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5

김영덕 선배의 전화를 받고 다시 대한체육회 지하다방으로 갔다. 김영덕은 그 자리에서 “같이 가자”며 손을 이끌었다. 바로 OB 비서실이었다. 이 자리에는 이광환도 와 있었다. 그러면서 82년 원년 OB 코칭스태프는 감독 김영덕. 투수코치 김성근. 수비 및 타격코치 이광환으로 구성됐다. 최근에는 팀당 1군등록코치가 6명이고. 2군코치와 비등록코치까지 팀마다 10명이 훨씬 넘는 코치를 보유하고 있지만 원년만 해도 코치는 팀당 2명 수준이었다.

김성근과 김영덕의 인연은 이보다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성근이 일본 가쓰라 고교 졸업무렵이었다. 김성근보다 6년 선배인 김영덕은 당시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소프트뱅크 전신)에서 뛰었다. 59년 난카이에 입단해 3년간의 2군생활 끝에 59년부터 5년간 1군에서 활약했다. 김영덕은 2군숙소에서 일본말로 ‘오야붕(대장)’이었다. 체격도 컸고. 주먹에서도 그를 당해낼 일본사람이 없었다.

김성근이 난카이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을 때였다. 당시 숙소에 머물며 테스트를 받고 있는데 김영덕은 다른 선수에게 “얘 잘 데리고 다녀”라고 명령하며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둘은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았다. 김성근 부모의 고향이 경남 진양군이었고. 김영덕 부모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김성근 아버지는 막노동을 했고. 김영덕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다. 둘 다 교토에서 태어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김성근은 60년 한국무대에 뛰어들었는데. 김영덕은 김성근이 20승을 거두며 다승 2위에 오르던 64년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하며 한국무대로 진출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김영덕은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싱커와 슬라이더. 역회전볼 등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공으로 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조흥은행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고. 그해 255이닝을 던지며 0.32의 방어율을 작성했다. 이후에도 2차례나 더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68년 한일은행에서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노히트노런도 3차례나 달성했다.

이런 인연으로 프로야구 첫해에 OB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하는 기쁨을 나눴다. 그러나 성격이 강했던 둘은 시즌 중에도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김성근이 올린 2군선수를 김영덕이 다시 교체해버리면서 김성근이 경기 도중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둘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83년말 삼성 감독 자리를 놓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삼성 서영무 감독이 83년 시즌 도중 교체된다는 소문이 돌던 무렵이다. 삼성측에서 김성근에게 5년계약을 제안하고 나섰다. 김성근은 삼성측에 “투수코치라면 유백만에게 맡겨보라”고 조언한 뒤 김영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코치 계약이 아니라 감독 계약이었다.

이재국기자 keystone@

출처 :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487607.htm?ArticleV=old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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