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이광길 수석코치가 마낙길과 함께 한화 훈련장면을 바라보는 모습(사진=NC)
이광길(53). NC 작전·주루코치다. SK에선 수비코치로 일했다. SK에서 코치로 있는 동안 그는 5회의 한국시리즈를 경험했다. 이 가운데 챔피언 반지를 낀 건 3번. 야구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노력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그는 ‘야구 업계’에서 유능한 수비코치로 꼽혔다. 만약 그가 자신을 드러냈다면 그는 업계뿐만 아니라 팬들의 입에서도 회자하는 스타 코치가 됐을 터.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그가 차를 몰고 인천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평범한 직장인이나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은 중소기업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때는 1988년 겨울.
그해를 끝으로 이광길은 야구와 헤어지려 했다. 떠돌이처럼 이 팀, 저 팀을 옮겨 다는 것도 더는 참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게 이광길은 1983년 삼미 입단 이후, 1988년까지 두 번의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1988시즌이 끝나고. 그는 세 번째 트레이드를 통보받았다. 빙그레는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됐으니 짐을 싸라”고 했다. 늘 그랬듯 사전 통보도, 귀띔 하나 없었다. 그는 “여기서 야구를 그만두겠습니다”하고 구단 사무실을 나왔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가까운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만둘 때 두더라도 태평양 감독이나 만나보고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전갈이었다. 그는 “태평양 감독이 누구 신데요?”하고 물었다. 상대는 “김성근 감독”이라고 했다.
“김성근 감독님이요?” 이때까지 그는 김 감독을 잘 몰랐다. 이름만 들었다. 훈련량이 무척 많은 감독이란 정보밖엔 없었다.
“그분, 독사라고 하던데….” 이광길은 주저했다.
“일단 만나보고 결정해. 알았지?” 상대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고민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대로 야구를 그만두긴 아쉬웠다. 그렇다고 다시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찬밥 신세가 되는 것도 마뜩잖았다. 고민 끝에 그는 ‘어쨌거나 트레이드된 팀에 찾아가 인사나 드리고 그만두는 게 예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일을 알아보러 가다가 그는 차를 돌려 인천으로 향했다. ‘인사나 하자’는 가벼운 마음이었기에 그는 양복 차림이었다.
태평양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구단이 잡아준 방에서 그는 몇 시간이나 김 감독을 기다렸다. 이윽고 김 감독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김 감독과 만난 이광길은 “죄송합니다. 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였다. 김 감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김 감독이 말문을 열었다.
“왜 야구를 그만두려고 하나?”
“이제 야구가 지겹습니다.”
“뭣 때문에 지겹나?”
“실력보단 학연, 지연, 빽으로 평가하는 야구가 지겹습니다.”
“음.”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야구를 계속한다면 뭘 하고 싶나?”
이광길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그라운드에서 뛴다면 나중에 후회라도 없게 한 시즌 전 경기를 다 뛰어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감독은 “알았다”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광길은 그런 김 감독을 보고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호텔을 떠나려는 찰나. 방 안으로 누군가 유니폼을 갖고 들어왔다.
“이게 뭡니까?” 이광길이 물었다.
“감독님께서 옷 갈아입고 내일부터 운동장에 나오시더라는데요.”
그제야 이광길은 김 감독의 ‘알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기회를 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야구인생을 불태워보자’고 결심한 이광길은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태평양에서 말로만 듣던 지옥훈련을 경험했다. 입에서 신물이 날 만큼 혹독한 개인훈련도 진행했다. 오직 ‘후회없는 시즌을 보내자’는 일념으로 그는 자신을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1989시즌. 그는 예전의 백업 내야수 이광길이 아니었다. 태평양 주전 2루수로 뛰며 6월까지 전 경기에 출전했다. 타율도 높아 3할 이상을 치고, 도루도 자주 성공했다.
하지만, 그즈음. OB(두산의 전신)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투수 앞 땅볼 때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다 타자 주자의 스파이크에 왼발 새끼발가락이 찍혔다. 의사는 “새끼발가락과 발등 상처가 깊다”며 깁스를 해줬다. 그리고 “전반기 남은 경기엔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렀다.
왼발에 깁스를 한 채 이광길은 다음날 구장에 나왔다. 김 감독에게 병원 진단 결과를 알렸다.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만 했다. 이광길은 잠시 더그아웃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심코 바라본 전광판에 자신의 이름이 떠 있는 게 아닌가. 이광길은 눈을 의심했다. 그런 이광길을 보고 코치는 “뭐해, 어서 유니폼 입고 훈련해야지”하며 등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그랬다. 김 감독은 부상 당한 이광길을 스타팅 멤버로 내보낸 것이었다. 김 감독에게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경기 시작이 코앞이라, 일단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로 나갔다.
이광길은 왼발 통증 때문에 그라운드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정신없이 9회까지 흘렀고, 어떻게 하다 보니 안타도 기록했다. 다음날에도 전광판엔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광길은 통증을 참고 뛰었고, 결국 그해 전 경기에 출전했다. 고통을 참은 대가는 이 밖에도 많았다. 그는 그해 올스타전에 당당히 뽑혔고, 타율 2할7푼, 38타점, 17도루로 프로 데뷔 이래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시즌이 끝나고. 이광길은 김 감독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어째서 자신이 부상중일 때도 경기에 출전시켰는지 물었다. 김 감독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했나. 한 시즌 전 경기를 다 뛰는 게 목표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야 나중에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이광길은 그때 처음으로 지도자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제야 무심코 던진 말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라는 걸 알았다.
199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광길은 이후 코치로 변신했다. 그가 지금껏 코치를 하며 절대 잊지 않는 건 1989년의 기억이다. 이광길은 말한다.
“지도자는 선수의 신뢰를 먹고 사는 존재이며, 신뢰를 얻으려면 나부터 공부하고, 선수와 맺은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현역 시절의 후광을 밑천 삼아 ‘난 했는데 넌 왜 못하느냐’식의 구태의연한 지도로 일관하는 지도자나 선수들 사이에서 ‘나보다 야구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만큼 무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도자, 혹은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의 행동이 다르다’고 평을 듣는 지도자가 있다면 야구원로 김양중 선생이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바로 ‘지도자의 권위는 강요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신뢰와 원칙으로 부여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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