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야구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우연이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공 하나에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거라고. 그런데 SK와이번스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달랐다.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실에 닿아 있었다.
“2월 10일 고치 전지훈련 캠프장. 지난해에는 이맘때 7~8명의 부상자가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는 부상자가 거의 없다. 감독의 표정은 그래서 밝았다. 그러나 전지훈련은 잘되어가고 있느냐고 묻자 ‘긍정적이지만 불안하다’고 평가했다. 선수와 코치들을 긴장시키는 건 여전했다.”
후쿠오카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들어간 고치(高知) 현은 아주 조용하고 고즈넉한 도시였다. 도로 위로는 1960년대에나 본 것 같은 투박한 전차가 버스보다 자주 지나다녔고, 더도 말고 딱 어른 키만 한 높이의 아기자기한 집들은 이방인에게 정겨운 볼거리였다. 오리엔트 호텔 근처에서 짐을 내리니 버스 기사가 ‘SK 야구팀을 만나러 왔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갑자기 엄지손가락을 곧게 세워 눈앞에 갖다 댄다.
고치에서 SK와이번스(이하 SK)는 일본의 유명 야구팀 못지않다. 김성근 감독이 2006년 SK에 합류한 후 줄곧 이곳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서울보다 7~8°C 정도 높은 기온이다. 약간 쌀쌀할 뿐 가을 하늘같이 청명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일본 고치 현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김성근 사단을 만나기 위한 1박2일 여정을 시작했다. 호텔에서 고치 시영 구장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허리 디스크 수술 후 김성근 감독은 아직 회복 중이었다. 인터뷰 때문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이 분명 힘들었을 텐데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진솔한 사람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었고 술도 한잔했다. 다음 날 숙소 식당에서 아침을 함께 먹고 야구장까지 나란히 걸었다. 선수들은 이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체육관 구석에 자리 잡고 우두커니 앉아 감독과 코치, 선수가 하나로 움직이는 훈련 모습을 지켜봤다.
SK는 다른 7개 프로야구팀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전지훈련을 시작한다. 일찍 몸을 풀면 정식 연습도 다른 팀보다 일주일 먼저 시작할 수 있다. 프로야구 전체 경기 일정을 놓고 볼 때 결국 모든 과정을 일주일 먼저 준비하는 셈이라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생각이다. SK는 지난해 2010 한국시리즈 삼성과의 결승전에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내리 4연승을 거뒀다. 2000년 창단 이래, 그리고 2006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이래 벌써 세 번째(2007년, 2008년, 2010년) 우승이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선수들은 휴식을 즐길 사이도 없이 지난 12월 22일까지 고치 캠프에서 1차 훈련에 돌입했다. 선수들은 매일 같이 각 포지션에서 연습을 하고,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전력을 분석했다. 그러는 동안 김성근 감독의 허리 통증은 최고조에 달했다. 저녁 연습을 끝내고 돌아와 옷을 벗는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적도 있다. 코치들이 달려와 옷을 갈아입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지난 1월, 전지훈련을 앞두고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고치 시영구장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은 다행히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고 열심히 재활하고 있는 중이었다.
“졌더라도 좋은 경기를 펼치면 구단이나 팬들은 ‘그래도 아주 잘 싸웠다’고 위로를 해요. 근데 승부에서 위로같은 건 필요 없어. 승부는 결과로만 말하는 거에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두 가지가 ‘타협’과 ‘해명’이에요. 나는 내 뜻을 스스로 정하며 살아왔어요. 만약 세상에 맞췄다면 난 벌써 야구계에서 사라졌을 거예요.”
지지 않는 야구란
김성근 감독은 28세의 나이에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1972년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 충암고등학교와 신일고등학교 감독을 맡았다. 프로야구에 합류한 건 1982년. OB베어스와 태평양돌핀스, 삼성라이온즈, 쌍방울레이더스, LG트윈스를 거쳐 SK와이번스에서 한국시리스 우승을 일궈내며 야구팬에게 그는 ‘꼴찌를 우승팀으로 만드는 제조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김성근 감독이 추구하는 야구는 우승을 위한 야구가 아니다. “이겼으니까 강팀처럼 보이는 거예요. 강팀이라 이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죠. 지난해 7개 팀을 상대했을 때 분명 우리도 쩔쩔맨 팀이 있었어요. 만약 우리가 강했다면 모든 팀을 쉽게 이겼어야 하는데, 쩔쩔맸다는 게 우리의 현주소죠. 물론 SK는 선수 모두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리더와 선수가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된 팀이죠. 점점 더 완벽에 가까운 강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성근 감독에게 강팀은 ‘이기는 야구를 하는 팀’이 아니라 ‘지지 않는 야구를 하는 팀’이다. 그가 SK에 처음 부임한 2006년과 2007년 경기의 목표는 ‘이기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겼다. 다음 해 2008년 전지훈련에서 SK는 목표를 수정했다. ‘지지 말자’였다. 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뜻이다. 한 점 주고 한 점 먹는 것이 아니라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지 않는 팀이 되기 위해서는 실수를 반복하면 안 돼요.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실수를 그대로 두면 실패로 발전합니다. 실수를 깊이 반성하는 사람은 그것을 도약을 위한 시행착오로 만들죠. 실수를 실패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로 만드는 것이 바로 SK 야구예요.”
SK가 한국시리즈에서 몇 년째 우승하다 보니, SK의 고치 캠프장을 방문하는 일본 야구 지도자도 매년 늘고 있다. 그들은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과 친선경기를 지켜보며 김성근 감독에게 “SK 야구가 많이 강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국내 야구는 ‘한국 야구’라는 커다란 덩어리로만 평가돼왔다. 그런데 이제 일본 구단이 한국의 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SK가 한국 야구의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김성근 감독이 투수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야구는 정말 투수 놀음이다. 타자들이 아무리 점수를 많이 뽑아내도 투수가 그 이상으로 점수를 내주면 경기는 진다. 반면, 타자들이 한 점 내지 못해도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 적어도 경기에서 지지는 않는다. 야구는 실점을 막는 경기다. 김성근 감독의 전술은 실점을 최소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실 김성근 감독이 2006년 처음 SK에 왔을 때만 해도 SK는 우승과는 거리가 먼 팀이었다. “2년을 계약하고 이곳에 왔어요. 목표는 단 하나, ‘싸울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거였죠. 첫 연습에 나왔는데, 실력이 형편없는 거예요. 이만수 수석 코치를 불러서 ‘야, 이거 봐봐. 이 팀 가지고 우승하겠냐?’ 그랬더니 ‘아이고, 이 팀 가지고 무슨 우승을 합니까?’ 그래요. SK는 거기서부터 시작했어요.”
수면 아래에서 누구보다 바삐 발버둥치면서도 한편으론 동시에 도망갈 구실을 마련해놓는 게 사람이다. 감독도 사람이다. “그 전까지의 팀에서는 한번도 우승이 목표라고 말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4강이 목표라고 말해왔죠. 스스로의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SK에 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우승이 목표라고. 유언실행! 뱉은 말은 죽어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2007년 4월 SK는 전력 질주했다. 다른 팀과 경기를 하는 족족 승리했다. 한번 우승을 맛보자 선수들의 정신 구조도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무조건 ‘우승’을 향해 달렸지만 이제는 ‘강한 팀’이 되기 위해 달린다. 다음 해 2008 한국시리즈에서도 SK는 2연패를 달성했다. 고치 시영구장에서 만난 한 선수는 자신의 팀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승은 당연한 거예요. 이제 저희는 그다음이 무엇일까 생각해요. 감독님과 벌써 5년을 함께하다 보니 감독님의 야구 철학에 세뇌된 거죠. 2009년에 홈런 타자 최정 선수가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받았어요. 그런데 한국시리즈 후 첫 타격 연습에서 공이 잘 맞지 않자 자신의 방망이를 부러뜨렸어요. 스스로 만족할 만한 타격이 아니었던 거죠. 2010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날도 그랬어요. 감독님은 우승컵을 안고 있는 저희에게 ‘오늘 우승은 벌써 과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 가 SK가 우승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내년 경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김성근 감독은 SK의 야구 색깔을 바꾸었다. 이제 SK는 자신의 힘으로 이기는 야구를 추구한다. “우승이란 우리 힘으로 얻을 수도 있지만 상대의 실수로 주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오직 우리 힘으로 이기자는 것이 SK 야구예요. 우리 힘으로 이기려면 실수할 확률을 0%로 만들어야 해요. 기본에 충실한 야구, 실수가 없는 완벽한 야구를 위해 싸워야 하죠.”
“우리는 모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살아간다. 인내의 한계, 도전의 한계, 체력의 한계. OB, 쌍방울, 태평양, 지금까지 모든 팀이 그에게는 감독의 한계를 시험하는 존재였다. 영리한 감독은 그러나 혼자만 당하지 않았다. 선수에게도 똑같이 한계를 시험했다. 전력투구를 위한 지옥 훈련. 그것은 곧 오합지졸을 우승 언저리로 옮겨놓는 기적을 선사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우리는 안다
한국의 최대 명절 설에도 김성근 감독과 선수들은 고치 전지훈련 캠프장에 있었다. 설날 새벽, 그는 오사카에 있는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갈 채비 중이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문밖에서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만수 코치와 이호준 주장을 비롯한 선수들이었다. 프로야구단은 스케줄상, 음력 새해를 전지훈련 캠프장에서 맞는다. 매년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초록 잔디 위에서 수십 명의 선수와 코치가 김성근 감독에게 세배를 했다. 이심전심. 아마 선수들은 서울에 있는 아버지에게 못다 한 큰절을 김성근 감독에게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성근 감독의 병원행으로 마운드 세배가 불가능했다. 호텔 방에서 조촐하게 진행한 세배도 무뚝뚝한 김성근 감독에게는 민망하기만 했다. 주장 이호준이 절을 올리며 말했다. “빨리 회복하셔서 저희와 같이 펑고(수비 연습할 때 배트로 공을 쳐주는 행위) 쳐주세요.”
김성근 감독과 선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로 향하던 박철순 선수를 자진해 기용했을 때도, 임호균 선수 각서 파동으로 태평양돌핀스 감독에서 경질되었을 때도 김성근 감독은 결정적인 순간에 선수를 보호했다. 야구인 중에서 가장 분석적이고 탄탄한 전략을 중시하는 그의 야구 스타일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본래 약한 사람이 남 앞에서 강한 척을 해요. 지금까지 총 여덟 번을 잘렸어요.(웃음) 대부분이 선수 문제였고, 구단에 대항해 싸우다 쫓겨난 거지. 근데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일부러 싸운 경우도 있었어요. 싸움을 거는 경우도 있었고.” 항상 자신의 것을 주는 데 익숙한 그는 그래서 자기 것이 별로 없다. “내가 얼마나 시간을 쏟느냐에 따라 선수의 미래가 달라지는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쉴 수 있겠어요. 허리 디스크 수술도 그래요. 의사는 계속 쉬라고 하는데 내가 쉬면 우리 아이들은 그만큼 배울 시간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영웅이 되어 돌아온 SK 투수 김광현은 김성근 감독이 인사법부터 가르친 케이스. “국가대표팀 경기를 떠날 때 공항에서 전화를 안 하고 가는 거예요. 돌아와서도 마찬가지고. 혼쭐을 냈지. 그 뒤로는 100m 앞에서부터 인사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선수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자식이 밖에서 욕먹고 다니면 어떤 부모가 좋아해요?”
김성근 감독이 싫어하는 게 또 있다. 바로 책임전가. “작년 삼성과의 경기에서 우리가 진 적이 있어요. 그 경기에서 김광현이 포수였던 박경완과 사인이 잘 안 맞자 인상을 쓰고 박경완을 쳐다봤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야구는 서로 미안해하면서 해야 하는 경기예요. 왜 그렇게밖에 못 던지느냐고 하면 싸움밖에 안 나요. 근데 김광현은 상대탓을 하는 표정으로 경완이를 쳐다봤어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그 표정을 봤죠. 그래서 경기 끝나자마자 김광현을 2군으로 보냈어요. 다들 놀랐죠. 톱스타를 2군으로 보냈으니. 2군팀은 당시 전라도 강진에 있었어요. 김광현이 혼자 버스 타고 8시간이나 걸려 대구에서 강진까지 가면서 뭘 느꼈겠어요? 2군 감독한테는 ‘광현이 갈 거니까 도착하는 대로 운동장 20바퀴 돌려라’라고 전화했죠. 3일 후에 다시 강진에서 대구로 불렀어요. 올 때는 10시간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광현이보고 ‘고생했다’ 단 한마디만 했어요. 다음 날 시합에 광현일 내보냈죠. 엄청 잘 던져서 승전 투수가 됐잖아요.”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다. 한 야구 평론가는 신문에 이런 글을 발표했다. “김성근 감독은 정신 상태가 해이해진 에이스 김광현을 곧바로 2군으로 보내버렸다. 전 세계 야구 감독 중에 ‘명장’ 소리를 듣는 감독은 많지만 김성근 감독처럼 정말 독하게, 야구를 성전처럼 여기면서 경기하는 감독은 없다. 그걸 좋게 받아들이는가, 나쁘게 받아들이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첫 감독을 맡은 1969년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성근 감독에게는 변치 않는 철학이 하나 있다. 선수는 내 자식이라는 것이다. 스승이 되기에 앞서 아버지가 되기를 자청한 그가 충암고등학교 감독 시절, 연습하던 학생이 휘두른 배트에 입을 맞아 앞니가 몽땅 빠지고 입이 피투성이가 된 사건은 익히 알려져 있다. 사색이 된 제자가 그 충격으로 야구를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이가 빠진 채로 제자에게 농담을 건넸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절박함, 승리의 열쇠
10년간의 선수 생활과 40년째 이어오고 있는 감독 생활까지, 김성근 감독은 단 하루도 전력 질주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 가쓰라 고등학교에서 투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운동에 별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달리기를 해도 3등 안에 든 적이 없고, 상대편에게 그리 위협적인 투수도 아니었다. 단 하나, 그에게는 강한 집념이 있었다.
“집이 워낙 가난해 고등학교 때 우유 배달로 학비를 벌었어요. 학비를 내야 야구를 할 수 있으니까. 새벽 4시부터 배달을 시작했어요. 자전거 앞뒤에 실은 우유병이 300~400개였죠. 근데 배달을 아무 생각 없이 하진 않았어요. 스타트 전에 몇 개의 동선을 그리고 오늘은 이 길, 내일은 저 길로 갔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지 분석하고 정리했어요. 버스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좌석이 있어도 앉지 않았어요. 손잡이도 잡지 않고 버스에 내 몸을 맡겼을 때 몸이 움직이는 방향이나 무게를 관찰하고 중심 잡는 연습을 했어요. 그런 것이 나중에는 야구에도 활용되더라고요. 팔목 각도를 이렇게 해서 던졌을 때와 저렇게 해서 던졌을 때 어떻게 다른지 모두 기록하고 데이터로 만들었어요.”
어려운 시절을 오로지 근성과 절박함으로 이겨낸 그에게는 감독 생활 역시 평탄치 않았다.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OB, 쌍방울, 태평양까지 문제아가 많았고 꼴찌 팀이었으며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재일교포 출신 김성근 감독에게는 본능적인 ‘전력투구’ 정신이 있었다. 약한 팀을 맡았을 때 ‘큰일났다’가 아니라 ‘이 오합지졸을 잘 훈련시켜 꼭 쓸 만한 팀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먼저 다지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훈련은 일명 지옥 훈련으로 알려져 있다. 펑고 훈련은 수비수 위주 훈련으로, 감독이나 코치가 치는 공을 받아내는 연습이다. 김성근 감독은 허리 디스크 수술 전날까지 펑고 훈련 때마다 1000개씩 공을 쳤다. “나는 1000번 방망이를 휘두르고 선수는 1000개의 공을 받아내요. 꼬박 3시간 걸리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만 그 순간만큼은 목숨을 걸고 해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는 거예요. 절박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매일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야 해요. 그래야 시합에서 이기죠. 지금까지 내가 맡은 9개 팀 모두 그렇게 연습시켰어요.”
연습은 곧 좋은 습관을 굳히는 과정이다. 습관을 좋은 쪽으로 바꾸려면 생각을 바꿔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행동을 바꿔야 한다. 생각 없이 치고 생각 없이 던지는 선수는 1년이 지나도 그 버릇을 못 고친다. 그래서 연습이 실전보다 중요하다. 간혹 연습 때 집중력이 약해진 선수에게 김성근 감독은 꿀밤을 먹인다. “나중엔 내 손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배트 손잡이 아래 부분을 잘라 권총처럼 바지춤에 차고 다니면서 그걸로 꿀밤을 때리기도 했어요. 1989년 태평양돌핀스 감독으로 있을 때도 그랬어요. 1승도 못한 팀을 훈련시키자니 꿀밤 가지곤 안 되더라고요. 선수들을 패긴 패야겠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발치에 돌멩이가 있기에 그걸로 선수 이마를 콕 찍었어요. 물론 피가 났죠. 피를 보니까 아이들이 돌더라고요. 그때부터 열심히 하더니 10승, 15승 쭉쭉 달렸어요. 그렇게 맞은 선수들이 20년째 매년 1월 1일이면 우리 집에 세배를 하러 와요.”
“외롭지 않은지 물었더니 잠시 말을 멈춘다. 지도자라는 위치는 본래 고독한 숙명이다. 게다가 50년 가까이 오직 야구만 생각하고 살았으니 주변에 사람이 없을 만하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부추기진 않았지만 또 누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린 적도 없다. 제자가 늘어나는 속도만큼 친구가 줄어드는 속도도 빨랐다. 잔인하지만, 당신이 느끼는 고독감의 깊이를 말해달라고 했다.”
감독은 외롭다
“솔직히 외롭죠. 특히 시합에서 진 날이면 더 그래요. 경기에 지면 기분도 안 좋고, 그래서 술 한잔이 생각나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요. 주변에 선수나 제자, 코치밖에 없으니까요. 그중 가장 가까운 게 코치인데 저는 코치와 개인적으로 술을 하지 않아요. 술 먹다 나도 모르게 하소연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감독으로서 책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술 생각이 나더라도 곧바로 다시 자제를 하게 되죠.”
김성근 감독은 경기 중에는 거의 룸서비스로 식사를 한다. 시간도 절약되지만 무엇보다 선수와 코치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다. 마찬가지로 시합 때도 선수들과 같은 버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선수들에게 편해요. 내가 옆에 있으면 코치조차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해요. 분명 감독과 코치, 선수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강이 있어요. 개울처럼 폭은 좁은데, 엄청 깊죠. 그게 바로 고독감이고 외로움이에요.”
고독과 외로움을 너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김성근 감독에게 가장 큰 절망과 슬픔을 안겨준 일은 3년 전 벌어진 윤길현 선수 사건이다. 2008년 6월 문학구장에서 열린 기아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윤길현은 8회 초 기아의 최경환에게 빈볼(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빈볼에 맞지 않았지만 최경환은 불쾌한 표정으로 윤길현을 쳐다봤다. 그런데 문제는 윤길현의 혼잣말. 비록 들리진 않았지만 욕설을 내뱉는 입 모양이 전파를 타면서 이 사건은 기아타이거즈 팬의 난동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SK팀의 차량을 포위, 윤길현을 2군으로 강등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론이 점점 거세지자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김성근 감독은 호텔 2층에 선수들을 집합시켰다. “오늘 있을 두산과의 경기에 나는 출전하지 않는다.” 경기 포기를 의미하는 이 발언은 선수에게도, 언론에도 충격적이었다. “여론을 진화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만약 외부 압력으로 경기를 포기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내 스스로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팠어요. 아마 내 인생에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 남을 거예요.” 선수들에게 그렇게 공표하고 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따라붙는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꽝 닫히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어요. 내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선수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자식을 보호하는 것이 아버지가 할 일이니까요.”
“부모는 자식에 대한 어떤 비난도 가슴으로 받아야 해요. 그 뒤에 자식이 숨을 수 있도록. 선수와 아랫사람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대장이 되는 거예요. 나만큼 대한민국에 욕먹는 지도자가 어디 있어요. 근데 나만큼 내 뒤에 숨은 아이들이 많은 감독도 없어요. 선수를 얼마나 부담 없이 움직이게 만드느냐가 리더의 능력이에요.”
인터뷰 내내 김성근 감독의 표정은 비슷했다. 눈빛은 살아 있으되 표정은 없는. 그것은 ‘표정을 뺏기면 진다’는 그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상대편뿐 아니라 선수, 코치에게까지 해당되는. “대장이 어떤 상황에서도 부동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해요. 적어도 내 제자들은 ‘감독님이 있으니까 우리는 괜찮아’라는 믿음이 있어요.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도 마지막에 나한테 기대하는 그런 거.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사람.”
8개 구단 사령탑 중 가장 연장자인 김성근 감독은 올해 SK와의 계약이 만료된다. 40명의 SK 선수는 아직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감독 중 가장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김성근 감독도 마찬가지다. 2011년 프로야구에서 그들이 네 번째 기적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아마 전지훈련 캠프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어 뿜어낸 그 거친 호흡의 결실일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사진 안지섭
출처 : http://www.noblesse.com/v3/Features.do?dispatch=view&id=2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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