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8 08:21:01
▲ 충암고 선수들이 77년 봉황기 우승을 차지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수 장비를 착용한 선수는 조범현 현 KIA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김성근 감독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40여년의 감독 생활 중 운동장에서 울어본 것은 딱 두 번. 충암고 감독시절이던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서 신일고에 패했을 때, 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서 6차전 삼성에 역전패를 당하고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김 감독은 아직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끔씩 “그때 조범현(KIA 감독. 당시 주전 포수)이 마스크로 땅을 치며 “이제 우리 대학 우찌 가노, 우찌 가노”하며 우는 걸 보니 마음이 무너지더라”, “이동현이가 6차전 던지고는 탈진으로 쓰러져 라커에 누워 있었어. 9회 역전을 당하고 갑자기 서럽게 우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라며 회상에 잠기고는 한다.
고된 훈련을 버텨내며 많은 땀을 흘린 선수들에게 미안해서다. 그 어느때보다 많은 땀을 흘리며 이기기 위해 노력했던 선수들이었기에 그들의 눈물은 김 감독의 가슴을 세차게 후벼팠다.
그러나 김 감독은 눈물을 흘려버리지 않았다.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둔 채 조용히 칼을 갈았다. 한번의 실패가 두 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 경기가 끝나는 순간 홀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시작은 패인 분석부터였다.
▲77년 황금사자기 - 김 감독은 우선 에이스 기세봉이 열흘 이상 계속되는 대회를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이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기세봉은 신일고전서 9회 1아웃 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잘 던지다 2아웃을 남겨놓고 3점을 내줘 패전투수가 됐다.
이후 기세봉에게는 기술 훈련보다는 힘 있게 공을 던질 수 있는 체력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다. 그렇게 던지게 하진 않았지만 목표는 ‘6경기 모두 완투가 가능한 수준까지’였다.
두 번째는 분위기 전환이었다. 당시 충암고는 야구부가 해체된 대건고 출신 선수들과 기존 선수들의 연합팀이었다. 이기는 것 보다 지는 것이 익숙했던 만큼 당대 최강 전력이었던 신일고는 이름만으로도 주눅이 들게 했다. 거기에 다 잡았던 경기를 놓쳤던 아픔까지 더해졌으니 어린 선수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김 감독은 봉황기를 준비하며 짬짬이 선수들에게 즐길 시간을 줬다. 산으로 계곡으로 찾아다니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게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중 쓴소리도 가급적 자제했다.
전략에도 변화를 줬다. 충암고는 봉황기서 다시 신일고와 맞붙었다. 팽팽한 승부는 하루를 넘겨 이튿날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이어졌다.
다음날로 미뤄진 경기서 충암은 1사 2루의 기회를 잡았다. 김 감독은 이때 히트 앤드 런을 지시했다. 2루에 주자를 놓고 히트 앤드 런 사인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 무모함 보다는 신중함을 선호하는 김 감독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작전이었다.
김 감독은 그 이유를 “선수들의 공격적 성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신일고라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벤치에서 선수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암고가 말 공격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이번에 안되면 다음도 있다’는 계산도 함께 깔려 있었다.
김 감독의 마음이 선수들에게 전달된 것이었을까. 결국 충암고는 신일고를 물리쳤고 그 대회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2002년 한국시리즈 - 당시 LG는 4강에 오른 팀 중 가장 허약한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이기기 위해선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불펜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준 플레이오프서 현대를 꺾었고 우승 전력으로 꼽혔던 KIA는 5차전까지 가는 혈투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잃은 것도 있었다. 선수들,특히 불펜 투수들의 부하가 너무 심하게 걸려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막강 삼성 타선을 잘 막아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힘이 부칠 수 밖에 없었다.
5년이 흘러 2007년 한국시리즈. 가을 잔치에 다시 서게 된 김 감독은 마운드 운영 방식을 달리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SK 선발 투수들의 스테미너가 4일 텀(3일 휴식 후 등판)을 버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또 2002년처럼 불펜 투수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선 선발 투수들이 가능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줘야 하는데 3일 휴식으론 무리가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4인 로테이션이다.
포스트 시즌은 3인 선발 체제로 꾸리는 것이 대세로 여겨졌다. 1992년 롯데가 윤학길 염종석 윤형배로 이어지는 3인 선발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또 한번의 파격 아닌 파격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야인 시절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김 감독은 2002년 LG에서 해임된 뒤 2년간 스포츠 투데이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김 감독은 “그때 포스트시즌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며 많은 공부가 됐다”고 했다.
가장 큰 교훈은 큰 경기서 모든 불펜 투수들이 매일같이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우리(SK)가 페넌트레이스에선 6명,7명씩 투수를 쓰며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한국시리즈서도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것들을 종합해 보고 내린 결론이었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출처 : http://spn.edaily.co.kr/sports/newsRead.asp?sub_cd=EB21&newsid=01131606583323752&DirCode=00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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