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27

SK 김성근 감독의 하얀 수염이 언제까지 자라날지 아무도 모른다.그러나 분명한 건 그 수염이 주는 메시지는 이미 모든 이에게 전달됐다는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SK 김성근 감독의 수염이 화제다.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이 턱밑에 덥수룩하게 났기 때문이다. 어떤 야구관계자는 김 감독의 수염을 보며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와 판박이라며 “앞으로 김달프로 불러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김 감독이 수염을 기르게 된 사연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4월 13일 대전 한화전에서 에이스 김광현을 등판시키고도 1-2로 역전패하자 김 감독은 잠을 자지 못했다. 날이 새도록 어째서 패했는지 복기와 분석을 거듭했다. 그러다 ‘깜빡’ 하고 면도를 지나쳤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김 감독에게 그라운드는 성지(聖地)다. 항상 소금처럼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밟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샤워와 면도는 기본이려니와 깔끔하게 정리된 유니폼을 입고 나온다. 과거 젊은 기자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그라운드에 들어왔을 때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며 면박을 준 건 유명한 일화다.

그런 김 감독이 수염을 깎지 않았으니 자신도 여간 찜찜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14일 한화전에서 6-1로 승리하며 김 감독은 하루 더 면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 15일 한화전에서 또 이겼을 땐 아예 ‘질 때까지 면도하지 말자’는 오기가 생겼다. 결국, 5월 1일 문학 LG전에서 SK가 14연승에 성공하며 김 감독은 보름 넘게 면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야신(野神)’ 김 감독이 이럴진대 다른 감독들의 징크스는 오죽하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모 감독은 팀이 부진하면 평소보다 늦게 구장에 나온다. 한번은 시계를 잘못 보는 바람에 일찍 구장에 나갔다가 3연패를 당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독의 손목엔 아날로그 시계 대신 액정이 큼직한 디지털 시계가 차여져 있었다.

어느 감독은 신발을 신고 집 현관문을 나설 때 첫발을 어느 쪽 발로 내디딜 것인가를 놓고 장고를 거듭한다. 왼발 혹은 오른발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후회가 없으면 그날 경기에 이기지만, ‘영’ 찜찜하면 결국 지고 만단다.

빙그레 사령탑을 맡았던 모 감독은 선참 선수들을 모아 종종 프라이드 치킨 파티를 벌이곤 했다. 선수들은 연패에 빠진 와중에도 자신들을 신경 써주는 감독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 파티엔 룰이 있었다. 닭 날개만 부러뜨려 먹어야 한다는 것. 잘 아는 역술가가 “그래야 연패를 끊고 다시 비상할 수 있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란다.

어쨌거나 김 감독의 수염 징크스도 따지고 보면 승리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내는 그만의 표현법이다. 실제로 5월 1일 문학구장에서 만난 김 감독은 “연승이 끊어질 때까지 수염을 기를 것”이라며 “어떤 고난과 좌절에도 마지막까지 한계에 도전해볼 참”이라고 말했다. 연승에 대한 의지를 이토록 잘 나타낸 말이 있었을까 싶었는데. 그러나.

김 감독이 말한 ‘한계’는 ‘연승’이 아니었다. 단순히 ‘숫자’를 뜻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좋은 예가 있다. 1일 LG를 꺾으며 14연승을 달성하고 김 감독은 다음날 선발투수로 엄정욱을 지목했다. 예상 밖이었다. 애초 2일 선발은 가도쿠라 켄이 예정돼 있었다.

올 시즌 6경기에 선발로 나와 6승 평균자책 1.98을 거두는 가도쿠라와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2승1패 평균자책 4.15를 기록 중인 엄정욱을 비교했을 때, 어느 선수가 팀의 15연승을 이끄는데 유리한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기록만 보면 단연 가도쿠라였다. 가도쿠라도 2일 선발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엄정욱을 고집했다. 이유를 물었다. 김 감독은 짧게 “가도쿠라가 앞선 경기에서 허리가 좀 좋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덧붙여 “가벼운 증상이라 걱정하진 않지만, 이틀 정도 쉬고 다음 주 화요일에 등판하는 게 좋을 듯싶어서 등판 일정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말대로 가도쿠라는 가벼운 허리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투구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도쿠라 자신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껏 세계야구사에서 20연승 이상을 기록하다 중단되고 그달 다시 20연승을 시작한 구단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내일 경기는 15연승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인데요. 가도쿠라의 등판 연기 결정이 후회로 작용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만.”

김 감독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대답했다.

“한계에 도전한다는 말은 연승이 아이라(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우리가 모두 온 힘을 다한다는 뜻이다. 연승보다 중요한 건 시즌이고 선수들의 건강이다.”

김 감독은 어쩌면 우리에게 '노력'이 '숫자'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수염을 기르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설령 연승이 끊어져도 우리 마음 속의 김 감독은 언제나 '김달프'로 기억될 것이다.

츨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656&office_id=295&article_id=0000000401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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