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밤, 문학 구장이 불탔다. 김성근 감독의 갑작스런 해임을 반대하는 팬들의 거센 항의 때문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폭력성에 주목했다. 일부는 폭도라 부르기도 했다. 시위가 도를 지나치게 되며 선수 이동이 목적인 카트를 타고 운동장을 돌거나 훈련용 공을 탈취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던 탓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일부 폭력성만 나무라면 끝날 일이 아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한 SK팬들은 아마도 무언가에 취해 있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날뛰는 사람들로 비춰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얌전히 학교나 직장, 혹은 생업에 종사하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저 우리들이 흔히 만날 수 있고 함께 호흡하던 동네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분노를 참지 못해 동경해 마지 않던 야구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다. 왜 그렇게 변하게 됐는지 이유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순서다.
지난 4년간 SK는 평균 45번쯤 졌다. 나머지 날들은 모두 이겼다. 매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며 그 중 3번이나 우승했다. 한 번의 준우승 역시 값졌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2위 중 하나였다.
바꿔말하면 SK팬은 1년 중 320일은 행복했다는 의미다. 야구로 눈뜨고 야구로 숨쉬는 팬들에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최강팀의 팬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없던 자신감까지 생기는 환희를 맛본 적 있는가. 세상의 단 하나뿐인 최고가 되는 순간, 자랑스럽게 떨어지는 환희의 눈물을 흘려본 적 있는가.
반대로 꼴찌팀 팬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는가. ‘이제 야구 안 본다’고 다짐해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문자 중계를 확인하고 또 한숨 짓고. 가을이 되면 뜨겁게 타오르는 야구장의 환호를 늘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야 하는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가.
팬들에게 패배는 너무 아픈 상처다. 세상을 잃은 듯 괴롭고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외롭다.
야구가 직업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러냐고? 사랑하게 된 이유나 알면 이별이라도 쉽겠지만 그게 안되니 더 아플 뿐이다.
김성근 전 감독의 별명은 야신이다. SK 팬들에게 그는 매우 가까이서 함께 숨쉬는 현실적인 신이었다. 세상엔 많은 훌륭한 신이 있지만 누구도 직접 빵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야신은 SK 팬들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SK의 승리가 그만의 성과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SK는 좋은 선수들의 성장으로 만들어진 팀이다.
하지만 잊어선 안될 것이 한가지 있다. 안경현 SBSESPN 해설위원은 “나도 처음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SK 와 보니 위기에 빠졌을 때 전혀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감독님 모습 보면 편안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감독이 어떻게든 해줄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된다. 이유는.. 설명이 어렵다.”
위기의 순간, 누군가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건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기도는 보통 이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상대팀 역시 같은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SK팬은 다른 신을 찾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야신이 해줄거야...’라는 믿음을 가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도를 매우 자주 현실로 만들어냈다.
SK는 그런 감독을 하루 아침에 빼앗겼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태가 벌어진 이후, 기자는 생애 가장 많은 메일과 메시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감독님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였다.
SK팬들의 항의가 폭력성으로 흐르는 것에는 물론 반대다. 앞으론 절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될 것이다. 하지만 나무라기 전에 눈물부터 닦아주자. 왜 그렇게 미친듯 울고 있는지 이유를 들어주고 등 두드려주자. 그래야 또 한번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덧붙이기 : 같은 날, LG 팬들도 잠실구장 정문으로 몰려가 청문회를 요구했다. 당하는 입장에선 너무도 치욕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담스럽다거나 너무하다고 원망하기 전에 그들이 왜 우는지를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LG야 말로 팬들의 뼛속 깊은 눈물을 닦아 줄 때가 되었으니 말이다.
출처 :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822n09035?mid=s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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