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9

‘승부의 세계는 이런 것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굴 탓하랴.’

84년 김성근은 초보감독답지 않게 선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는 어쨌거나 그에게는 아픔이었다. 삼성의 고의패배가 원통했지만 그 이전에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는 걸 절감했다. 시간과 역사의 물길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84년 재일동포 선배인 김영덕의 ‘고의패배’에 가을잔치 참가가 무산된 김성근은 86년 다시 한번 김영덕에게 아픔을 겪는다. 이번에는 처음 참가한 가을잔치 무대였다.

그 이전에 김성근의 OB가 드라마틱하게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한 과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85년 삼성이 전후기리그를 통합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가 무산되는 바람에 86년부터 새로운 포스트시즌 제도가 도입됐다. ▲전후기 1?2위팀에게 각각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하되 ▲전?후기에 걸쳐 티켓 2장을 쥔 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나머지팀끼리 플레이오프를 거행하며 ▲티켓을 가진 팀이 모두 다를 때는 전기 1위-후기 2위. 후기 1위-전기 2위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는 방식이었다.

전기리그 우승팀은 삼성이었고. 후기리그 우승팀은 OB였다. 프로야구 출범 후 4년간 지속된 방식 같았으면 당연히 김성근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야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에 따라 해태가 전후기에서 2위를 차지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혜택을 받았다. 김성근은 이렇듯 번번이 행운과는 엇박자 행보를 보였다.

플레이오프 무대에 오르는 과정 만큼은 극적이었다. 아마추어 시절 투타에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한 슈퍼루키 박노준이 투수와 타자를 오가며 투수로서 5승6패7세이브. 타자로서 타율 0.173(52타수 9안타)에 그쳐 ‘거물선수’로서의 이름값은 해내지 못했지만 재일동포 최일언이 19승4패를 올리며 에이스로 발돋움하면서 전력이 상승했다.

OB는 85년 서울로 입성해 동대문구장을 사용하다 86년부터 MBC와 잠실구장을 함께 사용하게 됐는데 후기리그 우승을 놓고 해태 MBC와 피말리는 혈전을 치렀다. 해태는 김응룡. MBC는 김동엽이 이끌고 있었다. OB는 9월 1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이미 경기가 먼저 진행된 MBC가 광주에서 신인 김건우의 호투 속에 해태를 9-4로 꺾었기 때문이었다. 해태는 후기리그에서 33승19패2무(승률 0.635). MBC는 31승19패4무(승률 0.620)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OB는 최종전에 앞서 32승19패2무를 기록 중이었다. 최종전에서 이기면 플레이오프 진출. 패하면 탈락의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기로였다.

포스트시즌이 좌절된 롯데. 상대로서는 제격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즌 19승을 올리고 있던 최동원이 프로 최초 3년연속 20승을 따내기 위해 선발투수로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9회말에 들어가기 전까지 3-1로 뒤졌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야구는 9회말부터였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8857.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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