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1.
1957년 가을, 일본 교토 가쓰라고교 야구부에서 생애 첫 마운드에 올랐던 1학년 투수 가네바야시 세이콘은 ‘자이니치’였다. 그는 19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에 선발되면서 처음 ‘김성근’으로 불렸고, 2년 뒤 대만에서 열렸던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재일교포팀에 뽑혀 처음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도, 한국 실업팀에 입단할 때도, 그리고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영주 귀국할 때도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번번이 걱정하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 밖에 몰랐던 가쓰라고교의 재일한국인 투수는 50여년 후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과 가장 뜨거운 시샘을 한몸에 받는 프로야구 감독이 된다.
김성근 감독(73·한화)의 옛날 앨범 속에서 설렘과 어색함, 기쁨과 영광으로 기록된 '조국'의 추억을 찾았다.
[편집=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한국인 김성근’의 시작에는 교토 가쓰라고교 야구부의 가네바야시 세이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이 있다. 3학년때 고시엔 예선에서 빼어난 활약을 하면서 재일교포팀에 뽑힐 수 있었다.
19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의 전국순회 경기에 대해서 김감독은 감동과 설움의 기억을 함께 갖고 있다. 열광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았지만, 관중석에서 들려오던 ‘쪽발이’라는 연호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실업야구 교통부 시절인 1961년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대만)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던 것을 김감독(오른쪽 첫번째)은 벅찬 감격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응용 백인천(오른쪽에서 세번째)도 함께 뛰었다. 한국이 준우승했던 대회다.
김감독은 1975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대표팀 코치로 참가한다. 한국이 우승했고, 선수단은 모두 정부 포상을 받았다. 김감독은 ‘기린장’을 받았다.
김감독(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은 1978년 청소년대표팀 코치를 맡는다. 역시 재일교포 출신의 선배 지도자인 김영덕 감독(뒷줄 가운데)과 함께였다. 그때의 사진 속에서는 현재 KBO를 이끄는 많은 지도자들의 풋풋했던 열일곱살을 볼 수 있다. 양상문 LG 감독(두번째줄 가운데) 김광림 NC 코치(김감독 왼쪽) 박철영 넥센 코치(앞줄 맨 오른쪽) 이상군 한화 코치(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김상훈 해설위원(앞줄 가운데) 한대화 경기감독관(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양승호 전 롯데 감독(뒷줄 왼쪽에서 네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선수단복 두번째 줄 맨오른쪽은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전 OB)이고, 그 옆은 당시 광주일고의 에이스였고, 후에 해태 타이거즈의 20승 투수가 되는 이상윤이다. 이상윤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혼자 6승을 거두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김감독은 아직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WBC의 ‘드림팀’ 사령탑을 맡은 적이 없다. “한국에서 대표팀 감독까지 하겠다”는 당찬 결심과 함께 1964년 영주 귀국했던 그는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실업팀, 고교팀, 프로팀의 감독을 맡아 차례로 우승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꿈은 남아있는 셈이다.
[사진제공=김성근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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