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인 이상훈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이뤘다. 2019년은 코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 좀 더 가까이 야구 팬들을 만나게 된다.(사진=이영미)>



“코칭은 선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선수와 같이 하는 것이다.”코치 이상훈이 고양 원더스 시절부터 LG 트윈스 피칭아카데미를 이끌 때까지 일관되게 유지했던 신념이다. 선수 시절에는 쉽게 터치하지 못할 만큼의 아우라를 풍겼지만 코치 신분의 이상훈은 선수 뒤에서 때로는 선배로, 조언자로 깊이를 더해갔다.


LG 트윈스의 오랜 팬들한테 이상훈이란 이름은 ‘아픈 손가락’이다. LG에서 SK로 트레이드 된 후 LG 선수들을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은퇴 선언을 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마운드의 야생마로 LG 팬들의 가슴을 달뜨게 했던 그가 고양 원더스에 이어 두산 2군 코치로 합류후 경험하게된 한국시리즈 우승. 이상훈으로선 잠실야구장에서 처음 느껴본 우승이었고 감격이었다.


-이상훈 인터뷰 <1편>에 이어서


고양 원더스가 해체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두산 베어스로부터 코치직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복근 팀장님이 연락을 주셨고, 이후 김태룡 단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두산과 함께 할 수 있겠느냐면서요.”


바로 대답하셨나요?


“원더스 해체 발표 이후 며칠 지나서 연락을 받은 거라 이런저런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니까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LG가 아닌 두산에서 프로팀 코치 생활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전 괜찮았어요. 원더스가 해체됐고, 이후 제게 연락해온 곳이 두산이었습니다. 두산에서 연락을 주셨는데 ‘전 LG로부터 연락 기다리고 있으니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두산에서도 의식을 했는지 LG에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상훈을 두산 코치로 선임하겠다는 내용을 사전에 LG 구단에 알린다는 얘기네요.


“네. 그런 과정 중에 김태형 감독님이 전화를 주시더라고요. 다른 말씀보다 제게 ‘상훈아, 잘 좀 부탁한다’는 인사였습니다. 제가 부탁을 드려야 하는데 감독님이 먼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감독님의 그 인사는 굉장히 푸근했습니다. 따뜻했고요.”


2015 시즌을 앞두고 두산 사령탑에 오른 김태형 감독은 이상훈 코치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사준 전자기타와 앰프 덕분에 기타 치는 걸 좋아했고, 선수 시절 이상훈과 술 한 잔 주고받으면 기타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2014년 10월 30일 이상훈이 두산 코치에 선임됐다는 발표가 나기 전 한화 김성근 감독 사단에 합류한다는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었다. 김성근 감독이 직접 의사를 물은 적은 있었지만 이미 두산행을 결정했던 터라 한화로 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상훈은 11월 25일까지 고양 원더스에 남아 선수들의 마지막 훈련을 도왔다. 그런데 11월 중순경 두산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감독, 코칭스태프가 인사하고 식사하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잠깐이라도 나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상훈은 고양 원더스에서 선수들 훈련을 지도하며 두산 모임에 참석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해 거절했다고 한다.


“김태형 감독님도 전화를 하셨어요. 물론 잠깐 인사만 드리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제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감독님한테 11월 지나고선 언제든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고양 원더스에 몸을 담고 있는 터라 안 될 것 같다고정중히 말씀드렸습니다. 감독님도 흔쾌히 받아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까지 고양에 남아 있었던 것이고요.


“네. 선수들과 훈련을 마치고 늘 하던 대로 악수하고 포옹하고 헤어졌습니다.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하면서요.”


선수 생활을 SK에서 마무리할 당시 시즌 중간에 은퇴 선언을 했었어요. 당시 화제가 됐던 은퇴의 변이 있었습니다. ‘LG 선수들을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였었죠. 그만큼 ‘이상훈=LG’라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두산 코치 선임 소식을 접했을 때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버랩되더라고요.


“제가 현역 시절, LG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지지 못하겠다고 말한 건 엄밀히 따지면 프로다운 태도는 아니었죠. 그걸 알면서도, 이성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제 감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던질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지도자 신분이잖아요. 선수와 지도자가 똑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차이점이 있어요. 선수는 행위를 하고, 지도자는 선수의 행위를 지켜보는 입장인 거죠. 제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가능했습니다. 더욱이 전 이미 고양 원더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두산 코치로 유니폼을 입은 건데 두산이라고 해서 못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요.”





두산 유니폼이 어색하진 않았나요?


“어색했죠. 두산 유니폼을 입은 제 모습을 보는 상대방의 시선들이요. 가장 중요한 건 제가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는 게 아닙니다. 두산에서 절 불러주셨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감독으로 이광환, 김성근 감독을 꼽았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두 분은 한국야구에서 ‘자율야구’와 ‘관리형 야구’로 대변되는 분입니다. 그런 분들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자연스레 비교가 됐고, 두 분의 장점을 자세히 알게 된 것 같아요. 이광환 감독님은 선수들이 해야 할 부분을 가르쳐줘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요. 그 다음은 지켜보십니다. 개입하지 않으시고. 반면에 김성근 감독님은 알아서 하는 선수들은 절대 터치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못하는 선수들을 끌고 가시는 거죠. 만약 김성근 감독님이 관리형 야구라는 명목 하에 선수들의 모든 걸 간섭하고 개입하셨다면 제가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때로는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 그게 더 힘들 때가 있어요. 관리 속에 자율이 있고, 자율 속에 관리가 있더라고요. 관리가 되려면 자신을 절제하고 상대방한테 피해주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야 해요. 프로 선수한테 가장 중요한 덕목이겠죠. 프로는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부분을 두 감독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어요. 그 배움이 지도자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요. 아! 고양 원더스 시절의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났어요.”


어떤 내용인가요? 


“제가 투수 코치를 맡고 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즌 개막전(2013년)이었습니다. 경기 중 우리 팀이 수비에 나설 때는 감독님 뒷자리에 앉았어요.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하려고 나름 머리를 썼던 것이죠. 투수들은 선발로 나간 선수 제외하고 26명이고, 이중 10여 명은 게임조에서 뛰기 어려운 선수들입니다. 그렇다면 불펜에는 나머지 선수들이 대기 중인 상황이었어요. 개막전 경기가 7회까지 이어졌고 우리가 공격하는 순서였습니다. 그때 감독님이 고개를 돌리고선 제게 ‘고바야시(료칸)’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순간 그 말씀의 의미가 파악되지 않았어요. 다음 수비 때 고바야시를 올리라는 건지 아니면 고바야시의 몸을 풀게 하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거죠. 감독님의 의중을 몰라 직접 여쭤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냥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선 곧장 불펜으로 향했습니다.”


투수 교체 상황에서는 불펜으로 전화하지 않나요?


“더그아웃에 전화기가 없었고 무전기도 사용할 수 없었어요. 제가 불펜으로 갈 수밖에요. 고바야시한테 몸 풀고 있으라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당연한 반응이었죠. 다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고 감독님께 고바야시 몸 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7회 수비인데 감독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거예요. 아니 고바야시를 내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선발 투수가 이닝을 끌고 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죠. 제가 감독님께 ‘고바야시, 내보낼까요?’라고 여쭤 봐도 묵묵부답이셨고요. 그래서 고바야시한테 그냥 나오라고 말한 다음 선발 투수로부터 공을 받아 고바야시한테 전달했습니다.”





그 경기는 이겼고요?


“네.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했죠. 경기 후 곧장 감독실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죄송하다고요. 감독님이 어떤 스타일로 경기를 이끌어 가는지 미리 파악 못했던 제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이후에는 변화가 있었겠네요.


“그 다음부터는 감독님 뒤에 앉아 있으면 감독님이 투수를 어떻게 구상하고 계시는지 보였어요. 사전에 연습조, 게임조로 나눈 다음 게임조는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역할 분담을 시켰습니다. 더그아웃과 불펜이 떨어져 있으니 중간에 경기에 나가지 않는 선수를 앉혀 놓고 감독님의 신호가 떨어지면 중간에 있는 선수에게 수신호를 보내 어떤 선수를 준비시킬지 전달했어요.”


수신호요? 어떤 수신호였나요?


“안경 쓴 선수 중 언더로 던지는 선수가 필요할 경우 그 모양을 흉내 냈고, 고개를 돌리면서 던지는 선수가 필요하면 그 선수의 특징을 수신호로 알렸어요. 선수들과 사전에 약속이 된 수신호라 중간에 오류가 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선수들을 백넘버로 말씀하시거든요. 한 번은 35번을 준비하라고 했다가 28번을 내보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사전에 35번, 28번을 모두 준비시킵니다. 경기 상황에 따라 투수 교체가 수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코치들한테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있어요. 고양 원더스에서 2년간 코치 경험하고 나면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다고요. 감독님은 굉장히 철저한 분이세요. 그 호흡을 맞추려면 제가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던 거죠.”


2015년 6월 13일 잠실 NC전을 앞두고 두산 김태형 감독은 어깨 부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된 니퍼트를 대신할 선발 투수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 2군 총괄로 있던 한용덕 투수코치(한화 감독)가 2군에 있던 좌완 허준혁을 대체 카드로 제시했다. 에이스의 대타로 나온 허준혁은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치며 NC의 5연승을 저지했고, 데뷔 첫 선발승을 거둔다. 그 경기 후 허준혁은 2군에서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코치 이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운드에 서는 순간, 타자를 압도할 수 있어야 하고, 마운드에서 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이 코치의 조언을 떠올린 것이다.


두산 2군 코치를 맡아 여러 선수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중에는 기량이 부쩍 향상된 선수도 눈에 띄었고요. 그중 허준혁 선수가 기억에 남네요. 데뷔 첫 선발승을 이뤘던 그 장면들이요.


“저도 그 경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김태형 감독님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제 이름을 거론하셨어요. 고마운 마음에 전화 걸려고 했는데 시간을 놓쳤다고요. 감사했습니다. 제가 뭘 했겠어요. 선수가 잘 따라줬고 자신의 잠재된 기량을 뽑아낸 것뿐인데요.”





그 해 7월, 노경은 선수가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면서 2군으로 내려갔어요. 약 한 달 간 2군에서 훈련하고 1군에 복귀해서는 ‘마운드에서 나쁜 남자가 되겠다’고 말했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노경은은 두산의 마무리 투수였어요. 그런데 마운드에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었죠. 저도 2군 생활을 해봤잖아요. 미국 마이너리그는 물론 일본 주니치 시절에도 2년 중 반년을 2군에서 보낸 터라 2군 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은이한테 별다른 얘기하지 않았어요.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기 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마음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경은이랑 산책을 많이 했어요. 주로 제가 야구했던 옛날 얘기를 많이 들려줬어요. 나중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은아, 여기서 딱 열흘만 내 말대로 해보자.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보고 1군으로 올라가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피칭 훈련 없이 산책만 2,3일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이후에는 공을 던질 때의 리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경은이가 투구할 때 보니까 제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2군도 원정 경기를 다니는데 원정 갈 때마다 경은이도 함께 했어요. 원정 경기에 동행하면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1군으로 올라간 경은이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줬죠. 1.1이닝 만에 선발투수가 조기 강판 당하자 이후 마운드에 올라가 5.2이닝 무실점 5삼진을 기록하며 4차전 승리의 영웅으로 거듭났으니까요. 저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웃음).”


2015년 두산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잠실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끽했습니다. 


“한국시리즈 동안에는 2군 코칭스태프도 모두 잠실야구장을 찾아가 응원을 펼쳤습니다. 경기 끝나면 더그아웃 뒤에서 기다렸다가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도 했었고요. 이현승이 마무리로 올라가 경기를 매듭지을 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잠실야구장에서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처음이었거든요.”


1994년 LG 트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팀은 태평양 돌핀스. 4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한 LG 트윈스의 4차전 경기장은 잠실이 아닌 인천공설운동야구장(숭의야구장)이었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한 LG와 해태. 4승1패로 해태가 우승을 차지했던 야구장은 잠실이었다. 이상훈이 속한 팀이 잠실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건 코치로 인연을 맺은 두산이 처음이었다. 이상훈이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보며 흘린 눈물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의미들이 함축돼 있었다.



<고양 원더스 선수들과 코치 이상훈.>



출처 :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1219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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