90승을 이뤘을 때 '어떻게 하면 돈을 안 줄까'를 고민합니다. 팀 내 선수들도 매수해서, 경기를 방해하기도 하고요. 만화니까, 극단적으로 표현했는데 감독님은 실제로 비슷한 일을 겪으셨군요."(손 감독은 심장마비로 죽는다.)

김 "그건 닮으면 안되지(웃음)."





▶2012년의 외인구단, 고양 원더스

이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리면서 머리 속에서 '어떤 훈련을 해야할 지'를 상상했습니다.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통과의례를 겪잖아요. 특별하고 강한 훈련을 생각했죠. 그런데 상상력을 총 동원해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니까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실제로 무척 특이한 훈련을 하시던데, 알려지지 않은 훈련법이 있으신가요."

김 "태평양 시절에는 물 속에서 투구 폼을 잡게 했어요. 여기 고양 원더스 아이들에게도 같은 훈련을 시킵니다. 물 속에서 물을 가르는 동안 손목 힘이 좋아지고, 악력이 커지거든요. 야구 교본 아닌, 경험에서 터득한 겁니다. 극한 상황 속에 살았으니까,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일본 갔을 때 100엔 샵에서 망치를 보고 '이걸로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24시간 동안 야구를 생각합니다. 이건 승부욕이죠. 절실해지고, 새로운 힘이 나옵니다. 고양 원더스 아이들에게 '성공하는 사람은 1군 올라가라. 만약 안된다고 하더라도 인생 배우고 가라. 갑갑한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은 인생에서 플러스 요인이 된다. 그 시절이 그리워질거다.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전력투구를 하라'고요."

이 "감독님, 곧 영화 주인공 될 것 같습니다."

김 "허허, 만화 주인공으로 그려주셨으면 더 좋겠는데요. 그런데 저는 영화 주인공보다 좋은 스승이 되고 싶어요. 매일 밤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 두번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고, 포기도 했으니까. 습관을 바꾸고 싶어요. 변화가 보입니다. 외야 앞에 갈까 말까 한 타구를 보냈던 선수들이 이제 펜스 근처까지 공을 보내요.

기자를 통해 들어보니까, 선수들이 재밌어 한다더라고요. 이제 저와 일치가 되어가는 것이죠. 환경이 조금 아쉽긴 해요. 운동장 3개만 있으면 타자들 하루에 3000~4000개의 공을 치게 할 수 있거든요. 지금은 (하루에)1000개 정도 칩니다. 구단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돈을 아끼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시간 손실도 생각해야 해요.

한달 동안 운동장 4개 빌려 훈련하면, 선수들이 엄청나게 성장합니다. 아마 5~6억원 정도 더 쓰는 걸 거에요. 이미 50억원을 썼다고 해요. 그런데 5~6억원이 아까워서 그 효과를 못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5~6억원을 더 쓰고, 60억원 이상의 효과를 얻는 게 낫지 않나요."

▶밀도있게 사는 법

이 "저는 30년 넘게 만화를 그렸습니다. 5만 시간 정도 만화를 그렸을 때, 비로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 그려지더라고요. 내 마음 속에 카메라를 가진 것처럼 느꼈지요. 야구 같은 경우에도 짧은 시간에 일류가 되지는 못할텐데. 그런 면에서는 훈련은 희망이 아닐까요."

김 "그렇죠. 그래서 저는 제가 먼저 움직입니다. 코치들에게도 안 맡겨요. 며칠 전 여기 눈이 왔어요. 내가 새벽에 와서 눈 치웠죠. 코치들이 내가 안보이니까 구장으로 왔죠. 다 나와서 눈치웠고, 정상적으로 8시에 훈련했어요. 양만큼이나 중요한 게 밀도에요. SK 감독 시절에 훈련시키면서 '이러다 선수들 쓰러지면 어쩌나'라고 걱정하기도 했어요.

자체 평가전을 해도, 실전처럼 해요. 투수들이 몸쪽 공을 던지고, 포수들 인대가 나가고. 속으로 조마조마 하면서도 선수들을 더 다그쳤어요. 7시 일어나서 10시까지, 밀도가 다른 훈련을 했조. 그때 야수들은 네 군데서 타격훈련 했어요. 선수들이 그렇게 해주면, 지도자는 더 고민해야죠. 훈련 끝나고 방에 들어오면 잠이 오지 않아요. SK라는 팀을 그렇게 만들었죠. 그 속에 아이들이 성장하다보니까. 희망이 생겼고요."

이 "만화 얘기를 더 해볼게요. 저에게는 문하생과 학교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만화는 과도기에 있어요. 출판 만화는 경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웹툰은 좋은 기회를 맞았어요. 누구나 쉽게 만화를 그려서, 발표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300페이지 잡지에 열 명의 작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사람 당 30페이지를 책임집니다.

한 페이지도 더 그릴 수 없고, 덜 그릴 수 없었죠. 컴퓨터는 무한대 아닙니까. 양이 더 붙으면 더 그려버리고, '10페이지만 해야지'라는 생각에 덜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이트가 망가지지 않지요. 누구나 쉽게 창작을 하다보니 예전 작가들만큼 책임감이 없어요. 출판만화와 웹툰이 공존하는 과도기인 거죠. 웹툰에도 책임감과 밀도가 있는 작품이 나왔으면 합니다.

웹툰 작가들은 하루 하루 읽기와의 전쟁을 펼칩니다. 쉬운 소재로 말초적인 만화를 그리죠. 시세에 민감하고 누가 먼저 올리나를 경쟁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포털이라는 회사는 작가를 키울 것인가를 생각 안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작가들이 경쟁하니까. 10등까지만 타이틀 작가로 쓰면 되죠. 나머지 290명에는 관심이 없어요. 작가가 소모품이 됐어요. 그것을 조정해 줄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화 시장을 끌고 가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지를요."

김 "만화나 야구나, 진실과 밀도에 소홀한 것 같아요. 매년 야구 시즌이 끝나면 포스트시즌 뒷풀이 방송을 하지요. 그런데 진 팀에게도 '잘했다'라고 해요. 저는 LG 감독이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실패했어요. '잘 했다'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저는 두고두고 아쉬원하는 장면이 있어요. 6차전에서 4점차로 앞서고 있을 때, 번트 사인을 냈어요.

그런데 코치가 놓쳤죠. '아, 졌구나' 싶었는데 진짜 졌어요.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은 5점 차면 경기를 포기해요. 그러나 4점차에는 욕심을 내죠. 그때 한 점을 더 달아났다면, (투수) 이상훈을 7차전으로 돌릴 수 있었고 한국시리즈 승자가 될 수 있었을텐데…. 결국 마해영·이승엽에게 홈런을 맞고 패했죠.

나는 그때 패했어요. 시리즈에 나가면 이겨야 합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잘했다'라는 생각은 패자의 발상입니다. 프로는 1등이에요. 아쉬움이 있어야 발전이 있습니다. 4강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승부세계에 들어설 자격이 없어요. 삶의 밀도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거죠."

전주=장상용 기자· 하남직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068267

Posted by 개살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