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5.

 

 

 

 

[스포츠서울] 2016년 12월, 부산시 기장군에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완공될 예정이다. 이즈음, 야구인들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은퇴 선수 및 지도자, 야구인을 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지도자 중에선 두 명의 감독이 헌액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는 김응룡(74)전 삼성 감독과 김성근(73)한화 감독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두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부터 한국 야구의 역사를 이끈 살아있는 전설이다. 특히 지도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야구 양질의 발전을 이끌었다. 스포츠서울은 ‘시공초월 라이벌’ 11번째 주인공으로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을 비교해보려 한다. 두 명장의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세를 풍미했던 명장 두 명을 함께 기리는 장으로 활용하려 한다.

 

 



◇ 북한 출신의 김응룡, 일본 출신의 김성근

1939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김응룡 감독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51년 1.4후퇴 때 아버지와 함께 월남했다. 부산에 자리를 잡은 김 감독은 또래보다 두 뼘이 더 큰 키와 덩치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김 감독은 부산 개성중에서 당시 야구부 주장의 눈에 띄어 야구를 시작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구는 김 감독의 천직이었다. 그는 부산상고(현 개성고) 졸업 후 실업리그 한국운수 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한국운수가 크라운맥주, 한일은행 야구단으로 차례차례 매각됐지만, 부동의 4번타자는 그의 차지였다. 실업야구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박영길 전 롯데 초대 감독은 “선수 김응룡의 몸은 매우 유연했다. 마치 이대호와 비슷했다”고 말했다. 김응룡 감독은 1973년 34세의 나이에 한일은행 사령탑에 취임했다. 감독 겸 선수로 뛰었는데, 김영덕 전 한화 감독은 “비록 아마추어였지만 김응룡은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타자였다”고 회상했다. 김응룡 감독은 1977년에는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한국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을 세계대회 첫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은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가쓰라 고교 재학중이던 1959년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경기를 통해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고교 졸업 후에는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었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에 문을 두드렸지만 입단하지 못했다(김영덕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성근 감독을 난카이 호크스에 연결시켜준 이는 재일동포 최태환씨였다. 최씨의 아들은 현재 한신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는 야마모토씨다. 야마모토 스카우트는 오승환 영입을 주도했다. 그러니까 최씨 부자는 대를 이어 김성근 감독과 오승환을 일본 프로야구에 연결시킨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방향을 틀어 한국 동아대학교에 스카우트 됐다. 이후 1962년 실업야구 기업은행의 창단멤버로 활약했다. 1961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때에는 국가대표로 나와 준우승을 이끌었다.

김성근 감독의 국내 정착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과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은 “당시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은 말도 못할 수모와 아픔을 겪었다. 김성근 감독이나 나나, 한국 정착 당시 한국말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항상 외톨이였다. ‘반(半) 쪽발이’라는 놀림은 약과였다. 대놓고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받았다. 이런 환경은 김성근 감독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영길 감독은 “김성근 감독은 주변에 자기편이 없었다. 참 외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편에서 계속)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

 

출처 : https://sports.naver.com/news?oid=468&aid=0000000088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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