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한국 최초의 야구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야구단’이 창단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해 다카하시라는 일본인 교사가 관립중학교(한성학교의 전신)에서 야구부를 조직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10년 서울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서 열린 황성 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이 땅에서 맞붙은 최초의 한국식 야구와 일본식 야구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춘추>가 ‘황성 YMCA-한성학교전’ 100주년을 기념해 야구(野球)와 야큐(야구의 일본식 발음)의 만남을 모색했다. 수준 높은 야구 담론을 통해 ‘숙명의 맞수’이면서 ‘아시아야구의 동반자’인 두 나라 야구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모색해보자는 게 기획의도다.
- 통산 1,098승의 김성근(68, SK 와이번스) 감독과 1,565승의 노무라 가쓰야(75) 전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이 만났다. 1월 21일 일본 도쿄 중심에서 만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야구 거장은 야구와 인생은 물론이려니와 지난날의 희로애락까지 털어놓으며 3시간 가깝게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김성근 감독은 “평생의 동지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다. 노무라 전 감독은 “꼭 SK 야구를 보러 가겠다.”라며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두 대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박동희(이하 박) - 어서 오십시오.
노무라(이하 노) 약속 시간에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겨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김성근(이하 김) 괜찮습니다. 급하게 오시느라 탈이 나는 것보단 여유 있게 오시는 편이 낫습니다(웃음).
박 -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무라 눈이 자주 오는 교토의 바닷가 출신이라, 추운 건 괜찮습니다(웃음).
박 - (노무라 전 감독을 바라보며) 김성근 감독님도 고향이 교토십니다.
노무라 (눈을 크게 뜨며) 아, 그렇습니까?
김 네, 저도 교토 출신입니다.
노무라 교토 출신을 오랜만에 만나는군요.
1월 22일 한·일 두 야구 거장이 대담을 갖은 일본 도쿄 '그랜드 프린스호텔 아카사카'의 구관 트리아농은 구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살았던 곳이다. 영친왕의 차남인 이구 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바로 옆에 있는 신관에서 숨을 거뒀다. 그래서일까. 흰 벽과 농갈색의 목재가 침착한 조화를 이루는 튜더 양식의 구관은 많은 사연을 담은 듯 보였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예정된 대담시간은 오후 9시부터였다. 김성근 감독은 1시간 전이나 일찍 대담장소에 나왔다. 야구 선배이자 자신의 야구인생과 궤를 같이한 일본 야구 거장을 정중히 맞기 위해서였다. 반면 노무라 전 감독은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노무라 전 감독의 측근은 “중요한 회의가 생각 이상으로 길어졌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회의는 이른바 ‘오자와 스캔들’과 관련해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 진영이 비밀리에 갖은 대책회의를 뜻했다. 노무라 전 감독의 부인 노무라 사치요는 과거 오자와의 권유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때를 계기로 노무라와 오자와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지각해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사과를 몇 번이나 거듭한 노무라 전 감독은 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특유의 능변과 넉살로 좌중을 압도했다. 김 감독 역시 그만의 카리스마 넘치는 이야기로 노무라 전 감독의 탄성을 이끌어낸다.
박 - (김성근, 노무라를 동시에 바라보며) 2010년을 시작하며 한·일 야구계의 거장이자 어른인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시게 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두 분이 오늘 처음 뵌 사이이신 걸로 압니다.
노무라 네. 처음입니다.
김 저 역시 처음 뵙니다.
박 - 서로 얼마나 알고 계신지 많은 분이 궁금해하실 텐데요. 먼저 김성근 감독께서는 평소 노무라 전 감독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노무라 전 감독이 현역으로 뛰실 때부터 어떤 야구를 펼치시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특히나 포수의 나아갈 길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방향성을 제시해주셨고 감독이 되셔서는 ‘생각하는 야구’를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야구의 기쁨 속으로 계속 파고들어가 결국 우리에게 야구의 재미가 무엇인가 알려주신 분이 아닌가 싶어요. 일본에서는 독보적인 ‘야구 1인자’이십니다.
박 - 김 감독께서는 노무라 전 감독을 ‘일본 프로야구의 제1인자’로 표현하셨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은 김성근 감독을 어떤 감독으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한데요.
노무라 죄송스럽게도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일본에서 한국야구 관련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고, TV로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감독님이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야구 거장, 야구와 야큐를 말하다
박 - 노무라 전 감독께서는 지난해 3월 미국 LA에서 열린 제2회 WBC 준결승에서 한국이 베네수엘라에 10대 2 대승을 거두자, “결국 한국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다. 하지만, 보름 전 WBC 아시아 예선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2대 14로 크게 졌을 때만 해도 한국 배터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노무라 세상에 이유 없는 패배는 없습니다. 질 때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요. WBC 때는 한국이 이기는 것이, 일본은 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구는 ‘진검 승부’이기 때문에 맞붙기 전엔 모르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야구의 재미이겠지요.
(머리를 쓰다듬고서) 정말이지 야구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에 강팀이라고 항상 이길 수 없습니다. 다른 종목들은 대략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는 일이 많지만, 야구는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젊었을 땐 ‘경제 전망’과 ‘일기예보’ 그리고 ‘야구결과’는 절대 예상한 대로 맞추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어요(웃음). 물론 과학 발전에 힘입어 일기예보는 많이 정확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야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박 - 김 감독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지난해 WBC 때 감독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일본야구의 특징을 짚어주셨습니다. 일본야구의 장·단점 은 무엇일까요?
김 일본야구는 우리보다 역사가 50년이나 앞서 있어요. 그래서 개개인으로 볼 땐 우리보다 기술이 뛰어나다고 봐요. 하지만, 단 하나! 팀과 팀, 나라와 나라가 맞붙을 땐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보다 애국심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세다고 봐요. ‘단결심’이나 ‘목적의식’은 확실히 일본 선수가 한국 선수보다 떨어지지 않나 싶어요.
노무라 (고개를 끄덕이며) 아픈 곳을 지적당했군요. 말씀 대로입니다. 제가 1935년생인데요. 당시 일본은 중국과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어릴 적,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또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더군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유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저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각별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달라요. 방금 김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올림픽이나 WBC 같은 국제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바로 ‘애국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한국에선) 세계 챔피언이 되면 선수들의 의·식·주 등 모든 생활을 국가로부터 보장받는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박 - 그렇진 않습니다. 병역만 면제됩니다.
노무라 아. 그렇군요. 병역면제가 매우 유용한 동기부여로 작용할 수 있겠군요. 일본은 우승해도 아무것도 없어요. 명예뿐이지요. 그런 작은 차이가 (한·일 승부의) 결과를 바꿨을 수도 있습니다.
박 - 그렇다면 정신력을 제외하고 기술로만 봤을 때 ‘한·일 야구의 차이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한데요.
김 베이징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 후쿠오카돔에서 일본대표팀의 경기를 봤어요. 그때 속으로 ‘아, 일본은 우리한테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스피드에서 차이가 났어요. 일본이 한국의 스피드를 막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베이징을 가니까 예상대로 경기가 진행됐어요. 일본 선수들은 환경이라든가, 처우 그리고 팬들한테 받는 대우가 원체 좋다 보니까 자기들의 현 위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반면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픈 상태에요.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향상심이 있어요. 두 나라 프로야구의 역사가 50년 차이가 나도 그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현역시절 노무라 전 감독은 포수로서는 경이적인 3,017경기 출장, 657홈런 2,901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70~77년까지 8시즌 동안 난카이에서 감독 겸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1973년에는 팀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끈 동시에 자신은 감독이면서도 MVP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미·일 프로야구를 통틀어 유일하게 선수로 3,000경기, 감독으로 3,000경기에 출전한 이다. 일본야구계에서 가장 존경을 많이 받는 야구인임과 동시에 가장 많은 비난에 시달리는 이이기도 하다.
박 - 노무라 전 감독께서는 한·일 야구의 기술적인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노무라 두 나라 선수들의 차이와 관련해 그다지 많은 부분을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일본프로야구의 70년 역사에 비한다면 역시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보자면 아직은 일본 선수가 조금 앞서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팀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애국심의 차이도 있을 수 있고, 결속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일본이 한국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일 듯합니다. 여기다 뭐랄까요. 헝그리 정신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잘 아시겠지만, 야구 경기에선 체력, 정신력, 지혜 등이 중요하고 그 가운데서 특히나, 정신력이 승부의 키로 작용합니다.
박 - 체력과 정신력은 이해가 갑니다. 지혜는….
노무라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가면 체력과 정신력은 기본입니다. 그때부터는 두뇌싸움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 메이저리그가 야구의 본고장인데요. 저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 시절부터 애리조나에 스프링캠프를 차렸습니다. 전직 메이저리그 감독들이 우리 팀 선수들을 지도해줬어요. 저 역시 그들로부터 미국야구의 많은 정보를 얻었지요.
한번은 그들에게 “어째서 일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것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요. 그들은 “메이저리그의 수준이 낮아진 대신 일본야구의 수준이 올랐다. 하지만, 힘은 여전히 미국야구가 앞선다. 만약 일본 선수들이 힘까지 갖추면 미국 선수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단언하더군요. 맞습니다. 체력싸움이라면 미국 선수한테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두뇌싸움은 다릅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야구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저는 항상 ‘야구는 두뇌싸움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이에요. 야구는 두뇌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쉬지 않습니까. 이렇듯 공백이 긴 종목이 어디 있습니까? 공 하나 던지고 쉬는 잠시의 시간, 다음에 던질 공을 생각하고 어떤 공이 올까 예측하게끔 바로 그 잠시의 시간을 허용하는 예술이 야구입니다. 저는 야구란 역시 ‘인간학(人間學)’ 그 자체로, 두뇌의 스포츠, 심리의 스포츠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국식 야구? 일본식 야구? 미국식 야구? 야구는 하나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야구대표팀을 타이완야구협회장이 환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백인천, 김정환, 김성근, 김응룡, 박현식, 김영조이 나란히 서 있다. 당시 대표팀 가운데 4명이 재일교포였다. 와세대 유학파인 김영조까지 합치면 5명이나 됐다. 그러나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심했다. 20살의 청년 김성근은 일본에선 '조센징' 한국에선 '반쪽발이' 소릴 들으며 살았다. 지금도 그는 '일본'과 자유로울 수 없다
# 1984년 김영덕 감독의 후임으로 제2대 OB 사령탑에 오른 김성근 감독은 1988년 프런트의 현장 간섭에 반발하다 해임됐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인 1989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해 그해 최약체였던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킨다. 하지만, 이듬해 5위에 그치자 곧바로 해임되는데. 알려진 해임사유는 성적부진. 알려지지 않은 사유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이었다.
1991년 삼성 사령탑에 오르지만, 베테랑 선수들의 은퇴와 관련해 역시 구단 수뇌부와 마찰을 빚다가 1992시즌이 끝나자마자 해임된다.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김 감독은 전국의 중·고교 야구부를 돌며 야구 지도를 한다. 지금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선 ‘야구계 복귀를 위해 로비를 벌이는 대신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을 지도하려고 전국을 순회한 최초의 프로야구 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6년 당시 최약체였던 쌍방울 감독으로 복귀한 김 감독은 그해 팀을 정규시즌 2위로 끌어올리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9년 잇따른 선수 팔기와 구단의 무비전을 비판하다가 그해 올스타전이 열리는 날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LG 감독을 맡아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으나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생애 5번째 해임을 경험한다. 2007년 SK 감독이 되고서 ‘스포테이먼트’를 주창하는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이 예상됐으나, 오히려 프런트와의 탄탄한 팀 워크를 바탕으로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쾌거를 맛본다.
지금껏 5번이나 해임의 쓴맛을 본 까닭에 일부에선 그를 가리켜 '불운한 야구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김 감독만큼 행복한 이도 없다. 역대 프로야구 감독 가운데 5팀에서 지휘봉을 잡은 이는 그 말고 아무도 없다. 감독 재임기간만 무려 19년. 그만큼 김 감독의 능력을 야구계에서 인정했다는 뜻이다.
노무라 전 감독도 비슷하다. 1969년 겨울. 34살의 나이로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이 됐다. 그것도 주전 포수와 4번 타자를 겸임하는 감독으로. 1980년 26년간의 선수생활을 정리하며 은퇴했다. 그 후 TV 해설가로 활동하다 1990년 야쿠르트 감독으로 취임했다. 1998시즌까지 노무라 전 감독은 약체 야쿠르트를 센트럴리그 우승 4회, 일본시리즈 우승 3회로 이끌며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야쿠르트 기적’의 여세를 몰아 최고인기구단이자 당시 센트럴리그 최고 약팀이었던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이 된다. 그러나 부인의 탈세와 구단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3년째 도중하차한다. 한신 감독에서 물러나고 2002년 사회인 야구팀 시닥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제2의 야구인생을 산다. 시닥스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선수들이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동명이인이 감독으로 오는 줄 알았을 정도로 그의 사회인 야구 행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물론 노무라 전 감독은 ‘프로에서 받은 만큼 아마추어 야구에 돌려줘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고.
2005년 퍼시픽리그 최약체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으며 이와쿠마 히사시, 다나카 마사히로, 나가이 사토시 등 젊은 투수들을 잘 이끌고, 야마자키 다케시, 뎃베이 등 퇴출선수들을 부활시켜 마침내 지난해 팀을 클라이맥스 스테이지 2까지 올리는 이른바 ‘노무라 기적’을 다시 한번 연출했다.
‘일본 제일’로 불리는 폭넓은 야구지식과 풍부한 현장경험으로 그는 일본야구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야구인으로 꼽힌다. ‘ID 야구’로 불리는 데이터 야구를 체계화해 일본야구 특유의 정교함을 부각시킨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나 거침없는 언사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적도 많다. 현역시절 줄곧 비인기 팀에서 뛰고 감독이 됐을 때도 매번 약체팀에서 지휘봉을 잡는 바람에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등 동년배 야구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기도 한다.
1975년 기자회견에서 요미우리의 슈퍼스타 나가시마를 ‘해바라기’로, 자신을 ‘달맞이꽃’으로 비유한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다. 나가시마가 한낮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해바라기처럼 인기를 끄는 데 비해, 실력으론 밀리지 않는데도 밤에 쓸쓸히 피는 달맞이꽃처럼 자신은 아마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을 나타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사하지 않고 살아남는 달맞이꽃의 강한 생명력을 자신의 인생과 비유한 것이기도 했다.
박 - 많은 한국야구 관계자가 김 감독님이나 SK를 가리켜 “일본식 야구”라고 정의하곤 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듣자면 무척 정교하고 섬세한 야구를 한다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스몰볼’에 매달려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뜻입니다.
김 (단호한 목소리로) 전 ‘일본식 야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팀을 옮길 때마다 그 팀에게 맞는 야구를 해왔을 뿐이에요. 특별히 일본식, 미국식 야구를 한 게 아니라 ‘김성근식 야구’를 했던 거예요.
번트를 많이 대니 일본식이고, 선수에게 맡기니 미국식이라는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려워요. 미국도 도루 많이 하고 번트 댈 땐 대요. 일본도 선수에게 맡길 땐 맡깁니다. 야구에서 작전은 ‘국경’이 아니라 ‘경기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무작정 ‘일본식’이니 ‘미국식’으로 나눈다면…야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봐요.
박 - SK 야구를 ‘일본식 야구’로 규정하는 야구인 가운데 정작 일본야구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 별로 없다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김 어떻게 하든 ‘이기는 야구’를 펼치다 보니까 몇몇 야구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국민감정이 일본에 대해 안 좋은 게 있고, 또 제가 재일교포 출신이니까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아쉬운 듯 숨을 내쉬며) 하지만, 리더라는 건 어쨌든 팀과 선수들을 위해 이겨야만 하는 역할이에요. 그것만큼 숭고한 일도 없지요. 제가 변명을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박 - ‘일본야구의 거장’으로써 노무라 전 감독께서는 ‘일본식 야구’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시는지 궁금합니다.
노무라 일본야구라고 정의할 만큼 아직 정형화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본야구가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단계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야구인도 거의 없습니다. 야구는 ‘감독이 변하면 팀도 변화’하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논외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전 야구의 진화 혹은 변화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항상 초조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세를 고치며) 현재 한국야구가 맹추격하고, 언젠가는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야구가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지금 일본에서는 선수, 코치, 감독할 것 없이 인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현실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격앙된 목소리로) 결과만을 쫓고 있어요. 제가 선수 시절에는 한 번 감독이 결정되면, 10년 주기로 바뀌곤 했습니다. 2, 3년 동안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작은 일을 도모해도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하물며 제대로 된 야구팀을 만들려면 최소 3년부터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005년 가을, 퍼시픽리그 ‘꼴찌팀’ 라쿠텐 감독으로 취임하며 5년 만에 야구계에 복귀한 노무라는 이듬해 71살이 되며 고(故) 오기 아키라 감독이 보유하고 있던 최고령 감독 기록을 깬다. 4년간 라쿠텐을 이끌며 1년째는 꼴찌, 2년째 4위, 3년째 5위를 하다가 지난해 마침내 퍼시픽리그 2위까지 오르며 ‘노무라 기적’이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구단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공표했고, 실제로 재계약하지 않았다. 일본야구 관계자들은 “노무라의 높은 연봉”을 재계약 불발의 이유로 들고 있다. 노무라는 대담에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날 필요로 하는 팀이 있다면 돈과 상관없이 어디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는 한국도 포함된다고.
2005년 새롭게 리그에 가입한 어느 신생팀(주 : 라쿠텐 골든이글스)이 첫해 138경기 가운데 38승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거두자 제게 “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팀의 감독직을 수락하고 4년이 지나자 겨우 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어요. 속으로 ‘그래 올해부터 한번 해 보자!’ 하니까 바로 자르지 뭡니까(웃음). ‘여태까지 뭘 했는가’ 싶었어요.
그 해임 건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최근 (일본야구계의) 풍토라고나 할까요? 지나치게 결과에만 급급한 나머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상에 ‘노무라 감독이 맡기만 하면 어떤 약체팀이라도 우승할 수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디 있습니까? 우승이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단의 모든 직원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코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하듯) 최고는 그리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정보의 홍수’ 속에, 쉽사리 정보를 얻는 시대에 우승한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에요. 정신력으로 야구를 하던 시절에는 조금만 정신을 차려도 이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의 긴 역사 속에서 ‘정신력의 야구’, ‘생각하는 야구’ 시대를 지나 이제는 ‘정보의 야구’ 시대에요.
‘어떤 정보를 얻고 어느 정보를 노려야 하는가’가 현재 일본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입니다. 좋은 선수들을 한데 끌어모은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시대가 됐어요.
박 - 김 감독께선 음지의 무명선수를 양지의 스타로 만들고,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주변여건이 일본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한국야구는 그래서 김 감독님의 지혜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야구의 나아갈 방향, 어떻게 보십니까.
김 초창기 우리나라 야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그러다 미국야구와 만나면서 그쪽으로 ‘확’ 쏠렸어요. 이후 이승엽(요미우리)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일본야구의 장점을 수용하게 됐고. 앞으로 우리나라에 맞는 야구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가 문제인데. (굳은 표정으로) 솔직히 말해 선수, 코치, 감독 모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떼며) 우리나라 야구의 문제점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인재 부족’이에요. 고등학교 야구부가 52개밖에 되지 않으니 나오는 인재는 한정돼 있고, 그런데 경기는 많이 해야 하고. 거기다 우수한 재목이 있어도 그 재목을 과연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얼마나 될지 고민이에요. 국외에 있는 좋은 지도자, 선수들이 돌아와 선진야구를 전달할 때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의 스피드, 일본의 자만
노무라 전 감독은 WBC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타자로 ‘한국의 4번’ 김태균(지바롯데)을 꼽았다. 사진은 지난해 WBC 대표에 뽑힌 김태균이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연습하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박 - 지난해 제2회 WBC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한국의 이범호와 김태균이 올 시즌부터 일본 프로야구에서 뜁니다. (노무라 전 감독을 바라보며) 혹시 두 선수를 아시나요?
노무라 음, 아니요. 모릅니다. (김 감독이 귀엣말로 뭔가를 설명하자) 한국팀 4번, 그 김 선수 말인가요? (김 감독이 고갤 끄덕이자) WBC 아시아예선에서 그의 한방에 일본이 졌었지요. 당시 TV에서 포수 조지마 겐지의 “공 배합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가 나중에 조지마에게 한소릴 들었습니다.
박 - (묘한 미소를 지으며) 어떤…?
노무라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상한 공 배합이었어요. 이상하니까 이상하다고 얘기한 것뿐인데, 순수하게 ‘그런 견해도 있을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야구에선 다양한 견해나 의견이 있을 수 있어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데 몰상식하게 선배한테 그러다니요. 물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정을 내다니, 그리 무례해서야 되겠습니까.
박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지요.
노무라 그 경기(주 : WBC 1라운드 A조 1위 결정전)에서 이와쿠마가 잘 던졌습니다. 한국의 4번 김 선수를 상대로도 첫 타석에 몸쪽 공을 던져 내야땅볼로 처리했어요. 김 선수의 다음 타석 때였을 거예요. 위기(주 : 4회 초 1사 1·2루)였습니다. 그런데 초구가 첫 타석 때처럼 다시 몸쪽 공이었어요. 전 여기서 ‘타자에게 이번에도 몸쪽 승부를 하려는 구나’하는 정도의 메시지만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봐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또 몸쪽, 몸쪽, 몸쪽이었어요. (목소리를 높이며) 아무리 몸쪽 공에 약하다고 해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공 배합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생각에 따라 다를 순 있어요. 누군가는 ‘몸쪽 공에 약점이 있지만, 노리고 친다 해도 상관없다’ 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것이 가장 마음 편한 생각이겠지요. 또 하나는 저처럼 ‘노리고 치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있을 거예요.
여느 일본인과 달리 매우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조지마 겐지는 노무라 전 감독이 WBC 아시아예선 한국과의 경기에서 “공 배합에 문제 있었다”고 지적하자 “노무라 씨는 현역 때 한 점도 내주지 않은 포수였나?”라고 반발해 큰 논란을 불렀다. 이전까지 조지마는 가장 존경하는 야구인으로 같은 포수 출신이던 노무라를 꼽곤 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그러나 누가 보나 그때 상황이면 후자의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합니다. 명색이 한국의 4번 타자인데, 몸쪽 공을 몇 개나 연달아 던지다니요. 그러다 결승타를 두들겨 맞았다면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그런데 도리어 나한테 싸움을 걸어오고 말이지. “그럼 감독님은 선수 시절에 모든 경기를 완벽하게 해냈느냐”고 따지질 않나.
(살짝 소리 내 웃는 김 감독을 쳐다보다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선수한테 뭐라고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더는 상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만, 그런 선수가 포수를 하는 한 일본은 절대 (한국을) 이길 수 없어요. (혼잣말로) 메이저리그에서 잘리는 것도 당연해….
박 (웃음을 참으며) 아, 네.
김 제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2년간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있을 때 호소카와 도오루(세이부), 조지마(당시 소프트뱅크), 야노 아키히로(한신) 등 정상급 포수들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분석을 하다 보니까 다 특색이 있더군요. 그걸 당시 지바롯데에서 뛰던 승짱(이승엽)한테 전달했어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승짱이 세이부전은 물론이려니와 한신과의 일본시리즈 때도 무척 잘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지마는 몸쪽 공이 먹히면 계속 몸쪽 공을 요구해요. 얻어맞더라도 또 요구한단 말이지. 그러나 야노는 몸쪽 공을 별로 요구하지 않아요. 대신 투수를 편안하게 리드하더란 말이지. 옆에 노무라 전 감독님이 계시지만, 일본 포수들이 이렇게 허술한 면이 많구나 싶었어요.
화려하지만 외로운 자리, 감독
1935년 일본 교토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노무라 전 감독은 만주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가사를 도왔다. 야구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첫 포지션은 포수. 고교 때까지 무명으로, 1954년 난카이에 테스트를 보고 가까스로 입단했다. 입단 1년 후 퇴출의 위기에 몰리지만, 구단 관계자에게 울며 매달려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 백업 포수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 엄청난 노력과 훈련으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포수가 됐다. 노무라의 성공담은 1960~70년대 일본인들에게 희망으로 작용했다
박 - 포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계속 포수 이야기를 해보지요. 노무라 전 감독님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포수 출신의 지도자십니다.
노무라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제가 난카이 호크스 입단할 무렵에는 ‘언제나 우승팀엔 명투수가 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승팀에 명포수가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저가 포수 출신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유독 ‘포수’라는 자리에 유독 신경이 많이 가는 게 사실입니다.
제가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었을 때였어요. 야노를 비롯해 포수자원은 꽤 있었지만, 확실히 포수진을 이끌어 갈만한 훌륭한 포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구에서 포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기 때문에 과연 누구를 주전포수로 내세울까 고민하다가 (세 손가락을 펴며) 처음에는 세 선수를 골고루 기용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야노로 결정하는데요.
야노가 안방마님으로 들어오면서 배터리가 안정을 찾고, 팀도 이제 겨우 틀을 잡아가나 했는데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또 잘렸지 뭡니까.
1998시즌을 끝으로 야쿠르트 감독에서 물러난 노무라는 1999시즌부터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많은 오사카 팬이 6년 연속 하위권을 맴돌다 강팀으로 변한 야쿠르트처럼 한신도 ‘노무라 매직’에 의해 강팀이 되리라 믿었다. 막상 뚜껑을 열자, 결과는 3년 연속 최하위. 하지만, 노무라에 대한 평가는 퇴임 후 이뤄졌다. 그가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육성한 이가와 케이, 후쿠하라 시노부, 아카호시 노리히로, 하마나카 오사무 등 젊은 선수들이 2003년 팀이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한신의 부활은 내가 아니라 전임자 노무라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제가 나가고 후임자인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맛있는 열매’를 차지했어요(웃음). 분명히 배 아파서 하는 푸념입니다만, 저는 어딜 가나 불운의 연속이었어요. 난카이, 야쿠르트, 한신 그리고 라쿠텐 등, 꼭 팀이 최악일 때만 제게 제안이 들어오더군요.
어쩌면 그런 팔자로 태어났는지 모르지요. 지난 시즌 센트럴리그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가 꼴찌를 하지 않았습니까. 속으로 ‘아, 또 내게 제안이 들어오겠구나’ 싶었어요. 실제로 소문도 돌고, 기자들도 그런 식으로 물어오더군요. 뭐, 나중에 오바나 다카오 감독으로 결정 났지만 말입니다. (조용한 음성으로) 역시 ‘이런 운명도 있구나’ 생각합니다.
박 - 운명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으시겠습니다.
노무라 그렇지 않습니다. 전 약팀을 강하게 조련시킨다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어느 누가 봐도 우승전력의 팀을 한 번도 이끌어 본 적이 없기에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어떤 마음으로 팀을 운영할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김 저도 한국에서 대부분 최악의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노무라 어, 정말요? 저와 닮았군요(웃음).
김 (빙그레 웃으며) 그때마다 노무라 전 감독께서 쓰신 책을 보고 공부했습니다. (옛 생각이 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꼴찌팀을 3위로 올리고, 또 꼴찌에서 2위로 올리고…현재 소속팀인 SK는 팀을 맡았을 땐 6위였습니다만, 부임 첫해부터 우승 그다음 해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지난 시즌엔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7차전 패배 당시 우리 팀엔 주전포수가 없는 상태였어요.
노무라 훌륭한 성과를 이룩하셨군요. 구단의 사장님이 그런 성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가가 문젭니다. 전 제대로 평가도 못 받고 잘렸습니다.
김 전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서 평가를 받기 이릅니다. 그리고 SK 사장님은 현장을 잘 이해해주는 분입니다.
노무라 (강한 어조로) 조직은 리더의 역량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팀을 잘 이끌려면 역시 리더를 잘 뽑아야 합니다.
김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보이며) 전 한국에서 5번이나 잘렸습니다. 정규시즌 2위를 해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둬도 잘렸어요(웃음).
노무라 그 당시 사장님들은 그리 좋은 사장이 아니었나 보네요.
김 그분들은 ‘감독이 나쁘다’고 하시더군요(웃음).
노무라 역시 감독은 참 힘든 자리에요. 야구단엔 선수들을 수급하는 스카우트팀이 있습니다만, 아무리 문제가 돼도 누가 잘리거나 하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현장의 책임입니다. 그런 감독의 고충을, 현장을 어려움을 이해하는 구단 사장이 있으면 훨씬 편할 텐데.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야쿠르트 감독으로 9년을 있었습니다만, 당시 구단 사장님은 현장의 여러 가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분이라 참 편했습니다. 다른 사장님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모두 결과만을 바랐을 뿐 과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지난해 시즌 전 거의 모든 야구관계자가 라쿠텐을 최하위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전 해고를 당했어요(웃음).
박 -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노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독은 역시 과정보다는 결과로만 평가를 받는 건지. 이제 과정은 전혀 중요치 않다고들 합니다. 결과만이 모든 걸 설명하는 세상이에요. 살벌하지요. 야구의 역사도 긴데 아직도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2001년 정규시즌 6위에 그쳤던 LG는 2002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며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이해 LG의 한국시리즈 행을 점친 야구전문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트윈스의 약진은 놀랄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게도 김 감독은 약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키고도 “LG 야구와 팀 색깔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이것을 신호탄으로 LG는 주요 선수들을 트레이드, 은퇴시키며 이후 ‘6-6-6-8-5-8-7’의 행진을 벌인다(사진=삼성)
박 - 노무라 전 감독의 말씀대로 감독은 무척 애환이 많은 자리입니다. 김 감독이야말로 산증인이 아닐까 싶은데요.
김 지금까지 두 번 꼴찌팀을 2위 팀으로 성장시킨 적이 있어요. 그런데 두 번 모두 다음 해 잘렸어요. ‘이제 우승도 가능하겠다’ 싶었을 때 구단에서 “우리가 원하는 야구와 맞지 않다.”라는 이유를 들었어요. 일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프런트는 감독을 특수분야의 엔지니어로 보지 않고 자기 부하 정도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박 - (노무라 전 감독 귀에서 자꾸 통역용 리시버가 떨어지자) 원래 미남의 귀는 작다고 하더군요.
노무라 정말? 반대 아닌가요? 귀가 큰 사람이 머리도 좋고, 돈도 많이 번다던데. 그래서 부자들은 다 귀가 크다고 하던데요. 어느 분은 귓불이 돈이고, 이쪽 귀 위가 두뇌라고 하던데. (혼잣말을 하듯) 난 둘 다 안 돼.
지푸라기와 재생공장
박 - 그렇다면 진정한 감독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미 메이저리그는 감독을 관리자로 봅니다만, 한국과 일본야구에선 감독이 팀 전체를 책임지는 운영자란 측면이 강한 듯합니다.
노무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감독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팀이 움직일 만큼 감독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물론 현대야구는 각 영역이 전문화돼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것을 운영하는 건 감독의 몫입니다. 모든 팀이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승부를 결정짓는 건 선수들에 대한 지도와 교육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요미우리처럼 돈의 힘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독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그런 우승을 기뻐해야 할지 의문입니다. 물론 우승 자체는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언제 한번 하라 감독에게 기분이 어떤지 물어봐야겠어요(웃음).
박 -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요미우리의 선수 모으기는 한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미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와 스페인프로축구의 레알 마드리드도 비슷한 팀들인데요. 다른 팀에겐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무라 중심이 제대로 갖춰지면 모든 게 풀린다고, 3·4·5번 중심 타선이 확실하면 1·2번도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요미우리가 지난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만 3·4·5번 모두 다른 팀에서 빼내온 선수들 아닙니까?
옛날부터 요미우리는 그랬어요. 팀 내에서 육성을 잘 못하면서 돈은 많으니까 항상 안 풀린다 싶으면 다른 팀에서 주요 선수들을 사왔어요. 하지만, 돈 없는 구단은 어쩔 수 없이 선수를 육성해 키워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팀들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1984년 OB 2대 감독 김성근이 포수 조범현과 함께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롯데 타자는 故 심재원. 모 원로 심판은 "공식적으로 김 감독을 상대로 편파 판정을 한 적은 없으나, 비공식적으론 꽤 된다"며 미안한 뜻을 나타냈다(사진=KBO)
박 - 김 감독님도 노무라 전 감독님과 비슷하시지요.
김 (고개를 끄덕이며) 비슷합니다. 역시 팀을 만들고 선수를 키우고 그 속에서 팀이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것과 동시에 목적을 달성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감독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일본, 미국과 달리 선수층이 매우 얇아서 어떻게 선수의 잠재능력을 끌어내고, 얼마나 잘 쓰느냐가 무척 중요합니다. 감독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지요.
박 - 감독 한 명이 바뀌었을 뿐인데 팀 전체가 ‘확’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감독의 능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팀의 잠재된 능력이 비로소 꽃을 피운 것일까요?
김 보통 사람들은 ‘야구는 선수가 한다’고 하지만, 저는 ‘야구는 감독이 한다’고 봐요. 감독이 팀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해요. 아무리 좋은 선수가 있어도 그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 선수는 엉망이 될 것이고,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선수라도 꾸준히 믿고 기용하는 감독이 있다면 언제든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게 야구입니다.
노무라 감독님께서 자주 언급하시는 ‘적재적소’라는 말이야말로 감독의 역할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보는데요. 감독이 고비마다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감독이 얼마만큼 야구에 정열을 갖고 있고, 어떤 생각으로 야구를 하느냐에 따라 팀과 선수의 운명은 180도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노무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감독은 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감독이 바뀌면 팀이 바뀐다는 원칙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사회학적인 접근이 되겠습니다만, 선수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는 법이지요. 감독 즉 리더라면 바로 그런 심리를 이용해 사람을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박 - '노무라만 리더론'이 되겠군요.
노무라 비록 짧은 말이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이야기한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어요. 저 자신 1954년 난카이에 입단했지만 3년간 2군에 있었습니다. 4년째 되던 해 우연히 복도에서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님과 마주치게 됐습니다. 감독님께 “안녕하십니까?” 인사드렸더니 그분이 ‘딱’ 한마디만 하시고 지나치셨습니다.
박 - 무슨?
노무라 “자네, 요즘 좋아졌던데?”였습니다. 그 ‘딱’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심어줬는지 모릅니다. 훗날 저도 가끔 그 방식을 썼습니다. 적절한 시점을 봐서 선수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진 거지요.
혼내면서 가르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칭찬을 듣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물론 너무 칭찬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특히나 감독이라면 아무래도 형평성을 고려해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 칭찬하면 될 텐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그런 상황은, 역시 감독으로서의 자존심 탓일까요?
그럼에도, 선수들은 말 한마디에 살아날 수 있고, 말 한마디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감독의 영향이 어마어마하다고 한 건 바로 감독의 말 한마디가 갖는 위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는 정규시즌 3위의 돌풍을 일으켰다. 1983년 이후 인천 연고팀이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다. 타율 20위 안에 든 타자가 한 명이 없는 가운데서도 태평양이 연승을 거듭한 건 박정현(19승), 최창호(10승), 정명원(11승) 등 20대 초반의 투수들이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육성하고, 기회를 제공한 이가 바로 김성근 감독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5위를 기록하고 바로 해임됐다. 사진 1991년 1월 오대산 극기훈련을 하는 태평양 선수들(사진=KBO)
박 - 김 감독님은 무명 선수들이나 은퇴 시점을 앞둔 선수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는 지도자로 유명합니다. 선수들 역시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감독님께 연락을 취하곤 합니다.
김 우리 팀의 전력보강은 다른 팀처럼 활발하지 않아요. 새로운 복안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팀에서 그만둔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감으로 변화시키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음, 선수는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나 싶어요. 투수만 보더라도 작은 폼 하나 바꿨는데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팀을 바꾸면서 새로운 기분전환을 통해 움츠렸던 자신의 능력을 다시 발산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구단에 야단맞을지 모르지만, 야구선배로서 능력이 있는 선수라면 내가 욕먹더라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담 전 노무라 감독님이 일본프로야구 은퇴선수 가운데 75%가 재취업을 못한다고 하셨는데 한국은 거의 100%에 가까워요. 기회를 줬는데 그 기회를 잡고 3, 4년 더 뛰면 다행이고, 안 되면 거기서 만족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올해는 아마 안경현, 박정환 같은 선수들이 뭔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 - 노무라 전 감독님은 선수의 숨겨진 장점을 찾아내 극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난카이 감독 시절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에모토 다케노리와 야마우치 신이치를 영입해 그해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1976년에는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당대 최고의 투수 에나쓰 유타카를 영입, ‘야구계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한마디로 선발을 원했던 에나쓰를 구원투수로 뛰도록 해 역시 큰 효과를 봤습니다. 라쿠텐 감독 시절엔 주니치와 오릭스에서 퇴출당한 야마자키 다케시를 데려와 2007년 홈런왕, 타점왕에 등극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선수들의 숨겨진 재능을 끌어올리는 감독님만의 비법이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노무라 잘 아시네요. 조사를 열심히 했구먼(웃음). 그래서 사람들이 날 보고 ‘노무라 재생공장’이라고들 하지요.
제가 그런 팔자를 타고났어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런 선수들만 꼭 저한테 오더군요. 아직도 그래요. 라쿠텐에선 주니치, 오릭스에서 잘린 야마자키라던가 주니치에서 잘린 뎃베이나 그랬어요. 재미난 건 그 야마자키는 홈런을 펑펑 치고, 뎃베이는 수위 타자가 됐다는 겁니다(웃음).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니까 주변에서 '재생공장'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선수를 바꾸는 건 '딱' 한마디에요. 야마자키를 예로 들지요. 처음 그의 플레이를 보니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 같더군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소질만 믿고 날아오는 공을 향해 ‘야구는 배짱이야!’라고 외치면서 마구 치는데만 만족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한 일은 아주 조금 그의 생각을 바꿔준 것밖엔 없습니다.
박 - 어떻게 바꿔줬을지 궁금합니다.
노무라 ‘투수나 포수나 네게 공을 던질 때, 일단은 생각하고 던지지 않겠나. 상대가 생각하고 던지면 너도 제발 생각 좀 하고 되받아 쳐라’ 라고 계속 얘기해줬을 뿐입니다(웃음).
당시 야마자키는 정말이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 친구였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그때까지 소질만 믿었을 테니까. 나중에 홈런을 치고 나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야구한 게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기에 “나이가 마흔이나 돼서 그런 말 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으냐”고 했어요.
뎃베이도 그래요. 그 친구는 홈런도 치고, 안타도 치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홈런은 소질이 필요하다. 네 마음은 알겠지만 한 곳에 집중해라. 홈런은 버려라. 너는 배트 컨트롤이 좋으니까 안타치는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생각을 버리도록 했지요.
노무라는 일본 직장인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자기개발서’로 불린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야구를 넘어 사회 각 분야에 매우 유용한 교훈과 지침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셀러리맨 사이에선 그의 조직관리, 인재관리를 다룬 책이 필수지침서다. 일본 출판계에서 노무라를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무라의 야구와 인생철학이 담긴 ‘노무라 노트’는 야구선수들이 재산 1호로 삼는 보물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전 항상 선수들에게 ‘자신을 부단히 바꾸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럭저럭 성적을 내니까 그냥 현실에 안주하는 선수들은 ‘이 정도만 하면 됐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뒤 현실에 만족하는 선수들은 벽을 허물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주저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래선 안 된다고 주장해왔어요. 진보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선수들에게 의식개혁을 강조하면서, 그 과정에서 ‘재생공장’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감독과 리더의 역할이란, 나침반 같은 것이어서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쭉 지켜보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살짝 그 방향을 틀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들 모두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야구의 다른 이름, '데이타 야구'와 'ID 야구'
1982년 OB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은 날을 새는 연구 끝에 삼성 배터리의 공 배합을 읽었다. 여기다 삼성 주요 투수들의 투구습관과 주전포수 이만수의 팔뚝의 움직임을 관찰해 사인까지 읽어냈다. 김성근의 노력이 일조해 그해 OB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살아 남기 위해’ 야구를 한 김성근은 지금도 ‘살아 남기 위해’ 발바둥 치는 선수들을 위해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날을 샌다(사진=강대중)
박 - 노무라 전 감독님은 ‘ID 야구(Import Data)’의 창시자로 매우 유명합니다. 역학으로서의 야구를 과학으로서의 야구로 진화시킨 대표적 야구인이란 지적이 많은데요. 자료를 보니 난카이 시절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배팅의 과학’ 가운데 “투수에게는 구종에 따른 투구폼의 버릇이 있다”는 부분을 읽은 게 ID 야구의 출발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노무라 ID 야구 이전에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 - 네, 하시지요.
노무라 팀이나 선수 개인이나 기술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천부적인 소질만으로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선수는 천재입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타자는 타율 2할5푼에서 2할 7푼 사이입니다.
3할을 넘지 못하면 일류라고 할 수 없기에 모자란 3~5푼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이류 타자들의 공통된 과제입니다. 그때 남은 건 눈과 머리뿐입니다. (손으로 어깨부터 머리끝까지를 가리키며)바로 여기 목 윗부분 말입니다. (손으로 어깨부터 허리까지 쭉 내리며) 어깨부터 이 아랫부분으로 타율 2할7, 8푼을 쳤다면 나머지 2, 3푼을 끌어올리는 건 이 목 위에서 결정됩니다. 머리를 쓰고 생각할 줄 아는 야구로의 의식개혁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의식개혁에 성공하면 다음은 흥미의 문제입니다. 흥미가 있으면 점점 기량이 향상됩니다. 아주 사소한 차이지만 투수는 구종 1개를 늘리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곤 합니다.
예를 들지요. 어떤 투수가 있었습니다. 속구와 슬라이더, 포크볼을 잘 던지는 10승대 투수였습니다. 재미난 건 이 선수가 해마다 10승을 거두면서 역시 몇 년째 10패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그 투수에게 그랬습니다. "이봐, 타자가 돼서 한번 생각해봐. 답을 쉽게 찾을 거야."
무슨 말인고 하니. 타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타자들은 몸쪽 깊숙이 오는 공을 싫어합니다. 투수도 바깥쪽을 향해 던지는 걸 가장 쉬워합니다.
하지만, 볼이라도 좋으니 몸쪽에 한 번이라도 공을 찔러 넣는다면 타자들은 ‘다음에 또 몸쪽으로 공이 오지 않을까’하는 예상에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몸쪽 공이 무서워 자기도 모르게 타자석에서 멀리 떨어지는 선수도 있어요.
그래서 야구에서 투수가 바깥쪽으로 재미를 보고 싶으면 일단 몸쪽부터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빠른 공을 살리고 싶다면 느린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야구의 원리라는 게 이렇듯 상대적인 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뜻 공 하나하나가 독립돼 보이지만 야구는 모두가 연결돼 있습니다. ID 야구는 바로 '분리된 것 같지만 연결된 구조들을 확률로 들여다 보는 것'을 말합니다.
박 - 김 감독께서도 데이터 야구를 무척 중시합니다. 야구에서 데이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데이터는 뭐랄까? 상대를 분석하려면 절대 필요한 정보가 아닐까 싶고. 데이터를 참고로 어느 정도 경기 방향도 설정하고…. 확률로 따질 때 데이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료라고 봐요. 제가 생각해도 우리나라에서 데이터를 가장 많이 보는 야구인은 저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경기에 들어가면 데이터 대신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요.
박 -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어떤 철학으로 출발했을까 궁금하군요.
김 1976년 충암고 감독이었을 때에요. 지금 KIA 감독인 조범현이라든가 또래 친구들이 오로지 대학입학을 목표로 대구에서 나만 보고 서울로 왔어요. 그 친구들의 인생이 내 손에 걸렸어요. 내가 아니라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전 어떻게 하든 이겨야 했습니다.
68살의 김성근은 지금도 꿈꾸는 야구소년이다. 그는 미국이나 일본 등 야구강국에서 사령탑을 맡기를 희망한다. 이제는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도 국외로 진출해 한국야구의 강점을 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성공하든 실패하든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면 자신이 메겠다는 입장이다(사진=스포츠춘추)
(입술을 깨물며) 그런데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어요. 꽤 오래 고민했다고. 하지만, 감독은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데이터 야구를 착안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선수들을 상대팀 경기하는데 보내서 일일이 볼 카운트, 투구방향, 타구 방향 등을 쓰도록 했어요. 밤에 아이들이 기록지를 가져오면 그걸 모두 모아 날을 세면서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 경험과 감이 쌓이더군요. 기록지만 봐도 '아, 이 볼 카운트에는 이 아이가 이런 구종을 던지는구나' '아, 이 주자는 이 볼 카운트에서 도루를 시도하는구나'하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한번은 오영일, 박철영 등이 버틴 막강 배명고와 붙었는데 우리가 쉽게 이겼어요. 그때 깨달은 교훈이 야구는 힘만 갖고 이기는 게 아니라 결국 (왼손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머리로 이기는 것이라는 겁니다.
20승 투수 VS 뛰어난 포수
박 - 노무라 전 감독께 묻겠습니다. 20승 투수와 리그에서 아주 뛰어난 포수가 있다면 어느 선수를 고르시겠습니까?
노무라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포수를 선택하겠어요.
박 - 이유가 있습니까?
노무라 상대적으로 투수는 키워내기 쉽습니다. 의식개혁과 약간의 테크닉으로 어느 정도 가능해요. 다만,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는 투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요. 그래도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능력만 갖췄다면 어떻게든 됩니다. 하지만, 포수는 아닙니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해요.
박 - (김 감독을 바라보며) 감독님은 어떠십니까?
김 음,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박경완이라는 포수가 있었다면 전 SK가 이겼다고 봐요. 이건 정상호가 잘 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박경완이 뛰어난 포수라는 뜻이에요. 전 투수를 만드는 건 포수라고 봐요. 아무리 좋은 투수가 있어도 포수가 나쁘면 성장하질 못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20승 투수보단 포수를 선택하겠습니다.
김성근 "미·일 프로팀 감독이 되고 싶다." 노무라 "한국 프로팀 감독도 OK!"
지난해 퍼시픽리그 클라이맥스 스테이지 2에서 라쿠텐은 니혼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내심 일본시리즈 진출을 노리던 노무라의 꿈은 좌절됐다. 경기가 끝나고서 양팀 선수들은 노무라 전 감독을 헹가래 하며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박 - 2012년 런던올림픽뿐만 아니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도 야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됐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야구 인기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아시아 야구의 피해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하는데요. 그래서 두 분께 여쭤보겠습니다. 2008년을 끝으로 아시아시리즈가 폐지되며 아시아 야구교류가 끊어졌는데요. 아시아 야구가 예전처럼 활발히 교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노무라 아시아 야구는 아시아 야구대로 중시하지만, 결국엔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세계 최강의 야구강국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야구역사가 가장 긴 미국일 겁니다. 하지만, 야구 자체로만 봤을 때는 일본야구가 미국에 뒤질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은 야구도 역수입되는 시대라, 미국이 일본야구를 따라 하는 것도 많습니다.
전 일본과 한국이 참가하는 진정한 월드시리즈를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미국인들끼리만 ‘월드시리즈’를 하다니요. (고개를 흔들며) 가당치도 않습니다. 우리들도 프로야구가 있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월드시리즈를 하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일류만이 일류를 키워낼 수 있습니다. 미 메이저리그라는 일류와 승부를 겨룸으로써 일본과 한국야구의 수준도 더 올라갈 수 있어요.
김 몇 년 동안에 생각지도 않던 WBC가 생겼고 야구 자체도 세계화가 되고 있어요. 노무라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시아리그의 승자가 메이저리그의 최강자와 맞붙는 날이 왔으면 해요. 나아가선 한국과 일본 프로팀이 메이저리그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움직이는 날이 왔으면 해요.
박 - (노무라 전 감독에게) 만약 한국프로야구 팀에서 감독님을 영입하고자 한다면 승낙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노무라 (깜짝 놀라며) 저를요?
박 - 네.
노무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응하겠습니다. 제가 도움된다면, 제 능력을 평가해서 일을 맡겨주신다면 언제든 응하겠습니다.
박 - 진심이십니까?
노무라 정말입니다. 보세요. 제 눈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김·박 하하
일본야구인들은 “일본식 야구는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야구는 ‘국적’이나 ‘국경’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기상황과 팀에 따라 변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간 SK 야구를 가리켜 “일본식 야구”라고 했던 일부 야구인들의 주장이 정작 일본에선 ‘난센스’로 통하는 이유다. SK 야구는 SK 야구다. 김성근의 야구 역시 ‘김성근식 야구’일뿐이다. 그것이 SK와 김성근 야구를 바라보는 보편타당한 시각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박 - 그렇다면 같은 의미로 김 감독께서는 일본프로야구 팀에서 영입제의가 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김 음, 우리나라 야구 지도자라고 하는 게 꼭 한국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새로운 이른바 전환기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국외로 진출할 기회가 찾아왔으면 하는 생각은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그런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야구가 굉장히 발전했다는 뜻이에요.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이랑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도 선수만 국외로 나갈 게 아니라 감독도 미국, 일본에 진출해야 한다"고 봐요.
박 - 저는 개인적으로 두 분이 공동감독을 맡으셔서 팀을 이끌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웃음).
노무라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 감독님의 야구를 한 번 보고 싶어졌어요. 어떤 야구를 하는지, 정말 저와 닮은 야구를 하는지 말입니다(웃음). ‘Thinking Baseball(생각하는 야구)’이랄까? 개인적으로 두뇌를 쓰는 야구를 참 좋아합니다. 생각하는 야구가 결국 팀을 강하게 만듭니다. 프로선수인 이상 모두가 야구전문가가 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프로야구 선수도 포함하는 야구교실을 지금도 열고 있어요.
야구란 무엇인가?
대담이 끝나고 나서 두 야구 거장은 기념사인을 주고받았다. 노무라 전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쓴 ‘일구이무(一球二無)’를 보고 “무슨 뜻이냐?”라고 물었다. “일본야구계에 ‘두 번째 공은 없다’는 의미의 ‘일구입혼(一球入魂)’은 있지만 일구이무는 처음 본다는 것.” 이에 김 감독은 “두 번째 공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며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재일교포라, 친척도 선후배도 없이 날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살다 보니 일구이무를 세계관으로 삼았다”고 자세한 배경을 소개했다. 노무라 전 감독은 ‘野球に学び野球を楽しむ’를 썼는데 '야구에게 배워 야구를 즐긴다'는 뜻이라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박 - 두 분의 야구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는 어떤 경외감마저 느껴지는데요. 먼저 김 감독께 묻겠습니다. 감독님께 야구란 무엇입니까?
김 인생의 전부. 그러니까 난 야구를 위해서 살아왔고 야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야구라는 것은 정말 인생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행동해야 하듯 야구도 마찬가지에요. (강한 어조로) 전 SK 야구를 통해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절망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하면 된다.' '하지 않아서 안 될 뿐'이란 것도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내가 정말 야구를 하며 여러분께 어필하고 싶은 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박 - 노무라 전 감독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노무라 김 감독님과 같습니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18살에 프로야구에 입단해 이제 56년이 흘렀는데요. 전 야구밖에 모릅니다. 고로 노무라에게서 야구를 뺀다면 '0'이 된다는 걸 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야구 외길인생이라고 이야기가 하면 좀 멋있게 들리겠지만 그야말로 제 인생은 야구뿐이었습니다.
박 - 마지막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노무라 전 감독님의 마지막 꿈은 무엇입니까.
노무라 일본 내에서는 자주 하는 말합니다만, 메이저리그 감독입니다. 황당한가요(웃음)?
박 - 한국에서 감독할 의향이 있다고 하셨는데,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시면…(웃음).
노무라 물론 한국도 괜찮습니다. 낯선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고나 할까요?
박 - 김성근 감독님의 마지막 꿈, 무엇인가요.
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2년 동안 지바롯데에서 있으면서 야구에 눈을 떴어요. 외국 그러니까 일본이나 미국에서 일할 기회가 제게 올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왔으면 하는 꿈은 있어요.
박 - 야구를 인생.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두 야구 원로와 지금까지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야구.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만, 들으면 들을수록 더 신이나고 경외감이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노무라 여러 가지로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끝)
김성근(金星根)
생년월일 : 1942년 12월 3일 ~
출생지 : 일본 교토 (본적 경상남도 진양)
현역 경력 : 교토 가쓰라고 - 일본 교토 상호차량(1960) - 교통부(1960~61) - 기업은행(1972~75)
지도자 경력 : 마산상고(1969~70) - 충암고(1976~79) - 신일고(1979~81) - OB 코치(1982~83) - OB 감독(1984~88) - 태평양 감독(1989~90) - 삼성(1991~92) - 해태 2군(1994~95) - 쌍방울(1995~99) - 삼성 2군(1999~2000) - LG(2001~02) - 지바롯데(2005~06) - SK(2007~)
감독 우승 경력 : 한국시리즈 우승 2회(2007, 2008), 준우승 2회(2002, 2009)
감독 통산 성적 : 2,101경기 1,098승 55무 948패 승률 5할3푼7리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생년월일 : 1935년 6월 29일 ~
출생지 : 일본 교토
현역 경력 : 교토부립 미네야마고 - 난카이 호크스(1954~77) - 롯데 오리온스(1978) - 세이부 라이온즈(1979~80)
현역 수상 경력 : 정규시즌 MVP 5회 (1961, 1963, 1965, 1966, 1973) 타격 삼관왕:1회 (1965) 홈런왕:9회 (1957, 1961~1968), 타점왕:7회 (1962~1967, 1972) 베스트나인:19회 (1956~1968, 1970~ 1973년, 1975, 1976)
현역 통산 성적 : 3,017경기, 타율 2할7푼7리, 2,901안타, 657홈런, 1,988타점
지도자 경력 : 난카이(1970~77) - 야쿠르트 스왈로스(1990~98) - 한신 타이거스(1999~2001) - 시닥스(2003~05) - 라쿠텐 골든이글스(2006~09)
감독 우승 경력 : 퍼시픽리그 우승 1회(1973), 센트럴리그 우승 4회(1992, 1993, 1995, 1997), 일본시리즈 우승 3회(1993, 1995, 1997)
감독 통산 성적 : 3,204경기 1,565승 76무 1,563패 승률 5할3모
출처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615&office_id=295&article_id=0000000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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