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17

야구판. 야구인들이 야구계를 스스로 낮춰 부르는 말이다. 정치판. 국민들이 정치계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다. 야구계에 오래 몸담은 이들 중에는 '야구판이나 정치판이나 비슷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 나아가 '야구판이 정치판보다 더 지독하다'고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정말일까.




원래 사람이 두 명 이상 모인 곳에는 반드시 정치(政治)가 있게 마련이다. 야구계도 마찬가지다. 팀을 만들어 운영하고 이끌어 나가는 일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치다. 감독이 다양한 개성을 지닌 코치진과 선수들을 잘 다독여서 융화시키는 것도 정치라면 정치다. 심지어는 팬들의 인기와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일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정치의 범위는, 매우 넓고도 깊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정치에 엮이고 싶지 않아도 엮이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한 지도자는 프로야구 코치 시절, 감독과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다. 그런데 초반 팀 성적이 부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몇몇 언론에서 감독 경질 가능성을 언급하며 그 후임으로 해당 코치를 거론한 것. 입장이 난처해진 그는 감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진해서 사임했다. 나중에 오해가 풀리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오랜 우정이 '팀 내 정치'로 인해 깨질 뻔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코치 한 사람 선임하는 일도 때로는 '정치'가 된다. 한 지방구단 감독이 그런 예다. 투수진의 부진에 고민하던 그는 시즌 도중 인스트럭터를 초빙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초청하기로 한 코치가 다른 구단 감독 출신의 거물급 인사였다는 것. 하지만 감독은 "저 사람은 다른 지역 출신이니 내 자리를 위협하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에 안심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결과는? 얼마 후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고, 그 자리는 '다른 지역 출신'의 인스트럭터가 차지했다. 호랑이를 제 발로 안방에 불러들인 셈이다. 이처럼 야구계에서도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는 일이다. 피할 방법이 없다면, 기왕이면 '잘'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어서 문제다. 정치를 맞닥뜨리는 수준을 넘어, 정치가 지나쳐서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한 지방구단 단장은 코치진 내부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고 내분 조장하기를 즐겼다. 팀이 잘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또 90년대 어느 구단에서는 코치 두 명이 감독을 몰아내려고 작당해서 결국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둘은 차례대로 감독직에 올랐고, 후임자에게 자기들이 한 짓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

이런 사례들만 보면 '야구판이나 정치판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사실인양 싶다. 어쩌면 야구계가 정치판보다 더 무섭고, 냉혹하고, 암투와 모략이 끊이지 않는 마키아벨리 랜드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야구계와 정치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악하고 야비할수록 권세를 누리는 정치판과 달리, 야구계는 제 욕심만 채워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정치판에서 순수하고 선량한 이는 불우한 삶을 살지만, 야구계에서 올바른 길을 가는 이들은 언젠가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다. 온당한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이광환 전 LG 감독(야구발전연구원 명예원장)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LG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은 기억해도, 그가 전재산을 털어 야구박물관 건립에 사용한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가 한때 프로야구 8개구단 유지를 위해 자원봉사를 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모든 야구인들이 하나같이 이 원장을 존경하는 이유다. 그가 어디를 가든 원로로서 대접받는 이유다.

SK 김성근 감독은 또 어떤가. 한때 그는 수많은 오해와 편견, 비난에 시달렸다. 구단들은 그의 강성 이미지에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고, 일부 언론과 팬들은 그의 출생지를 들어 비난했다. '재미없는 야구', '투수혹사' 따위 비판도 쏟아졌다.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뒤 LG에서 경질되며, 그의 야구 인생도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SK에서 다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와 팬들의 성원을 받으며, 김성근과 SK는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야신'이라는 별명이 새롭게 붙었다. 야구 인생 말년에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온 셈이다. 하지만 김성근을 아는 이들 중 누구도 지금 그의 영광이 '과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이 받아야 할 사람에게 제대로 찾아왔다는 평이다.

반대로 권세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한때 '명장'으로 불리던 한 전임 감독이 그런 예다. 선수 혹사와 책임 떠넘기기로 점철된 감독 생활을 끝낸 뒤, 그는 곧바로 야구계 요직을 덥썩 차지했다. 한 관계자는 "감독 생활하면서 연봉도 많이 받았는데, 후배들이나 야구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거기 가서 앉았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자리는 그만 둔지 일 년도 안 된 고연봉자를 위한 곳이 아니라, 불우한 야구계 원로들의 품위 유지를 위한 자리"라는 얘기다. 요즈음 그 '명장'에게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예 야구계에서 잊혀진 사람이 될 거라는 평이 대다수다.

존경받을 만한 이가 마땅한 존경을 받는 곳, 무엇보다 존경할 만한 이가 존재하는 곳. 야구계가 정치판과 다른 이유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인지도.

글 : 야구라 배지헌

출처 : 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28&newsid=20100517110208957&p=ilgansports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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