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이상서]
2011년 9월 15일~2014년 9월 11일.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가 이 땅에 머문 기간이다. 2015년 3월 16일, 그들이 흘린 1093일 간의 땀과 눈물을 담은 영화 <파울볼(4월 2일 개봉)>이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언론 시사회에 참석한 김성근 당시 원더스 감독은 “한화 선수들과 함께 보는 내내 계속 울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시간순으로 덤덤히 써내려 간 이 영화는 곳곳에 울컥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 속 사람들은 많이 울었고, 관객들도 그것을 보며 또 울었다. 당사자인 선수들은 오죽했으랴. 특히나 가슴으로 울었던 원더스 사나이 5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더스 이후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봤다.
▲최향남, 원더스 정신의 계승자
2014년 3월 14일 수원 성균관대 야구장에서 열린 퓨처스리그 KT위즈와 고양원더스의 연습경기에서 원더스 최향남이 6회말 투구를 마치며 마운드에서 내려온 후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있다
“나를 안 되게 하는 신이 있다면,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무명이 대부분인 원더스지만 그중에서 낯 익은 얼굴도 있었다. 바로 원더스의 최고령 선수이자 프로야구의 풍운아인 최향남이다. 마흔 다섯의 나이에도 “다시 마운드에 선다면 남은 미련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다. 최향남은 한미일 프로리그를 모두 거친 뒤 2014년 원더스에 입단하며 재기의 꿈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세미프로리그 다이빙 덕스가 제작한 최향남 입단 환영 파티 포스터
원더스의 마지막을 옆에서 지킨 그는 최근 오스트리아 리그에 입단했다. 오스트리아 세미프로팀 다이빙 덕스는 지난 10일(한국시간) “한국 프로야구와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뛴 최향남을 영입했다. 그의 나이를 보고 기량을 판단하지 마라. 그는 오스트리아 야구에 많은 것을 선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소도시 비너 노이슈타트를 연고로 한 다이빙 덕스는 세미프로 1부리그 소속이다. 기량은 한국의 대학 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3월 29일 최향남의 입단 환영 파티도 연다. 최향남은 원더스 해체 당시 “이게 끝이 아니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원더스 정신을 이어갈지 주목해 보자.
▲‘끝나지 않은 도전’ 김수경
원더스에서 화려한 경력으로 치자면 이 선수가 제일임이 분명하다. 한국프로야구 신인왕이자 다승왕 출신인 김수경이다. 2013년 당시 소속팀이던 넥센 히어로즈의 코치직을 뿌리치고 원더스에서 ‘다시 한번 도전’을 노래했다. 김수경은 영화에서 “언제나 선수로서 뛸 수 있는 그라운드를 그리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얼하고 있을까.
김수경의 현재 신분은 무적 선수다. 그러나 여전히 목표는 프로 입단이다. 작년 12월 한 스포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김수경은 LG 출신의 트레이너가 운영하는 서울 광진구의 한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물론 김수경의 도전은 험난하다. 그는 KBO의 올시즌 선수 등록 마감일인 1월까지 새 팀을 구하지 못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계약이 성사되면 육성선수(신고선수)로 입단해 5월 이후 1군 무대에 출장할 수 있다. 김수경은 “야구 없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팬들 역시 과거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 역할을 해냈던 시절을 원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단 한 번이라도 프로 마운드에 선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원더스의 또 다른 선구자’ 정규식
‘2014년 3월 14일 수원 성균관대 야구장에서 열린 퓨처스리그 KT위즈와 고양원더스의 연습경기에서 원더스 정규식(32번)이 5회초 1사에서 2점 홈런을 날린 후 홈인하고 있다
원더스는 흔치 않는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이 모인 팀이다. 정규식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대학교를 나와 일본 실업리그를 거쳐 원더스까지 흘러온 것이다. 일본 유학 시절, 정규식은 집안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낮에는 야구를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깃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스시집에서는 우동과 튀김을 만들었다. 백화점과 콘서트장을 짓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공장 전체를 페인트 칠한 적도 있었다. 일본인 선배로부터 “한국놈 주제에”라는 차별까지 받았다.
방황하던 그를 잡아준 것은 김성근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원더스 구장을 찾은 정규식에게 “야구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라”는 말과 함께 번호를 건냈다. 그리고 정규식은 2013년 말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 그렇게 1년 뒤, 정규식은 또 한번 신화를 만들었다. 작년 8월 25일 열린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원더스 출신 최초로 지명을 받은 것이다. LG는 4라운드 37순위에서 포수 정규식을 선택했다.
정규식은 LG에서 성장하고 있다. 올해는 희망도 보인다. LG의 터줏대감인 현재윤이 은퇴했고, 경기 수도 144경기로 늘어나면서 백업 포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작년 주전으로 도약한 최경철과 함께 정규식은 LG의 안방을 책임질 게 분명하다. 가능하다. “매일 같이 그 어떤 선수보다도 늦게 야구장을 떠났”던 일본 시절 정규식의 열정이 건재하다면 말이다.
▲‘원더스의 열정에서 롯데의 희망으로’ 안형권
“선수가 아니라 통역하러 마운드에 올라가는 게 진짜 부끄러웠어요.” 안형권은 미국에서 나고 자라 영어가 능숙하다. 안형권은 다음에 설명할 설재훈과 더불어 원더스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던 몇 안 되는 선수다. 2011년 창단 테스트를 거쳐 원더스에 입단했다. 안형권은 3년째 원더스의 강훈련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성근 감독님께서 평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인생에 대한 이야기. 감독님께선 거북이처럼 늦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토끼처럼 빨리 성공하는 사람도 있대요. 감독님은 거북이래요. 저도 거북이처럼 하다 보면 성공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안형권은 안정적인 수비와 더불어 작년 퓨처스리그 50경기에서 타율 2할 1푼 3리, 18타점을 기록했다. 원더스가 해체하고 정확히 열 하루 뒤, 작년 9월 22일 롯데는 같은 원더스 출신인 이병용과 더불어 안형권을 영입했다. 롯데는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외부 영입을 포기하고 기존 선수들을 육성하겠다”고 발표 했다. 안형권은 롯데에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롯데팬들의 야구보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다.
▲‘원더스의 처음과 끝’ 설재훈
설재훈. 원더스와 흥망성쇠를 함께 했으며(중간에 잠시 퇴단한 적도 있지만), 그래서 김성근 감독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분량이 많은 선수다. <파울볼>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버틸 때까지 버텨 보려구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원더스의 해체 발표 당시 가장 서럽게 울었던 그는 이후에도 그라운드에 나가 훈련을 했다. 과거 “야구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며 원더스를 뛰쳐 나갔던 그는 아픔을 머금고 그렇게 성장했다.
버티니까 기회도 왔다. SK 와이번스는 작년 11월 육성선수 신분으로 설재훈을 영입했다. SK 퓨처스 소속의 설재훈은 지난 달 12일부터 이번 달 10일까지 대만 타이중에서 진행한 2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해 훈련을 받았다. 기량이 만개했다. 세이케 SK 퓨처스 감독은 성실한 훈련 자세로 기량이 급성장한 신인 투수 유상화와 함께 외야수 설재훈을 캠프 최우수선수(MVP)로 뽑았다.
김성근 감독은 파울볼의 의미를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했다. 초기 야구에서 파울볼은 수비수가 원바운드로 잡기만 해도 아웃으로 쳤다. 그러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번트가 파울이 되면 자동으로 삼진아웃 처리하는 규칙을 추가했다. 이후 수 차례 규정의 변화를 반복하다 26년이 지난 1901년이 되어서야 지금과 같은 룰이 만들어졌다. 규칙을 수시로 바꾼 이유는 하나다. 타자-투수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4번타자든 9번타자든 모두 똑같은 최소 3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야구란 종목이다. 2015년 3월 20일, 내일 모레는 대한민국의 두 번째 독립구단인 ‘미라클’이 창단식을 가진다. 다시 ‘열정에게 기회를’ 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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