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5.
[스포츠서울](상에서 이어짐)
◇ 우승을 유지한 김응룡, 우승을 만들어간 김성근
김응룡 감독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1983년 해태 2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 탄탄대로를 걸었다. 2000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거느렸다. 선동열, 이종범, 김성한, 김종모, 이순철, 강인권, 한대화 등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자랑하며 숱한 우승을 만들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숱한 오해와 폄훼를 당했다. ‘선수복이 많은 감독일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김응룡 감독과 함께 했던 야구 원로들은 ‘틀린 말’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영길 감독은 “90점짜리 전력을 갖고 있는 팀은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수들로 5년 이상 우승을 독점하긴 힘들다”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김응룡 감독은 우승을 한 뒤엔 꼭 빅트레이드를 시켰다. 어금니를 하나씩 뺐다. 바로 선수단에 긴장감을 부여한 것이다. 선수단에 대한 운영능력과 단합을 이끄는 힘은 당대 최고였다”고 회고했다.
김응룡 감독은 프로야구 지형의 변화를 가져오는 대형 트레이드를 속속 성사시켰다. 1983년 우승 후 우완 신태중을 삼미에 보냈고 1987시즌 후에는 대도 김일권을 태평양으로 보냈다. 1993년에는 한대화, 신동수를 LG의 김상훈, 이병훈과 맞바꾸기도 했으며 좌타자 박철우, 윤재호를 쌍방울 송인호와 트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삼성 감독 시절인 2001년 1월31일엔 김주찬, 이계성을 롯데에 보내면서 거포 마해영을 영입했다. 그야말로 과감한 결단이 줄을 이었다. 김응룡 감독은 트레이드 50회라는 특이한 기록도 갖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시절 지나친 혹사로 어깨 부상을 당한 뒤 야수로 전업했고 1969년 이른 나이에 선수 은퇴했다. 그리고 1970년 마산상고 감독으로 첫 지휘봉을 잡았다. 이어 기업은행,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거친 뒤 1982년 OB 창단 투수 코치를 맡았다. 당시 OB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은 “당시 OB의 코칭스태프는 나와 이광환 타격 코치, 김성근 투수 코치 단 3명이었다. OB 마운드는 김성근 감독이 완전히 책임졌다”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은 1984년 OB감독에 취임한 뒤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를 거쳐 한화까지 맡게 됐다. 김 감독은 만년 하위권이었던 태평양(1989년·3위)과 쌍방울(1996년·2위)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2002년 LG를 한국시리즈에 올려놨다. LG감독 때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하위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김인식 기술위원장은 “과거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 과정을 매우 중시했다. 선수들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무섭게 가르쳤다. 선수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량 발전을 이뤄냈고, 자연스레 팀의 전력과 팀 분위기도 끈끈해졌던 것 같다”고 전했다.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은 SK에서 꽃을 피웠다. 김 감독은 2007년부터 2011년 중순까지 SK 사령탑으로서 한국시리즈 3회 우승을 일궈냈다. 박영길 감독은 “내가 느끼기엔 김성근 감독이 일본 지바롯데 코치를 하면서 야구에 대한 눈이 만개한 것 같다. 쌍방울 감독 시절 때만 해도 오더의 90%가 고정됐었는데, SK때부터는 자기팀과 상대팀을 꼼꼼히 분석해 변화무쌍한 기용술을 보이더라. 발렌타인 감독이 있었던 지바롯데에서 메이저리그 식 운용안과 일본 야구의 운용안을 접목해 본인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내 최대의 라이벌 김응룡·김성근의 2002년
철학이 달랐던 두 명장,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단 세 차례만 만났다. 이중 2002년 한국시리즈(KS)가 최고의 명경기로 꼽힌다. 김응룡 감독은 2001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해 KS 준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해 다시 한번 KS 대권에 도전했다. 김성근 감독은 하위 팀이었던 LG를 정규시즌 4위에 올려 놓은 뒤 준플레이오프(PO)와 PO에서 현대와 KIA를 잇따라 꺾고 KS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준PO와 PO를 치른 탓에 LG 선수들은 체력이 고갈됐지만 투혼을 쏟아냈다. 당시 LG 김재현(현 한화코치)는 고관절이 좋지 않아 대타 출전해 장타를 날린 뒤 겨우 1루에 걸어가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KS는 6차전에서 삼성 이승엽과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에 힘입은 삼성이 시리즈 전적 4승2패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준우승 후 김응룡 감독은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았다”며 김성근 감독을 추켜세웠다. 이 때, 김성근 감독은 그 유명한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이 때의 패배가 꽤나 뼈아팠다. 김 감독은 훗날 “감독 부임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경기”라고 고백했다. 두 감독은 이외에도 1987년 PO(해태 김응룡, OB 김성근), 1989년 PO(해태 김응룡, 태평양 김성근)에서 정면 충돌했다. 모두 김응룡 감독이 이끄는 해태가 승리했다.
◇ 자율야구 김응룡 감독 VS 관리야구 김성근 감독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은 스타일 자체가 전혀 다른 지도자다. 특히 선수들의 훈련 방식부터 차이가 난다. 김응룡 감독은 선수들의 관리체계에 중점을 뒀지만 김성근 감독은 훈련을 통한 실력의 성장을 유도했다. 김인식 기술위원장은 “김응룡 감독은 훈련을 적게 시킨 지도자였다. 특히 베테랑 선수들과 몸관리가 필요한 선수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자율 훈련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선수 시절의 한대화(현 경기운영위원)를 떠올렸다. 김 위원장은 “한대화는 B형 간염이라는 병마가 있었다. 한대화에 대한 지도방법은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확연한 스타일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귀띔했다.
한대화는 1983년 고향 팀인 OB 베어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 정규시즌 직전 개인훈련 도중 뒷산 약수터에서 돌려쓰는 바가지에 물을 받아 마신 뒤 간염이 발병했다. 당시 질병으로 제대로 된 훈련을 소화하기 힘들자 김성근 감독은 그를 양승호, 황기선과 2:1 맞트레이드로 해태로 보냈다.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했던 김응룡 감독은 소문과는 달리 한대화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김 감독은 한대화에게 훈련 시간에 맞춰 운동장에 오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추스리도록 한 배려였다. 한대화는 해태 최강 타선을 이루며 전성기를 보냈다.
김응룡 감독의 자율 야구는 주변인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하일성 전 KBO사무총장은 “김응룡 감독은 A, B조로 나눠서 훈련을 진행했다. 그만큼 훈련량을 줄인 것이다. 김응룡 감독의 지론은 야구의 기술적인 것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고 소개했다.
김성근 감독은 엄한 지도자였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김성근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김진욱 전 두산 감독은 “김성근 감독님은 무서우신 분이었다. 함부로 곁에 가기 힘들었다. 지금의 김 감독님은 매우 부드러워지신 것”이라고 털어놨다.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고 해서, 김성근 감독의 지도스타일이 김응룡 감독보다 뒤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일성 위원은 “김성근 감독은 눈으로 보고 움직이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철학이 있는 지도자다. 훈련을 통한 선수들의 성장을 유도했고, 꼼꼼한 계산과 악착같은 열정으로 목표를 이뤄냈다. 두 감독의 철학은 차이점이 있었지만 모두 훌륭한 지도자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명장은 색깔이 완전히 다른 감독이었다. 선수 훈련은 물론 경기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하일성 전 사무총장은 “김응룡 감독은 투수를 많이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만약 경기의 흐름이 상대팀으로 넘어가면 해당 경기를 일찍 포기하고 다음 경기를 도모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김성근 감독은 포기가 없었다. 불펜 투수들을 총 동원하며 죽기살기로 매 경기 물고 늘어졌다”고 회상했다. 비록 철학은 달랐지만 동료들과 선후배, 주변인이 기억하는 감정의 깊이는 비슷하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자신의 은퇴식장에 참석한 두 감독을 보면서 “김응룡, 김성근 두 거장과 함께 할 수 있어 큰 행운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경윤기자 bicycle@sportsseoul.com
출처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68&aid=000000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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