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이형석]



김성근(왼쪽) 전 감독과 이승엽이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양광삼 기자



1942년생 김성근 전 한화 감독은 올해 만 76세다. 76년생 이승엽(42)은 지난해 은퇴했다. 둘은 일본 프로야구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독하고 진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김성근은 일본 프로야구서 '코치를 코치하는'일을 맡아 떠났다. 이승엽은 자신의 재단을 만들어 '야구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사복 차림으로 그라운드 밖에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반갑게 포옹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이승엽이 청바지 차림의 김성근 감독을 보며 "역시 패션 감각이 우와~"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어 "몸이 더 건강해진 것 같다. (체격이) 전혀 안 변하십니다. 저하고 바뀐 것 같아요. 제가 청바지를 입어야하는 나이인데…소화를 못해서"라고 하자 김 감독은 "집에 이것 밖에 없어"라고 웃었다.


이승엽은 김성근 감독이 옆에 있는데도 유독 "무서운 분이다"는 이야기를 수 차례 입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감사 인사도 역시 계속 표현했다. "이승엽이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김성근 감독은 그런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2005년의 인연, 이발기와 맥주 한 캔


2017년 10월 3일 대구 삼성-넥센전. 이승엽은 현역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6명의 지도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박승호 코치와 박흥식 코치, 백인천 감독, 류중일 감독, 김한수 감독,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다. 이렇게 회상했다. "지바 롯데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감독님이 정신 무장을 도와줬다."


깊은 인연은 2005년 지바 롯데에서 이뤄졌다. 2003년 아시아 개인 한 시즌 최다홈런(56개)을 쏘아올린 이듬해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계약한 이승엽은 첫 시즌에 타율 0.240, 14홈런, 50타점으로 기대에 못미쳤다.


외국인 선수 신분이었던 일본 무대에서 이승엽은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중 한 가지가 의사소통 문제였다. 당시 미국인 출신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지바 롯데의 타격 코치 역시 미국인 출신이었다. 이승엽의 담당 통역이 한국어를 일본어로, 타격 코치 담당 통역이 일본어를 영어로 바꿔 얘기했다. 이승엽은 "의사소통 과정이 복잡했다. 그때 한국인 코치가 있었으면 싶었다"고 회상했다. 지바 롯데는 일본어와 선수 지도에 일가견이 있는 김성근 감독을 순회코치로 모셔왔다.


이승엽은 지바 롯데에서 김성근 감독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일본 무대 첫 시즌 기대에 못미쳤던 이승엽은 당시 명예회복을 위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소 파격적으로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뭐든 바꿔보며 기분 전환에 나선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첫 마디는 강렬했다. "머리카락이 길다. 다 잘라라."


이승엽은 바로 근처 전자상가로 달려가 '바리깡(이발기)'을 샀다. 이승엽은 "김성근 감독님은 야구계에 무서운 지도자로 정평이 나있다. 이후 1년 간 미용실을 가지 않고 직접 이발기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했다.


두 사람이 결코 잊지 못하는 공통적인 순간이 있다. 2005년 9월 23일 지바 롯데-라쿠텐 골든이글스 전이다. 이승엽이 시즌 30호 홈런을 친 날이다. 경기를 마치고 원정 숙소로 돌아온 뒤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 방으로 와라."


이승엽은 잔뜩 긴장했다.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고 김성근 감독의 방을 노크했다. 예상 밖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넌지시 맥주 한 캔을 건넸다. 그리고 "고맙다. 네가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따뜻한 축하 인사를 들었다.


김성근 감독은 13년 전의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승엽이 표정이 굳었더라. '왜 불렀나' 싶었을거다"면서 "한국 야구에 대한 재인식을 하게 만들어주는 홈런이었으니까 기뻤다. 그래서 맥주를 나눠 마셨다"고.


이승엽의 시즌 30호 홈런은 김성근 감독이 지도자 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홈런이다. 김 감독은 "(SK 사령탑 시절 우승한) 한국시리즈에서 조동화와 김재현 등의 홈런도 있었지만 이승엽의 그 홈런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함께) 고생했으니 감동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승엽은 갑자기 김성근 감독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그는 "요즘도 다른 선수들은 감독님께 친근하게 대하던데 내가 유독 더 어려워한다. 감독님을 좋아하지 않아 연락을 안 드리는게 아니라 너무 어렵다. '마음 속 진심이 아니구나'라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바 롯데에서 김성근 감독의 영입 소식을 듣고선 '아 좋다. 이제 야구를 잘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첫 날 연습 후 '이거 큰일났다' 싶었다. 진짜 훈련을 많이 시켰고 무서웠다"고 덧붙였다. 혹독한 지도 방식은 한국 야구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비록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감독님 덕분이다. 2005년에 부진했으면 나를 원하는 팀이 없었을 텐데 마침 감독님이 오셔서 나를 잡아주셨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2005년 타율 0.260, 30홈런, 82타점을 올린 뒤 일본 최고 명문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이승엽은 "(김성근 감독의 도움 덕에) 마흔 둘까지 야구를 한 것 같다. 안 그랬으면 빨리 포기하고 '아~때려 치우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돌아봤다.





◇"감독님 야구 열정의 무릎에도 못미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새 출발로 옮겨졌다.


이승엽이 먼저 "감독님 소프트뱅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라며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승엽은 "언제 출국하십니까?" "소프트뱅크에서 얼마나 계십니까?" "1군? 2군? 어디에서 지도하십니까"라며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감독은 차근차근 이승엽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잠시 후 이승엽이 "일본인 코치들이 많이 혼나겠네요"라고 하자 인터뷰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두 사람의 야구 열정은 타의 주종을 불허한다. 70대 중반의 노(老) 감독은 야구공을 놓는 걸 싫어한다. 지난해 5월 한화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마야구 선수를 가르쳤다. 이번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타자이자 야구 원로 오 사다하루(왕정치) 소프트뱅크 회장의 제안으로 소프트뱅크의 코치 고문직을 맡아 1년 간 2~3군 코치들을 지도한다. 우리 보다 한 단계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국내 지도자가 유능한 코치를 육성하는 역할, 한국 프로야구의 자존심을 한 단계 높여주는 일이다.


이승엽은 "제 야구 열정은 감독님의 무릎에도 못미친다. 감독님은 워낙 야구를 좋아하시니까"라고 혀를 내둘렀다. 김성근 감독은 한국 야구사에 호불호가 갈리는 지도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선수들의 펑고 훈련을 위해 하루에도 수백번 배트를 휘두르고, 밥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야구에 관한 고민을 했다. 김성근 감독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웃어 넘겼지만, 그 열정만큼은 가볍게 평가하는 이가 많지 않다. 김 감독은 코치 지도를 위해선 자신의 체력 역시 필수라고 여겨,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정도다다.


누구 보다 곁에서 오랫동안 김 감독을 바라본 이승엽은 "내가 감독님의 야구 열정을 반만 따라갔어도 조금 더 잘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일본 프로야구 진출에 대해선 후회가 없다. 다만 조금 더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후회가 남는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감독님 야구 열정의 50%만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스승의 눈에 비친 제자 역시 마찬가지다. "쉰 살까지 선수로 뛰어야하는데 (은퇴 시기가 너무) 빨라"라고 웃었지만,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쉽지 않은 길을 택한 이승엽이 대견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승엽은 야구 재단 설립에 한창이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클 법 하지만 야구 재단 설립과 KBO 홍보위원 등을 맡으며 야구 발전에 끊임없이 기여하는 길을 택했다. 3월 재단 발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걸어가야하는 필수 코스가 아닌가 싶다"며 "한국 야구가 조금 정체됐다고 할까? 이제부터 조금씩 세대교체도 하고 바뀌어야한다. 조언할 점이 많을 것이다"고 했다. 이어 "현역에서 은퇴했어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선수다. 어린 꿈나무를 위해 재단 설립은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고 반겼다.


특히 은퇴 순간까지 '국민타자'의 위치에서 구설수 없이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마무리한데 높은 평가를 했다. 김 감독은 "(야구 선배로) 미안한 점이 많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인상 남기느라 고생이 많았다. 우리나라 야구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지 않나. 그걸 유지하는건 힘든거다. 본인이 하고 싶은 행동이나 이야기를 마음껏 못한다"며 "앞으로도 승엽이는 잘할 것이다"고 응원했다.

곁에서 들은 이승엽은 김성근 감독을 향해 이렇게 다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대충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고심하고 또 고심하고 있습니다. 준비기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라고요. 좋은 일 하고 욕먹으면 안 되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라고.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좋은 일 해도 욕 먹게 되어있는거야"라고 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 어쩌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실적인 충고일지 모른다.


새 출발을 앞둔 두 사람은 서로의 앞날을 다시 한 번 응원하며 인사했다. 김성근 감독은 "얼른 밥 먹어야지. 들어가봐. 잘 보고 있을게"라고 작별의 인사를 건네자 이승엽은 "감독님, 다시 한 번 소프트뱅크 코치 고문직을 맡게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일본에서 좋은 코치 많이 발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며 고개 숙였다. 김성근 감독은 흐뭇하게 웃으며 이승엽을 바라봤다.



출처 : http://v.sports.media.daum.net/v/20180206060025437


Posted by 개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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