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오랜 기간 동안 모신 감독님도 아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허심탄회하게 말보따리를 풀어 놓고 얘기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거나 쉴 때 나는 그와 같은 숙소를 썼고, 스탭으로서 그를 보필하는 것만이 그와 맺은 관계에 전부였다.
나는 당시에 그의 얼굴을 가끔씩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한 때 그의 느닷없던 행동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김성근 감독님이 나를 부른다고 했다.
"갈 데가 있다. 가자."
"어디갑니까?"
김성근 감독님은 대답 대신 앞으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나는 몹시도 궁금했다. 머릿속에서는 내가 잘못한게 뭘까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선수들 사이에서 그는 호랑이로 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연습과정을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그의 성격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한 방을 쓰고는 있지만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는 연습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혼나고 말고 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앞서서 한참을 걷더니 은행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거였다. 그는 거기서 내게 2000만원이라는 거금을 자신이 보증인이 되어 빌려주었고, 자신은 내게 거의 맞먹는(2000만원) 돈을 개인적으로 빌려주었다. 나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김 감독은 내가 엄청난 빚더미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찬찬히 얘기를 듣고는 자신이 한 부대의 수장으로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심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아는 분이 있는 은행으로 곧바로 오게 된 것이다.
모든 식구를 돌봐야 하는 가장이 사사건건 다 챙길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중대안 사안이라면 자신이 발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가장들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김 감독은 그 가장의식이 철저했던 사람으로 내 기억속에 남을 것이다.
나는 어쨌든 그에게서 '말없음'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 고마움의 뒷편에 있는 그 아련함을 나는 무어라고 불러야 할 지 아직모른다. 말은 때때로 자기 마음을 곡해한다. 듣는 상대방은 좋은 뜻으로 얘기한 것을 반대로 받아들여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은, 정신은 직접 입으로 내어 놓지 않는다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한 사람의 눈을 통해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말 없이 행동하는 것에서 보기도 한다.
그분은 프로생활뿐 아니라 내 선수생활 통털어 만난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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