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6.03 김은식 기자(punctum)
▲ 김성근 감독 사인회 2일, SK와이번스는 문학 홈경기를 '김성근 감독의 날'로 치렀다.
지난 5월 10일, 김성근 감독이 우리 프로야구 역사에서 두 번째로 통산 2000번째 경기에 출장했다. '음지의 야구인'이자 '서민감독'을 자처하는 그가 '양지의 야구인'인 김응용 감독보다 한 발 늦게, 그리고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보다 한 발 앞서 대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해마다 많게는 133경기, 적게는 80경기씩을 치러온 한국프로야구에서 2000경기 출장은 지도자로서 인생 전부를 바쳐온 이만이 만들 수 있는 기록이며, 또한 그만큼의 성과를 만들어온 이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성근 감독은 1984년 OB베어스에서 시작해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를 거쳐 SK 와이번스까지 여섯 팀에서 18년간 프로야구 감독으로 활약했다. 야구계에서 '자기 편' 없기로 유명한, 그래서 '야인'의 이미지가 강한 김성근 감독이 18년 동안이나 현장에서 지휘봉을 휘둘러왔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대한민국이란 모름지기 연줄과 인맥 없이 되는 일이 없는 나라인 데다가, 프로야구팀 감독이란 중간에 두 팀이 늘어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 단 여덟 명에게만 주어지는 귀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돌풍의 설계사, 실력으로 인정받다
물론 그 비결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능력과 그것의 객관적 근거인 성적이었다. 그것은 가뜩이나 엷고 노쇠한 선수층에 첫 해 우승을 위해 에이스 박철순마저 무리하게 소모해버리며 바닥을 드러내던 OB 베어스를 이끌고 그나마 꾸준히 중상위권을 유지했던 첫 5년 동안 이미 증명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천야구와 인연을 맺은 1989년, 그리고 다시 1996년과 1997년에 만년 꼴찌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를 일약 3위권으로 끌어올리면서 그는 한국야구사에 아주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가 '돌풍의 설계사'라 불릴 수 있게 된 것 또한 그 무렵부터였다.
"4강까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너희들의 몫이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그가 이끌던 LG 트윈스 선수들에게 했다는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허풍이나 빈말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그해 그는 허약했던 팀을 이끌고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역대최강팀 중 하나인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기적적인 한국시리즈 6차전 명승부를 펼치는 또 하나의 돌풍을 일으켰고, 5년간의 공백을 거쳐 부임한 '만년 중위권 팀' SK 와이번스엔 곧장 창단 첫 우승과 2연패의 기쁨을 연달아 안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야구감독에 대한 비난이 '무능함'에 관한 것인 것과 달리 김성근 감독을 비난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는 '혹사', 혹은 '지나친 승부욕'이 되곤 한다. 물론 '혹사'에 관해서는 그렇다고 볼 만한 근거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볼 만한 근거도 있다. 그리고 '지나친 승부욕'에 대해서도 '어느 만큼이 적절한 승부욕인가'는 주관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저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혹시 누군가가 김성근 감독을 '지나친 승부욕 때문에 혹사를 일삼는 감독'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와 야구관과 기술적 견해가 다르다는 것 이상의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희생을 가로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유형의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선수를 위해 옷을 벗은 감독
김성근 감독은 여섯 팀의 유니폼을 입었고, 당연히 다섯 번 옷을 벗었다. 원래 야구감독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그에게도 '명예로운 퇴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구단과 충돌했고 씁쓸하게 내몰렸다.
그러나 그가 허규옥 등 원년 멤버들을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정리하려고 했던 1992년의 삼성 라이온즈, 임호균을 내칠 수 없다는 그에게 각서까지 요구했던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서처럼 선수들에게 칼질하려는 '높은 분들'의 뜻에 굳이 맞서지 않았다면 그중 몇 번은 옷을 벗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선수를 지키려다가 옷을 벗은 감독의 이야기는, 사실 김성근을 제외하면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인맥과 파벌을 만들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리더 역시 야구계를 떠나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맥과 파벌이란, 누구에게나 자신의 힘을 키우고 지키며 세월이 갈수록 평안하고 조용하게 대접 받고 살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SK 와이번스의 신영철 사장이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감독님한테 내가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뭐냐 하면 코치나 선수들하고 절대 같이 식사를 안 하신다는 거야. 가끔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나누고, 고충도 듣고, 또 팀을 지휘하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공유를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나 구단 사장님의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김성근 감독은 절대 자신이 지휘하는 팀의 코치나 선수와 밥상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 그는 감독실이나 선수단의 식사가 모두 끝난 늦은 밤 시간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거나, 혹은 그 시간마저 놓치면 거르는 일도 종종 생긴다. 쌍방울과 LG에서 만나 수제자로 불리기도 했던 박경완, 김재현도 김성근 감독이 야인 신분이 되고서야 사석에서 같이 밥 한 그릇을 먹어보았을 뿐이다.
굳이 뇌물과 향응이 오가지 않더라도, 같이 밥 한 번 먹는 부대낌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의 자신감을, 누군가에게는 필요 이상의 소외감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김성근 감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화된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 '나도 노력하면 주전이 되고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동안 돌핀스에서, 레이더스에서, 그리고 와이번스에서 무명의 신예들이 이를 악물고 분투해 숱한 돌풍과 이변과 기적을 만들어온 핵심적인 요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00승과 2000경기 출장, 그 숫자 이상의 의미
그렇게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걸어왔던, 그리고 결벽증적일 정도로 공정해지려고 노력해왔던 그였기에 그 악명 높은 강훈련의 세월 속에서 단 한 번의 항명파동도 그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선수와 선수 출신들로부터 가장 욕먹지 않는 지도자라는 소리없는 박수나마 듣고 사는 이가 바로 김성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한국야구사에 남겨가고 있는 족적이 그저 길이 남을 기록과 성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사심 없는 열정으로 이끌어가는 지도력의 한 유형을, 그리고 그 지도력의 성공사례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기록한 1000승과 2000경기 출장은 그저 공허한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숙연하게 고개 숙여 무게감을 느껴도 전혀 부끄럽거나 공허하지 않은 치열한 세월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의 2000경기 출장을 기념해, SK 와이번스는 지난 2일(화요일) 문학 홈경기를 '김성근 감독의 날'로 치렀다. 경기 전 김성근 감독의 사인회가 열렸고,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일구회, 그리고 SK 구단과 구단주의 기념패가 전달되었으며 적장 롯데 자이언츠의 로이스터 감독도 꽃다발을 전했다. 원래 5월 23일(토요일)로 예정되어 있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열흘이 미뤄진 행사였지만, 경기 시작 전 내렸던 비 때문에 그나마 예정되었던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가 있는 불꽃놀이'와 단상인터뷰는 다시 20일로 미뤄지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오랜만에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그가 걸어온 열여덟 시즌, 그리고 스물여섯 해의 감독 인생 대부분이 그랬듯 지금도 그의 이름은 대개 논쟁, 많은 경우 멸시와 조롱, 이따금 격정적인 분노와 비난의 중심에 서곤 한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변명하는 일에 진저리를 치는 성격, 그리고 어떤 말이건 행동이건 굳이 '때의 유불리'를 따지기 싫어하는 비주류의 본능은 그와 대중 사이에 꽤나 두터운 장벽을 만들어놓고 말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알면 알수록 존경심을 갖게끔 만드는 이 김성근이라는 야구인은 대중에게 아주 조금만 알려져 있거나,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해 잘 알건, 그렇지 못하건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김성근을 비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만큼 사심 없이, 그만큼 자신을 경계하고 채찍질하며, 그만큼 열정적으로 70여 년 가까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잘 알지 못하는 이에 대해 무시무시한 편견을 가지거나,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미숙한 아이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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