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9 10:00:00
▲ 70년대 신일고 감독 재직 시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SK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다음날. EBS 라디오에서 ‘세계 음악기행’을 진행하는 성기완씨는 김성근 감독과 연관이 있는 자신의 중학생 시절 경험담을 얘기했다고 한다.
방송을 들은 팬이 한 야구 게시판에 올린 글에 따르면 성기완씨는 자신의 충암중 선배(당시 충암고 야구선수)로부터 “김 감독이 훈련 중 한 선수의 배트에 입을 맞고 쓰러졌다. 앞니가 다 빠질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김 감독은 선수를 혼내지 않고 “네 스윙 궤적 안에 들어가 있던 내 잘못”이라고 위로하더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야구의 신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성기완씨의 기억은 정확하다. 실제로 김 감독의 앞니는 모두 틀니다. 당시는 충암고가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해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 감독은 한 선수를 집중 지도하고 있었는데 너무 몰입 했던 탓에 자신이 조금씩 그 선수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러다 알루미늄 배트의 사정권(?)까지 들어가게 됐고 결국 사고가 터진 것이다.
김 감독은 “왜 화가 안 났겠어. 이가 빠진 것은 둘째치고 입이 금세 부어오르고 통증이 너무 심해 엄청 괴로웠지. 하지만 놀란 아이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낼 순 없었어. 특히 그때 분위기는 더 그러면 안됐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의 말 한 ‘그때 분위기’란 당시의 충암고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당시 충암고엔 더 큰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김 감독의 부상은 사고 축에도 못 들 정도였다.
황금사자기가 끝난 뒤 충암고 선수들은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전국대회 4강=대학 입학’이라는 족쇄 때문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패배였기에 어린 선수들의 동요는 매우 심했다.
스트레스는 곧 이상 행동으로 이어졌다. 충암고 선수들끼리 난투극이 벌어져 한명이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먼저 터졌다. 얼마 뒤에는 선수들이 술을 마시다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도 또 한명이 다쳐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김 감독은 그때마다 경찰서로 불려다녀야 했다. 사건이 진정된 뒤에는 매일같이 3군데 병원을 오가야 했다. 자신의 치료를 위해, 또 입원한 두명의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선수들 이상으로 황금사자기 패배가 아팠던 김 감독이었기에 당시 연이은 사건들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선수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리더는 위기가 닥칠 수록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리즈 ‘3회말’에 언급했던 것처럼 산과 계곡으로 선수들을 몰고 다니며 가슴 속 응어리들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김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선수들을 많이 혼내. 예전엔 때리기도 했었지. 하지만 철칙이 하나 있어. 술먹고 때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거였어. 때리는건 야구를 잘 하게 하기 위해서지 감정이 앞서면 그건 폭력이잖아. 아버지가 아들 때릴때 감정으로 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야. 사고가 났을때 리더가 흥분해서 날뛰면 애들은 그걸로 끝이난다고 생각해.”
쌍방울 감독 시절의 경험담에서도 그의 ‘리더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서울 원정길에 오른 김 감독은 그날도 밤 늦도록 데이터를 연구하며 다음날 경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밖이 좀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쌍방울 원정 숙소로 조직 폭력배들이 들이닦친 것이었다. 폭력배들은 “A 선수를 당장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이유가 더 황당했다. A선수가 그 조직 보스의 애인과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 감독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 감독이 직접 나선 뒤에야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물론 A선수는 끝까지 숨겨놓고 있었다. 김 감독은 “그땐 정말 무섭더라”며 너털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당시 속 마음이 어땠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A선수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야구 선수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 기분만으로 선수를 몰아친다면 선수 생명은 물론 인생까지 막장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홀로 분을 삭였다.
그는 여전히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은 선수라면 모를까 하고자 하는 선수에겐 어떻게든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덧붙이기 : 김 감독은 고등학교 감독 시절 선수들을 집으로 데려가 금값같던 소고기로 직접 ‘샤브샤브’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충암고 시절 계곡으로 놀러다닐때는 그 횟수가 더욱 늘었다.
그때 익힌 솜씨 덕분에 지금도 ‘샤브 샤부’요리엔 자신을 갖고 있다. 개포동에 있는 그의 단골 ‘샤브 샤브’집은 김 감독의 조언을 받은 뒤 손님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홀 서빙을 하는 한 아주머니의 반응이 재미있다. “사장님이 계속 감독님이라 부르며 지적을 받으시길래 난 식당 감독을 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 감독님은 우리 가게서도 감독님이다.
출처 : 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098806583324080&DirCode=00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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